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경제분야의 관심도서는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책들이다. 마인하르트 미겔의 <성장의 광기>(뜨인돌, 2011)와 클라이브 해밀턴의 <성장숭배>(바오, 2011). 미겔의 책은 <성장의 종말>(에코리브르, 2006)도 이미 출간돼 있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성장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의 한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경향신문(11. 05. 21) 또 다른 ‘성장’의 조건   

경제현상을 바라보는 최근 시각은 ‘숫자’ 너머를 향한다. 숫자 너머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다. 물론 여전히 숫자 이상을 보지 않으려는 매우 강력한 관성이 존재한다. 숫자는 사람들과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등장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사람들의 움직임을 때로 숫자가 은폐해 현실과 유리된 경제현상을 전달하기도 한다. 



경제성장률은 이러한 은폐의 대표격이다. 경제성장률은 해당 기간에 국내총생산(GDP)이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보는 지표이다. 기존 GDP 측정 방식에 대한 반성이 있고 대안적인 측정방법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GDP는 여전히 성장의 척도이다. 대안적인 측정방법을 모색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성장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성장 자체를 거부할 의의, 그리고 의지와 능력이 있을까. <성장의 광기>(뜨인돌)의 저자 마인하르트 미겔과 <성장숭배>(바오) 저자 클라이브 해밀턴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일단 숫자상으로 인류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산업화가 경제성장을 이끌기 시작한 1800년경 이후 세계 GDP는 인구 1인당 약 11배로 늘었다. 그 사이 세계 인구가 9억명에서 69억명으로 7.7배로 커졌으니, 세계 GDP 총량은 200년 전과 비교해 거의 80배로 늘어난 셈이다. 숫자상으로 인류는 200년 전과 비교해 훨씬 더 행복해져 있어야 하고 삶도 풍요로워야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소득 수준에 도달하면 그 이후 인간의 행복도는 소득증가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스털린 역설’이 입증했듯 적어도 산업사회에 속한 국민들의 삶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원인이 무엇이든 성장옹호론자들은 문제해결에 성장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편다. 이들은 서구 사회의 삶에 대한 만족감과 효율성을 유지하는 데만 장기적으로 연 평균 1인당 최소 2% 성장이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지난 200년의 1인당 평균 성장률의 2배만큼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빈국과 부국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서구사회가 매년 1인당 2% 성장하는 동안 세계 전체로는 4% 성장해야 한다고 세계은행은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현재 61조달러인 세계 GDP는 21세기 후반 약 2000조달러가 된다.

앞으로 이런 정도의 성장이 가능한지는 차치하고, 그렇다면 현재 시점에서 그동안의 성장 전략으로 사람들의 복지가 향상됐을까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성장의 광기>에서 미겔은 “많은 가계의 구매력은 오래 전부터 정체 상태에 머물고 있으며 적지 않은 가계가 부채로 고통받고 있다. 성장과 물질적 복지의 증진은 적지 않은 시민들에게 아직도 빈말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사람들의 위와 옷장은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삶이 여전히 피폐하거나 혹은 더 피폐해졌다면 산업화 이후 성장을 기치로 내건 인류의 발전전략은 잘못된 것이라고 미겔은 역설한다. 나아가 성장옹호론자들이 제시하는 장밋빛 전망은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간단하게 인구 측면에서만 봐도 급격한 노령화로 세금 낼 사람이 줄고 연금 받을 사람이 느는데 과거 같은 역동적인 성장이 가능할까. 더 본질적으로는 자연과의 적대관계를 축으로 한 기존 성장은 성장비용을 숫자 속에다 숨겨 놓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성장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 세대가 계산하지 못하고 내버려둔 금액을 지불하고 있으며, 우리 후세들은 우리 대신에 또 지불하게 될 것이다. 지불하는 액수가 항상 동일하다면 그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액수는 몇년 전부터 점점 가파르게 증가하여 머지않아 지불할 수 없을 정도의 액수가 될 전망이다.”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 이전에 출간된 <성장숭배>도 같은 관점을 유지한다. 선진국 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에서 소비자본주의로 변이하면서 폭주기관차가 됐다고 진단한다. 현대 사회를 ‘마케팅 사회(marketing society)’로 규정하는 저자는 진보주의자들도 이른바 전통적인 ‘빈곤모델’에 사로잡혀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장주의자의 관점에 빠져든다고 비판한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성장을 포기하자는 논리는 아니다. 요는 어떤 성장을 어떻게 이루느냐이다. 답은 나와 있다. 지구와 우리 문명이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성장 혹은 수축하며, 물신을 숭배하는 대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존중하는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방향이다. 해답이 식상하다고? 모든 해답은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에 해답인 것이다. 성장을 사회설계나 정책의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오랜 선입관을 깰 수 있다면 인간은 또 다른 ‘성장’을 가능케 할 수 있다.(안치용| 지속가능사회를위한경제연구소장) 

11.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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