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를 다룬 책 소개기사를 연거푸 올리고 있는데, 이번엔 규장각 연구원인 강문식과 이현진의 <종묘와 사직>(책과함께, 2011), 그리고 임금의 공부를 다룬 김태완의 <경연, 왕의 공부>(역사비평사, 2011), 두 권이다.    

문화일보(11. 08. 26) “조선 종묘·사직, 國運따라 성쇠 겪어”

사극이나 영화 속에서 “이 나라 종묘와 사직이 위태롭다”거나 “종묘와 사직을 위한 길이다” 등의 표현을 자주 보게 된다. 여기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국가’를 뜻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종묘와 사직을 역사·문화 유적지로만 여길 뿐 종묘와 사직이 전통시대, 특히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대명사였을 만큼 중요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종묘와 사직은 과연 무엇이기에, 그리고 전통사회에서 얼마나 큰 중요성을 지녔기에 국가를 상징하는 대명사로 사용됐을까.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하 규장각)이 ‘규장각 인문강좌’ 시리즈의 첫 권으로 최근 발간한 ‘종묘와 사직-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을 펼쳐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책은 종묘와 사직의 탄생과 변모 과정, 종묘·사직 제사의 절차와 형식을 밝히고, 종묘와 사직에 숨어 있는 역사적 배경을 풀어냈다. 책에 따르면 종묘와 사직은 국운과 그 운명을 함께 했다. 왕권이 강화되고 중흥되던 시기인 영·정조대에는 종묘와 사직 제도 역시 강화된 반면, 황제국을 표방했지만 국운이 쇠락해가던 대한제국기와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종묘와 사직의 위상도 기울어갔다.

국왕과 왕비는 죽은 후 그 신주가 종묘에 모셔진다. 하지만 영원히 종묘에 모셔진 건 아니었다. 국왕의 공덕을 평가한 뒤 공덕이 크면 옮기지 않는 신주인 불천지주(不遷之主)가 되기도 했지만 정치적 변고에 의해 이들의 신주가 종묘에서 내쳐지기도 하고, 상당한 시간 동안 숱한 논쟁을 거친 후에야 복위되어 종묘에 다시 돌아오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정종은 종묘 정전에 부묘되긴 했지만 국왕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졌던 묘호가 없었다. 연산군, 광해군처럼 반정에 의해 쫓겨난 왕도 아니었고, 단종처럼 쫓겨났다가 훗날 추승된 왕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가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기까지는 26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정종은 왜 이런 수모를 겪었을까. 이는 정종이 동생인 태종을 ‘세자’로 책봉했기 때문이다. 종묘와 사직은 전쟁터를 누비기도 했다. 1592년 4월14일 임진왜란이 발발해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면서 불과 10여일 만에 수도 한성은 함락 위기를 맞았다. 이에 조선 정부는 4월30일 서울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르게 됐고, 이때부터 종묘 신주와 사직 위판의 피란 생활이 시작됐다.

책을 공동 집필한 규장각의 강문식·이현진 박사는 “조선의 종묘와 사직은 동아시아의 보편적 문화와 더불어 조선만의 독특한 유교 문화, 왕실 문화, 농경 문화가 집약돼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며 “바로 이 점에서 조선의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관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김도연기자)   

서울신문(11. 08. 20) 왕과 토론하던 그들… 조선 경연의 모든 것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임금은 어떻게 유교의 가르침을 몸에 익히고, 이를 정사에 반영할 수 있었을까. 원리주의적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어떻게 임금을 유교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었을까.

대학자 기대승·율곡 이이 기록 생생
‘경연, 왕의 공부’(김태완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는 경연이 무엇인지, 그 역할과 내용을 당시 기록에 근거해 풀어놓았다. 유래와 역사와 함께 경연에서 쓰인 교재, 경연관의 선발 방법, 경연이 이루어지는 절차와 목표 등을 당시 자료들과 함께 상세하게 설명했다.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유교의 국가 조선에서 왕들의 생각을 어떻게 가다듬게 하고 벼리게 했는지를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경연에 참여, 왕과 토론을 벌이는 경연관 역할을 했던 조선시대 대학자 고봉 기대승과 율곡 이이의 기록도 한 장으로 엮어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기대승의 ‘논사록’(思錄)과 율곡의 ‘경연일기’ 일부를 번역하고 설명해 놓았다. 기대승이 명종 때 홍문관 수찬으로, 선조 때 승지로 왕의 아침 경연인 조강(朝講)에 참여한 27일 31회의 기록을 후학들이 모은 것이 논사록. 이이의 경연일기는 이이가 경연에 참여해 보고 듣고 겪은 내용과 건의한 내용, 당시 사회상들을 정리한 것이다.

조선의 임금은 경연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함께 유교 경전과 중국 및 우리나라의 역사를 공부했다. 이 자리는 단순한 경서 공부를 넘어서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문제들을 유교적 덕목과 가르침에 비추어 토론하는 자리가 됐다. 임금과 신하가 경서의 내용은 물론 실제 사건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가치를 논하면서 보다 나은 정책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 때문에 경연은 왕권의 남용을 규제하고 보다 나은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아이디어를 얻는 자리이기도 했다. 당시 경연은 아침의 조강과 정오의 주강(晝講), 오후 석강(夕講)의 삼시강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특강, 보강 형태의 소대(召對)로 구성됐다.

왕의 공부·정책모색 과정 알 수 있어
왕과 신하는 경연의 자리에서 논어, 맹자, 예기, 중용 등 경서는 물론 다양한 역사서를 인용하고 검토하면서 현실 문제의 척도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경연은 정책의 일관성과 함께 유교적 가치가 정치와 행정에 미치는 직접적인 자리가 되기도 했다.

논사록에서 기대승은 “언로가 막히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고 명종에게 진언했고, 을사사화때 화를 입은 이언적 등에 대한 신원문제를 비롯한 사화에 대한 재평가 문제들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 방납 등 당시 공물 납부 문제점 등 행정 폐단을 거론했고, 송나라 효종과 신종 등 격변기 중국의 군주들을 논하면서 왕을 경계시키기도 했다.(이석우 편집위원) 

11. 0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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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TAS 2011-08-28 22:57   좋아요 0 | URL
너머북스에서 작년에 출간한 <고종 44년의 비원>이라는 책에서 왕을 교육하는 '경연'과 '경학'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되었는데 고종만 다루고 있음에도 재미있었습니다. 이건 조선시대대부분을 아우르고 있어 더 흥미진진하겠네요!

로쟈 2011-08-30 08:29   좋아요 0 | URL
네 '경연에 관한 모든 것' 정도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