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가끔 '로자의 번역서 읽기'라고 오타로 나가는데 이번주도 그렇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1850)에 대한 간단한 독후감을 적었다. 개인적으론 멜빌의 <모비딕>(1851)과 함께 이번 학기 교양강좌에서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두 작품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게 특기할 만하다.  

  

한겨레(11. 05. 14) 누가 주홍글자를 음란하다 했나

“미국인의 상상력이 빚어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소설”(D. H. 로런스)이라고 하면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다. 과거 그의 단편 <큰 바위 얼굴>이 국어교과서에도 실렸었기에 마크 트웨인만큼 친숙한 작가이지만 <주홍글자>를 ‘청소년 권장도서’라고 부르긴 어려울 것이다. 일단 주홍글자 ‘A’가 ‘Adultery’(간통)의 첫 글자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테니까. 실제로 미국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이 작품을 필독서로 지정할 것이냐를 놓고 적잖은 분란이 있어왔다고 한다. 도색적이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일부 학부모들이 반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라면 몰라도 <주홍글자>에서 도색성과 음란성을 색출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17세기 미국 청교도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간통을 범한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에게 치욕의 징표로 주홍글자를 달아준 사람들조차 나중에는 ‘A’가 무슨 뜻인지 헷갈려한다. 헤스터가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걸 보고 그것이 ‘Able’(능력)을 뜻하는 걸로 해석하기도 하고, 밤하늘에 나타난 주홍글자를 보고선 ‘Angel’(천사)을 떠올리기도 한다. ‘A’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궁극적으로는 모호하며 불확정적이다.

이러한 모호성은 신대륙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한 사람들이 꿈꾼 유토피아의 역설에도 새겨져 있다. 그들은 인간의 미덕과 행복에 가득 찬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감옥과 묘지라는 걸 알았다. 삶을 가두고 매장하는 일이 지상천국의 전제조건인 셈이다. 그래서 간통을 소재로 한 작품이지만, <주홍글자>의 이야기는 ‘감옥 문’에서 시작한다. ‘간통소설’이 아니라 ‘감옥소설’이라고 불러야 할까.

공동체의 질서를 문란하게 만든 혐의로 갇혔다가 젖먹이 아이를 안고 가슴에는 주홍글자를 달고서 감옥에서 나오는 헤스터는 처음부터 타고난 위엄과 강인함을 가진 여성으로 소개된다. “이 키가 큰 젊은 여자는 몸매가 이를 데 없이 우아했다. 검고 풍성한 머리채는 너무나 윤기가 흘러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다 부실 정도였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그녀는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는 늙은 학자와 결혼하고 남편보다 먼저 신대륙으로 건너온다. 그러고는 젊은 목사 딤스데일과의 순간적인 사랑으로 딸을 낳는다. 딸아이는 그녀에게 신의 축복이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주홍글자’였다. 헤스터는 혼자서 딸을 키우며 오랜 소외와 인내의 삶을 살아간다. 과연 다른 삶을 살 기회가 그녀에겐 주어질 수 없는 것일까.

호손은 이 작품의 가장 아름다운 장에서 헤스터와 딤스데일을 숲에서 7년 만에 재회하도록 한다. 똑같이 죄를 범했지만 처벌받지 않은 탓에 오히려 더 큰 고통에 신음하고 있던 딤스데일을 헤스터는 위로하며 그는 잠시 기쁨을 되찾는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내게 기쁨의 씨앗은 벌써 시들어 버린 줄 알았는데! 오, 헤스터, 당신은 내 더없이 훌륭한 천사요!”

햇살이 흘러넘치는 대자연 속에서 두 사람이 다시금 맛본 삶의 기쁨은, 하지만 마을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함께 새로운 삶을 꾸리자는 헤스터의 제안을 받고서도 딤스데일은 결국 죄의식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호손은 냉정하게도 두 사람의 행복은 세상이 성숙하여 좀더 밝은 시대가 올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리라고 본 듯싶다. 비록 실현되진 않았지만 “사회조직을 모두 깨부수어 새로이 세워야 한다”는 게 헤스터의 ‘새로운 생각’이자 신념이었다. <주홍글자>는 음란하다기보다는 매우 도전적인 작품이다.  

11. 05. 13.  

P.S. 번역은 주로 민음사판으로 읽었지만 을유문화사판과 펭귄클래식판도 참고했다, 서숙 교수의 영미소설 특강 <주홍글자>(이화여대출판부, 2005)도 유익한 참고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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