계절도 날짜를 맞추는지 10월이 되면서 기온이 쑥 내려갔다. 어제부턴 선풍기 바람도 이젠 춥게 느껴진다. '기운다'는 표현은 이럴 때도 쓸 수 있을 듯싶다. 어떤 기준으로도 '여름'은 갔다. '겨울'이 남았을 뿐이다. 유난히 추워질 거라는 '설'이 있지만 그보다는 밤이 점점 길어진다는 게 내가 체감하는 겨울이다(러시아만큼은 아니더라도). 10월마저 손에서 놓으면 겨울이 문턱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 10월에 손에 들 만한 책들을 골라본다. 지난달부터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좋은책 선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돼 내가 고른 책도 포함돼 있다.
1. 문학
김미현 교수가 고른 책은 벤 라이더 하우의 <마이 코리안 델리>(정은문고, 2011)다. '백인 사위와 한국인 장모의 좌충우돌 편의점 운영기'가 부제. 그러고 보니 소설이 아니라 '외국에세이'로 분류되는 책이다. "저자인 벤 라이더 하우는 한국인 장모를 통해 한국 이민 사회의 그늘과 빛을 모두 경험한다. 생존과 성공을 위해 억척스럽게 일하면서도 비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속성을 동시에 지니는 장모 세대의 가치관과, 저자인 벤 라이더 하우의 합리적이지만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청교도 백인 중산층 문화가 정면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란 소개를 읽으면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한국사회를 체험한 '외국인'의 에세이라고 하니까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의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노마드북스, 2011)도 생각난다. 엊그제 대학로 이음책방에 갔다가 손에 든 책이다. 눈에 띄기에 같이 계산한 책이 <1898, 문명의 전환>(이학사, 2011)이다. <남자의 탄생>과 <박정희 평전> 등의 저자 전인권의 6주기를 맞아 유고와 함께 그와 같이 공부했던 이들이 마무리한 글들을 묶었다. 부제는 '대한민국 시공간의 기원'. 문학 분야의 책은 아니지만 '한국과 한국인'이란 주제를 깊이 파고들어간 책으로 끼워넣는다.
2. 역사
김기덕 교수가 추천한 책은 <유홍준의 국보순례>(눌와, 2011). 군말이 필요없는 책이다. "이 책을 계기로 이제 국보와 보물도 역사학의 범주에서 다시 고찰하고 연구해야 하는 과제를 던져준 셈이다. 이래저래 유홍준 교수는 한국사의 지평을 넓혀주면서, 역사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과제와 임무를 던져주고 있다."는 게 추천자의 촌평이다. '국보순례'니까 한국사이면서 미술사에 관한 책인데, 이런 경우에도 갈래는 모호하군. 내친 김에 한국미술사에 관한 신간들을 클릭해본다. <클릭, 한국미술사>(예경, 2011)와 <한국불교미술사>(미진사, 2011)가 올해 나온 책들이다. 작년에 1권이 나온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도 후속 권들이 계속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고른 책은 엔터니 플루의 <존재하는 신>(청림출판, 2011)이다. 사실 주제 자체는 전혀 흥미를 끌지 않는데, 저자가 영국에서는 무신론자고 꽤 유명한 인물이었나 보다. 그러다 '신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화제가 된 모양. "이 책의 저자 엔터니 플루는 소크라테스의 분석철학적 전통을 이어 받아 “증거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가서” 과거 합리적 무신론의 선봉장 역할을 하다 유신론 진영으로 투항한 철학자다."라고 설명한다. 신경과학자들이 <신은 뇌 속에 갇히지 않는다>(21세기북스, 2011)나 이어령의 <지성으로 영성으로>(열림원, 2011) 등이 비슷한 '커밍아웃' 형 책이다.
물론 무신론의 보루는 플루가 비판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지만 무신론에 대한 입문서로는 줄리언 바지니의 <무신론이란 무엇인가>(동문선, 2007)이 좋을 듯싶다. 바지니는 인생의 의미를 다룬 <빅 퀘스천>(필로소픽, 2011)의 저자다. 지난달에 강의차 꼼꼼히 다시 읽었는데, 처음 읽을 때보다도 더 재미있었다.
