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 가로로 꽂아둔 책 가운데 하나를 빼서 책상에 올려놓았다. 엘렌 러펠 셸의 <완벽한 가격>(랜덤하우스, 2010). 우석훈 박사는 추천사에서 "이 책을 통해 일상의 디테일에 자본주의 지역경제의 큰 힘이 숨어있다는 교훈을 얻고, 부디 하루하루 지갑을 열면서 내 돈은 어디로 가고 이 물건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딱 한 번씩만이라도 상황을 살펴보시기를 부탁드린다."고 적었다. 그런 권고 때문은 아니고 필요 때문에 읽어야 하는데, 책을 읽기 전에 리뷰기사를 먼저 챙겨놓는다. 저자의 다른 책으로 <배고픈 유전자>(바다출판사, 2003)도 눈길을 끈다. 

한겨레(10. 07. 10) 할인점 싼 가격에 숨은 ‘폭탄 돌리기’

엘렌 러펠 셸 보스턴대학교 과학저널리즘학 교수의 <완벽한 가격>을 읽노라면, 한국 사회는 1세기 전, 그러니까 20세기 초부터 줄기차게 진행돼온 미국 사회의 또 하나의 부정적인 측면을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모방하기 위해 왜 이토록 기를 쓰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원제 ‘CHEAP: the high cost of discount culture’(싼 가격: 할인문화가 부른 고비용)가 잘 드러내고 있듯, 이 책이 다루는 얘기는 주로 대형 할인점을 중심으로 전개된 미국 유통자본 저가정책이 초래한 고비용 사회의 심각한 문제들이다. 미국을 지속 불가능한 사회로 몰아갔고 그 부정적 파장을 전세계로 퍼뜨렸다는 미국 소매유통산업의 저가정책이 어떤 배경 속에서 시작되고 진행됐으며 어떻게 귀결됐는지 역사,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마케팅과 문화이론 등을 구사하며 파헤친다.

중대형 할인점들이 지역·동네 차원까지 파고들면서 소상인이나 영세점포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 한편으로 대규모 유통자본의 무차별 침투에 저항하는 목소리들이 우리 주변에서도 터져나오고 있다. '저가의 노예’가 된 미국 사회 위험의 본질은 그레셤의 법칙,‘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에 응축돼 있다. 고품질 우유 1쿼트(0.946리터)가 도매가로 1달러에 판매되고, 물을 섞은 우유 1쿼트는 60센트로 팔린다고 가정한다. 일반적 최종소비자는 물 섞인 우유는 80센트 정도까지는 기꺼이 치를 것이고, 100% 우유는 1달러 20센트 정도까지는 주고 살 것이다. 우유의 품질을 서로 알고 하는 거래여서 판매자나 구매자 모두 이익을 보는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고객이 우유 품질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라면, 말하자면 어느 것이 순도 100%고 어느 것이 물 섞인 우유인지 알 수 없는 상태라면 두 우유 모두 같은 가격(예컨대 1쿼트에 90센트)에 팔릴 것이다. 이런 시스템 아래서는 순도 100% 우유를 파는 정직한 상인은 파산하고 물 탄 우유를 판매하는 부정직한 상인은 떼돈을 벌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모든 상인이 우유에 물을 타서 재미를 보려 할 것이고, 소비자들은 실은 속고 있는데도 싼값에 우유를 샀다고 착각할 것이다. 

“미국 소비자들은 앞으로 몇 년 동안 다른 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아마 물이 섞인 우유처럼 질이 떨어지는 제품에 익숙해질 것이다. … 우리는 우수한 제품을 구매할 때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제품들을 구매하지만 정말로 싸게 제품을 구매하는 것은 아니다. 나쁜 제품이 좋은 제품을 몰아낼 때, 우수한 제품을 위한 시장은 줄어들 것이고 우수한 제품들은 더 비싸질 것이다.”

실제로 소비자들은 할인점 저가상품들에 대한 정직한 정보를 파악할 길이 없다. 세계화로 그 정보는 더욱 오리무중이 되었다. 할인점들이 모든 제품의 값을 낮추는 것도 아니다. 대폭 가격을 낮추고 눈에 잘 띄게 진열해 놓는 것은 부피가 크고 원래부터 가격이 싼 품목들이다. 아웃렛에서 판매되는 저가품들은 고품질 제품을 할인해서 내놓는 게 아니라 미리 저가품용으로 계획해서 내놓는 것이 대부분이다. ‘코치 아웃렛’에서 판매되는 상품들의 약 80%는 애초에 아웃렛용으로 제작된 저가품들이라고 한다. 이때 판매자들이 늘 동원하는 게 준거가격(정가로 표시된 가격) 속임수. 예컨대 100원짜리 물건에 500원 정가를 매겨 놓고 50% 세일한다며 250원에 판매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상술의 진정성을 의심하면서도 당장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몇 푼 싼 할인품을 사기 위해 몇십분간 자동차로 달려가는 어리석은 짓을 한다. 부자들은 가격에 신경쓰지 않고 비싼 명품을 선호하지만, 서민들은 명품 살 돈을 마련하려고 저가품 구입에 더욱 집착한다. 하지만 ‘부피가 크고 싼 품목’들에서 아껴봤자, 오르는 사교육비와 의료비, 전자제품값, 집값 인상분을 감당할 수 없다. 소비자는 양극화하고 상품도 양극화한다. 중간급의 다양한 제품, 장인의 솜씨가 밴 질 좋은 물품들은 사라지고 중산층도 사라진다.

