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무기력증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관심도서에 대한 리뷰기사가 뜨지 않는 것이다. 주목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책들이 어떤 이유에서건(책이 늦게 배부돼 언론리뷰가 다음주로 미뤄지는 경우도 많다) 관심밖으로 밀려났다는 점이 유감이고, 덧붙여, 할일들을 제쳐놓고 이렇게 뭐라도 적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도 또다른 유감이다. 제 살 깎아먹기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가장 먼저 꼽을 만한 책은 제러미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나남, 2011)이다. 공리주의의 원조 철학자이자 법학자의 주저 가운데 하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에서도 샌델이 벤담의 공리주의를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인용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개인적으론 벤담과 사회진화론자 허버트 스펜서의 책이 번역되지 않는 이유가 늘 궁금했는데, 이번에 책이 번역됨으로써 갈증의 일부는 해소됐다(얼마나 읽히는지는 별개이지만). 1789년에 초판이 나오고 1823년에 신판이 나온 책의 첫 장에서 벤담은 공리성의 원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쾌락이라는 두 주인에게서 지배받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무엇을 할까 결정하는 일은 물론이요 무엇을 행해야 할까 짚어내는 일은 오로지 이 두 주인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시작하여 벤담은 도덕의 과학과 입법의 원리를 이끌어낸다. 이게 '대단한' 과업으로 보인다면, 적어도 '신기한' 작업으로 여겨진다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은 일독해볼 만한 책이다.  

한편, 역자는 머리말에서 "지성사의 위대한 고전 하나를 한국 최초로 완역해냈다는 사실에 보람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고 소감을 적었는데, 최초의 '완역본'은 맞겠지만 최초의 번역본은 따로 있었다. <도덕 및 입법의 제원리 서설>란 제목으로 휘문출판사의 세계 대사상 전집 가운데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70년대에 나온 책이다). 오래전에 어디선가 책을 보고 이런 책도 번역돼 있구나라고 무심하게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면 <자유론>, <자서전> 등과 합본이었기 때문에 완역이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후에 벤담의 책으론 <파놉티콘>(책세상, 2007)이 출간된 게 전부이다. 그리고 공리주의에 대해서라면 밀의 <공리주의>(책세상, 2007)가 '고전'으로선 유일한 번역이 아닌가 싶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리주의 장을 읽은 다음에 참조할 수 있는 책이 이렇듯 몇권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참고로 대학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일역본은 1928년에 나왔다. 완역본인지 최초 번역본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와는 상당한 격차다(<입법의 원리>로만 한정하면 명치기인 187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두번째 책은 마르틴 브로샤트의 <히틀러 국가>(문학과지성사, 2011)다. 중요한 나치즘 연구서를 지속적으로 번역하고 있는 역자 김학이 교수에 따르면 "1969년에 간행된 이 책은 1945년 이후 '독일'에서  생산된 가장 위대한 나치즘 연구서"이다. 그래서 이 책을 모르면 나치즘의 '연구사' 자체를 모르게 된다고. 두 가지 사례로 드는 것이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교양인, 2005)과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교양인, 2008)이다. 팩스턴의 책은 "브로샤트에 의거하면서도 브로샤트를 넘어서려다 실패한 시도"이며, 오버리의 책은 "브로샤트가 이 책에서 개진한 것을 반복한 것일 뿐"이라는 게 역자의 평가다. 요컨대 나치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소홀히 할 수 없는 책이다.   

 

세번째 책은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의 <아렌트 읽기>(산책자, 2011)이다. 이미 마이리스트로 올려놓은 책인데, 방대한 분량의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2007)의 저자로 아렌트의 삶과 사상에 정통한 영-브루엘이 아렌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안내한다. 역자는 <과거와 미래 사이>(푸른숲, 2005)를 번역한 바 있는 서유경 교수다. 새롭게 아렌트를 읽어보려는 독자들에겐 가장 요긴한 길잡이가 아닌가 한다.   