계절을 타는 이라면 낙엽의 계절인지라 삶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쯤 물어봄직한데, <빅 퀘스천>과 같은 시리즈의 책으로 폴 새가드의 <뇌와 삶의 의미>(필로소픽, 2011), 그리고 가미야 미에코의 <삶의 보람에 대하여>(필로소픽, 2011)도 읽어봄직하다. 특히 일본의 영문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가미야 미에코는 버지니아 울프 연구와 푸코 번역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빅 퀘스천>에서도 언급되는 존 코팅엄의 <삶의 의미>(동문선, 2005)은 바지니보다는 플루와 좀더 가까운 입장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4. 정치/사회
마인섭 교수가 고른 책은 이종은의 <평등, 자유, 권리>(책세상, 2011)다. <언어와 정치>(인간사랑, 2009), <정치와 윤리>(책세상, 2011) 등에 이어지는 책으로 저자는 독자적인 정치철학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학자. 학술적인 성격의 책이긴 한데, 추천자는 그 의의를 이렇게 짚었다. "한국 민주주의가 자유의 평등화라는 정상적인 길을 밟아오지 못하였다는 저자의 관찰은 새롭기도 하고 제법 흥미로운 쟁점이기도 하다. 평등, 자유, 권리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수용되고 있는가를 짚어본 시도는 아주 흥미롭다. 저자는 교육 평준화, 수능 등급제, 지역 할당제의 교육정책의 쟁점들에 나타난 평등의 문제를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평등의 복잡한 개념과 달성 가능성을 논하였다."
사실 10월은 서울시장 보선이 있는 정치의 달이기도 하므로 정치인들의 책과 정치평론 범주에 속하는 책들이 대거 쏟아져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중에서도 단연 베스트셀러감은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푸른숲, 2011)다. '나꼼수 세대'의 열광적인 지지와 <닥치고 정치>가 한국 정치지형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한겨레의 인터뷰 연재를 모은 한홍구, 서해성의 <직설>(한겨레출판, 2011), 그리고 손석춘의 <새로운 바보를 기다리며>(21세기북스, 2011)도 '지금, 여기'에 관한 책들이다.
5. 경제/경영
박원암 교수가 고른 책은 프릭 버뮬렌의 <비즈니스의 거짓말>(프롬북스, 2011)이다. 사실 비즈니스는 관심사가 아니가 관련서를 읽을 일이 거의 없지만, 이 책은 흥미를 끈다. 추천자에 따르면 기존의 책들과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어서다. "저자는 이 책이 어떻게 하면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는지 알려 주는 시중의 책들과 다름을 강조한다. 저자는 철저한 연구와 입증된 자료에 근거하여 성공을 장담하는 법칙은 없음을 독자들에게 보이려 한다." 그러니 '성공'을 장담한다면, 다 '거짓말'이다. 범람하는 비즈니스 책들 가운데 군계일학으로 꼽아둘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거짓말 유혹은 강력하다. 거짓말 같지 않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간과 정보는 사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즉각적인 소통과 실행이다!'라고 선동하는 <실시간 혁명>(더숲, 2011)은 어떤가. '급변하는 소셜미디어와 스마트의 시대, 기업과 조직은 무엇을 준비하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란 부제가 즉각적인 구입을 선동한다! '비즈니스 패러다임을 바꾸는 모바일 혁명'을 모토로 한 척 마틴의 <서드 스크린>(비즈니스북스, 2011)도 골라놓고 보니 강적이다. 그래도 기본은 '비즈니스의 거짓말'에 주의하라는 것.
6. 과학
김웅서 한국해양연구원 선임연구본부장이 추천한 책은 <조복성 곤충기>(뜨인돌, 2011)다. 우리에게도 이런 곤충기가 있었다는 걸 알게해주는 책인데, "이번에 발간된 <조복성 곤충기>는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곤충기』라는 이름으로 선보였다가, 63년 후에 다시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나 단지 옷만 바꿔 입고 출연한 것은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에 나오는 곤충의 그림도 새로 곁들이고, 엮은이의 자료 발굴 노력으로 내용도 추가되고, 또 곤충 전문가들이 꼼꼼하게 감수하였다." <파브르 곤충기>를 읽었다면 <조복성 곤충기>도 읽어볼 일이다. 곁들여 휴 래플스의 <인섹토피디아>(21세기북스, 2011)는 어떤가. 말 그대로 '곤충 백과사전'. 개인적으로 어제 주문해놓고 오늘 배송을 기다리고 있는 책가운데 최고의 기대작이다. 이상교의 <곤충만세>(미세기, 2011)은 그림을 곁들인 동시집이다. 아빠가 <인섹토피다아>를 읽을 때 아이는 옆에서 <곤충만세>를 읽는 풍경을 잠시 떠올렸다.
7. 예술
이주은 교수가 고른 책은 정병모의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다할미디어, 2011). "저자는 민화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자유로움을 꼽는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관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신분의 자유로움에서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의 문화가 역사의 전면에 부각되는 18세기라고 하는 시대적 자유로움에서 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같은 저자의 책으로 <미술은 아름다운 생명체다>(다할미디어, 2001), <한국의 풍속화>(한길아트, 2000) 등도 눈에 띈다. 이미 10년 전 책들이군.