 

경쟁우위를 통한 판매 확장을 위해 오로지 싼 가격에 매달리는 대형 할인점들이 나라와 서민 경제에 보탬이 될까? 1992~2000년 월마트 효과를 조직적으로 분석한 애린드라짓 두브 등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노동과 고용연구소’ 연구원들에 따르면, 월마트가 개장되면 해당 지역의 전체 임금과 복리후생비가 최대 1%까지 줄고, 식료품점 노동자들 소득은 약 1.5% 줄었다. 미국 전체로는 월마트 때문에 소매점 노동자들 총소득이 45억달러나 줄었다. 소득이 준 서민은 더 싼 값에라도 노동력을 팔아야 하고 지역경제는 더욱 졸아든다. 그렇게 해서 올린 월마트의 이익을 가져가는 것은 주로 경영진과 주주들이다. 서민들은 불황일수록 더 할인점을 찾는다. “할인산업이 가난한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할인산업을 이롭게 한다.”

싼 것을 찾아 어디든 가는 유통자본의 해외 진출은 미국내 수백만개의 일자리를 날렸다. 미국인들의 저가 선호가 부른 악영향은 전세계로 파급됐다. 값싼 미국 식품은 아이티 경제를 붕괴시켰다. 1995년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은 아이티에 쌀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35%에서 3%로 내리도록 강요했다. 그 결과 아이티는 쌀 수입이 150%나 증가했고 원래 쌀 수출국이던 아이티 농민들은 대부분 일자리를 잃고 도시로 흘러들어가 슬럼을 형성했다. 아이티 수입쌀의 4분의 3은 막대한 정부보조금을 받는 미국쌀이다. 멕시코 옥수수와 의류, 타이의 새우양식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하지만 미국 할인점을 떠받치고 있는 최대 기둥은 중국 민중들에 대한 광범한 노동착취다. 저가의 노예가 된 미국인이 노동착취와 환경파괴를 대가로 미국에 저가품을 수출하는 빈국을 인권과 근로윤리 등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인지부조화에 따른 자가당착이다. “불안정한 저임금 근로자들을 착취해 사업계획을 세우는 것,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자원을 고갈시키고 환경을 파괴하는 것, 생산업체들이 파산하지 않으려면 속임수를 쓸 수밖에 없을 만큼 과도하게 비용 절감을 요구하는 것은 혁신이 아니다. 저렴한 가격을 찾아 미국 중산층들이 교외로 대거 이동하는 것은 번영의 길도 성장의 길도 아니다.” 미국 중산층의 몰락과 중국 민중의 착취, 중간급 소비재와 중산층의 몰락은 동전의 양면이다. 한국도 그 지속 불가능한 길을 가파르게 따라가고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11. 05. 08.  

P.S.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론 일단 '할인문화'의 대명사격인 월마트의 문제점을 다룬 찰스 피시먼의 <월마트 이펙트>(이상미디어, 2011)가 있다. 부수적으로 가격 일반에 대한 흥미로운 탐구서로 에두아르도 포터의 <모든 것의 가격>(김영사, 2011), 그리고 한편으론 '비싼 가격'에 목 매다는 또다른 문화에 대한 진단으로 로버트 프랭크의 <사치열병>(미지북스, 2011)에도 손길이 가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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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상 모든 것의 가격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5-09 17:59 
    이번주의 경제학 관심도서는 에두아르도 포터의 <모든 것의 가격>(김영사, 2011)이다. 제목을 보자 마자 곧바로 주문을 넣은 책이다(<완벽한 가격>이란 책과 같이 읽어보려는 계산에서).리뷰기사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연합뉴스(11. 05. 09) 선택을 통제하는 '가격'의 비밀"공짜 점심은 없다"는 경제학 보편의 원칙을 크게 실감하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모든 것의 가격'(김영사 펴냄. 원제 'The price of every
 
 
2011-05-08 17: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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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18: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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