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하버드 명강의>(김영사, 2011)와 함께 어제 주문한 책은 제프리 잉햄의 <돈의 본성>(삼천리, 2011)이다. 돈에 무관심하더라도 괴테의 <파우스트>나 고골의 <죽은 혼>을 읽기 위해서는 '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가령 <죽은 혼>에서 치치코프의 행동지침이 되는 아버지의 유훈은 "무엇보다 아끼고 한 푼 두 푼 모아야 해.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건 돈이야."이기 때문이다. 이마무라 히토시의 <화폐인문학>(자음과모음, 2010) 등과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경향신문(11. 04. 16) 돈은 ‘경제’가 아닌 ‘정치’다 

화폐에 대한 정통 경제이론의 모든 설명은 상품-교환이론이다. “화폐는 화폐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좀 더 쉽게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존 스튜어트 밀)나 “화폐는 교역의 바퀴가 아니라 바퀴를 좀 더 부드럽고 쉽게 굴러가게 해주는 윤활유일 뿐이다 ”(데이비드 흄)는 언급이 여기에 해당한다. 화폐는 ‘중립적인 베일’로서 베일 너머의 실체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돕는 조연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돈의 본성’은 교환을 매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게 저자 제프리 잉햄의 견해다. 잉햄이 경제학자가 아닌 사회학자라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화폐가 사회적으로 생산되며, 더불어 신용/채권-채무라는 사회적 관계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해석하면 화폐는 ‘중립적인’ 경제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 나아가 정치적 현상이라는 지적이다. 

화폐가 사회적으로 또한 정치적으로 구성된 약속이란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화폐는 계산화폐여야 한다. 발행자의 계산화폐로 가치부여가 끝나고, 즉 ‘화폐성’이 확립되고 이것이 다시 특정한 형태(금속, 종이, 전자신호 등)로 체현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화폐는 외환시장 같은 곳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시장에서 물물교환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특정한 대표 물건이 화폐(상품화폐)로 추대됐으며, 이후 화폐는 사회자처럼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막후에서 돕고 있다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대립한다. 다시 말하면 화폐보다 화폐성이 우선하는 것이다. 물물교환이 화폐를 매개로 한 교환으로 바뀌면서 경제 전반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특히 생각해 볼 거리는 시장의 정치화가 아닌가. 물건끼리 바꿀 때에 비해 달리 화폐가 개입하면서 특정한 이해관계가 더 반영된다. 모든 참여자들에게 공평한 시장은 없다는 측면에서 이미 시장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에 화폐의 정치적인 또는 사회적인 성격은 시장과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다.

환어음과 주화의 다툼에서 화폐의 이런 정치성이 극명히 드러난다. 상인끼리 사용하는 환어음은 가치측정 수단이기 때문에 계산화폐이다. 환어음은 군주나 영주의 권력을 상징하는 주화(외형상 상품화폐)와 대치했다. 상인과 왕족·귀족은 국정화폐라는 타협을 만들어낸다. 화폐권력을 분점키로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금본위제가 종언을 고한 이후 논리적으로도 더 이상 상품화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품화폐가 퇴장한 지 오래인데도, 돈이 ‘중립적인 베일’이란 신화는 유지되고 있다. <돈의 본성>은 중립성이란 도그마를 난타한다. 중립적이지 않다면 화폐는 결국 누군가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화폐는 스스로의 이익에 복무하는 수준에 이르렀을지도 모르겠다.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밝혀진 돈의 무한 자기복제와 통제불능의 탈인격화는, 과장하면 인간이 배제된 돈의 정치세력화를 떠올리게 된다. 베일을 벗은 화폐가 누군가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화폐가 더 이상 윤할유에 머물지 않고 바퀴의 자리까지 차지했다면, 이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일까.(안치용 | 지속가능사회를위한경제연구소 소장) 

11. 04. 16.  

P.S. '옮긴이의 말'에서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상품, 화폐, 자본이라는 세 가지 중심 범주에 대한 대안적인 이해방식을 담고 있는 책들을 3부작으로 번역중이라고 밝혔는데,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길, 2009)이 그 첫번째 책이었다면 <돈의 본성>은 두번째 책이다. 자본에 대한 대안적 이론을 담은 책으로는 닛잔과 비클러의 <권력으로서의 자본>이 2012년 중에 번역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권력자본론>(삼인, 2004)의 업그레이드 판이 아닌가 싶다. 좋은 가이드 덕분에 정치경제학 분야의 문제작들을 편하게 소개받을 수 있어서 부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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