개인적으론 최근에 아르코미술관의 '몹쓸 낭만주의'전 세미나 등에 참여하면서 한국 현대 작가들의 작업에 다시 관심을 두게 됐다. 그래서 관련서 몇권을 주문해놓은 상태인데, 이진숙의 <미술의 빅뱅>(민음사, 2010), 권근영의 <나는 예술가다>(세미콜론, 2011), 김정환의 <어떤 예술의 생애>(호미, 2011) 등이다. 더불어, 미술이론서와 미술사 관련서들도 이 참에 '업뎃'을 했다. 애서가들이 주기적으로 또 해야 하는 일이 이런 업뎃이다.
8. 교양
교양분야의 책은 내가 골랐는데, 석영중 교수의 <뇌를 훔친 소설가>(예담, 2011)가 첫 책이 됐다. 간단한 소개는 이렇게 적었다.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라는 부제가 얼핏 문학적 감동의 뇌과학적 원리를 떠올리게 하지만 초점은 문학과 뇌과학(신경과학)의 만남이고 접점이다. 어디서 만나는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의미 있는 삶의 탐색이라는 지점에서 만난다. 책은 흉내, 몰입, 기억, 변화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통해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과 함께 그러한 조건하에서 ‘의미 있는 생존’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뇌과학과 문학, 어느 한 쪽만을 편독해 온 독자라면 보다 균형 잡힌 교양을 위해 길잡이로 삼을 만하다.
이 책을 읽다가 뇌과학서를 몇권 더 구입했는데, 노먼 도이지의 <기적을 부르는 뇌>(지호, 2008)과 닐 레비의 <신경윤리학이란 무엇인가>(바다출판사, 2011) 등이 그런 경우다.
9. 실용
손수호 논설위원이 추천한 책은 유경숙의 <유럽 축제 사전>(멘토르, 2011). ‘28개 국 101개의 유러피언 페스티벌 속으로 안내하는 책’, ‘열정과 전통, 파격이 살아 숨쉬는 유럽 축제의 모든 것을 담은 책’이란 문구가 책의 내용을 말해준다. 유럽 축제 가이드북. 한때 유럽축제문화에 대한 책들이 여럿 나온 적이 있었는데, 다시 찾으니 <유럽의 축제문화>(연세대출판부, 2003)과 박종호의 <유럽음악축제 순례기>(한길아트, 2005) 정도를 건지겠다. 하긴 수확의 계절은 축제의 계절이기도 했으니, 기분을 좀 내보는 것도 좋겠다. 정말로 유럽에까지 가야 하는 건가?..
10. 중국의 지식인
내 맘대로 고른 주제는 '중국의 지식인'이다. 최근에 나온 몇권의 책 때문인데, 올해 관심을 갖고 주섬주섬 책을 모아오던 아이템이어서 넙죽 구입했다. 국민대학교 중국인문사회연구소에서 펴낸 책 세 권이다.
거기에 왕후의 책 세 권도 더 보탤 수 있겠다. 순서대로 하면,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창비, 2003), <죽은 불 다시 살아나>(삼인, 2005), 그리고 <아시아는 세계다>(글항아리, 2011)이다.
개인적으론 러시아 지성사에 대해서도 이만한 규모의 책들이 출간되면 좋겠는데, 그나마 최근에 나온 <러시아 문화사 강의>(그린비, 2011)가 기본서의 공백을 채워주는 책이고,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 사상가>(생각의나무, 2008)과 올랜도 파이지스의 <나타샤 댄스>(이카루스미디어, 2005) 이후에 아직 특별한 '업뎃'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싶다. 20세기 지성사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백지 상태여서 아쉽다.
11. 10. 01.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은 플라톤의 <국가>를 골라놓는다. 부분적으로야 읽곤 하지만, 완독한 적은 없는데, 이번에 나온 에릭 해블록의 <플라톤 서설>(글항아리, 2011)이 자극이 됐다. 다시 읽고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싶다. 그래서 <국가>와 관련된 책을 또 모으고 있는데, 네틀쉽의 <플라톤의 국가론 강의>(교육과학사, 2010)도 그중 하나다. 1925년에 나온 책이니 정말 오래 전 책이고, 책의 토대가 된 강의는 한술 더 떠서 1887년과 1888년 초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책은 국내 교육학 전공자들이 옮겼다.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확산되고 깊어진 건 역설적으로 현 정부의 '치적'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내달에 있을 정치철학 강의도 준비할 겸 두 종의 <국가란 무엇인가>도 이달의 읽을 책 목록에 들어 있다. '토건국가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을 그린 최병성의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오월의봄, 2011)는 또다른 방식으로 국가란 무엇인지 묻는 책이 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