 

네번째 책은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의 국제정치경제학 교수로 있는 대니 로드릭의 <자본주의 새판짜기>(21세기북스, 2011). '세계화 역설과 민주적 대안'이 부제다('세계화의 역설'이 원제이며, '얕은 세계화'가 저자의 핵심 주장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책소개를 보고 흥미가 생겨 전작인 <더나은 세계화를 말하다>(북돋음, 2011)까지 같이 주문해서 받았다. 발전경제학이란 관점에서 장하준 교수와 비교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추천의 말에서 이병천 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올해는 경제학 책의 번역 사업에서 수확이 좋은 해가 될 듯하다. 그중에서도 대니 로드릭 교수의 책이 번역된 것은 무척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지난 3월 <더 나은 세계화를 말하다>가 번역된 데 이어, 이번에 다시 <자본주의 새판짜기>가 나왔다. 짧은 기간에 그의 책이 연이어 두 권이나 번역출간되었으니, 위기 이후 경제학의 새로운 혁신에 목말라 있는 한국의 '경제 시민'들에게 좋은 선물이 배달된 셈이다. 로드릭의 책은 자유시장주의와 '묻지마' 개방주의가 득세해온 보수적 공론의 장과 한국의 경제학계에 독소를 씻어내는 신선한 해독제와 자극제가 될 것으로 믿는다. 

유료이긴 하지만 '경제 시민'들이라면 받아둘 만한 선물이다.    

그리고 다섯번째 책으로 9.11 10주기를 앞두고 미리 나온 마이클 웰치의 <9.11의 희생양>(갈무리, 2011)도 이주의 관심도서다. 부제는 '테러와의전쟁에서 증오범죄와 국가범죄'. 조나단 사이몬의 추천사가 책의 의의를 잘 요약하고 있다.  

마이클 웰치는 9.11 테러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대응이, 그 끔찍한 날이 있기 오래 전부터 미국의 민주주의를 불구로 만들어온, 공포의 동원과 희생양 만들기의 인정화된 패턴의 확장에 불과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세계화의 또다른 측면으로서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충돌의 양상을 관찰하고 분석한 아르준 아파두라이의 <소수에 대한 두려움>(에코리브르, 2011)도 어제 배송받은 책인데, 저자는 '지구화의 문화적 역동성'을 다룬 <고삐 풀린 현대성>(현실문화연구, 2004)의 저자이기도 하다... 

11. 06. 05. 

 

P.S. 독서인 혹은 독서광을 위한 아이템들도 매주 출간되는 형편인데, 이주의 책은 알베르토 망구엘의 <밤의 도서관>(세종서적, 2011)이다. <독서일기>(생각의나무, 2006)와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2000)의 독자라면 안 챙길 수 없는 책이다. 번역본 표지는 정겨운 느낌마저 주지만 원서의 표지는 좀 으스스하다. 이게 독서의 실상에는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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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6-05 14:54   좋아요 0 | URL
휘문출판사에서도 <도덕과 입법원리 서설>이 번역되어 있더군요.소개를 송건호씨가 썼어요.

로쟈 2011-06-05 15:05   좋아요 0 | URL
제가 잘못 봤습니다. 휘문출판사가 맞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6-05 15:40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06-05 15:52   좋아요 0 | URL
김학이 씨 같은 학자 덕에 두툼한 나치연구서들을 번역본으로 보게 되는군요.라울 힐베르크 저서도 번역하고...어떻게 이런 엄청난 분량의 저서들을 번역하는지 감탄만 나옵니다.

로쟈 2011-06-06 17:43   좋아요 0 | URL
학자다운 욕심과 사명감이겠지요...

헌내 2011-06-05 20:50   좋아요 0 | URL
옛날에 홍사중 씨의 '히틀러'라는 책이 있었는데...... 꽤 괜찮은 책이었는데 지금은 절판되고 없더군요...ㅠㅠ

로쟈 2011-06-06 17:42   좋아요 0 | URL
'옛날에'라고 하니까 웃음이 나오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