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가 일본의 근대와 마찬가지로 이식된 제도의 근대이고 '번역된 근대'라는 사실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아직까지 학계의 통설은 아닌 듯싶다. 안국선의 신소설 <금수회의록>이 일본 작가의 정치소설을 번안한 작품이란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고 하기에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창작이 아니라 번안작이라고 하여 국가적 위신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다만 문학사와 번역문학사 사이에서 번안문학사의 자리를 새롭게 마련해야 할 필요성은 제기된다. 아직도 할일은 많아 보인다...

  

한국일보(11. 02. 28) 개화기 문학은 日메이지 문학 본뜬 것?

근대 초입 개화기 문학의 대표적 작품들이 일본 메이지(明治)시대 문학의 번안 작품이라는 사실이 근래 수년간 소장 연구자들에 의해 속속 밝혀지면서 개화기 문학 전반에 대한 인식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식민사관 극복과 민족주의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근대 문화를 자생적 흐름에서 찾으려 했던 그간의 연구와 달리 소장 연구자들은 "인정할 것은 인정한 바탕에서 근대 자체를 반성해 보자"며 각종 작품의 서지사항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있다.

서재길 서울대 규장각 HK연구교수는 최근 신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안국선의 <금수회의록>(1908)이 일본의 사토 구라타로가 1904년에 출간한 정치소설 <금수회의인류공격>의 번안 소설이라는 근거를 제시했다. <금수회의인류공격>은 까마귀 개구리 벌 게 박쥐 닭 등 44가지 동물들의 연설이 이어지는 구조인데 <금수회의록>에 나오는 8가지 동물이 모두 등장한다. 특히 작품 서언에 해당하는 부분은 번역이라 할 만큼 표현 자체가 거의 같다. 서 교수는 "원본 소설의 '서언'을 비롯한 본문의 50% 가량이 <금수회의록>과 일치하고 <금수회의인류공격>의 삽화와 <금수회의록> 표지 그림이 유사하다"며 "<금수회의록>이 창작품이란 그간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었다"고 말했다.

 

앞서 최초의 창작 희곡으로 알려진 조중환의 <병자삼인>(1912)도 일본의 신파극 <우승열패>를 번안한 작품임을 김재석 경북대 교수가 2005년에 밝혀냈고, 최초의 단편집으로 평가받던 안국선의 <공진회>(1915)에 실린 '인력거꾼'도 재일동포 연구자에 의해 번안물임이 확인됐다. 근대 문물이 조선에 급속히 밀려오던 1890년대에서 1910년대를 이르는 개화기 문학은 신소설 신체시 신파극 등이 등장하며 고전문학에서 벗어나 근대문학으로 이행하던 단계였다. 신소설의 대표작인 이인직의 '혈의 누'(1906)도 번안 작품이란 얘기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고,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역시 일본 신체시를 모방한 작품이란 지적이 적지 않았다. 정선태 국민대 교수는 "작가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개화기 문학이 일본 메이지시대 문학의 문법을 차용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일본 문학의 영향을 거쳐 1920년대에 이르러 김동인 염상섭 등에 의해 본격적인 한국 문학만의 문법을 갖게 됐다는 평가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일본 메이지 문학 상당수도 서양의 근대 작품을 모방하거나 번안했다는 사실이 근래 밝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개화기 대표적 번안 소설인 조중환의 <장한몽>(이수일과 심순애가 주인공인 소설)의 원작 소설로 잘 알려져 있는 오자키 코요의 <금색야차>가 영국 여류 작가인 버서 클레이의 <여자보다 약한(Weaker than a woman)>을 모방한 것임이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2000년에야 밝혀졌다. 서 교수는 "<금수회의인류공격>을 쓴 사토 구라타로가 당시 셰익스피어 작품을 번역했을 정도 서양 작품을 잘 알고 있어서 그 역시도 동물이 등장하는 서양 작품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연구를 해 봐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1970~80년대 때만 해도 민족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 개화기 문학에서 식민사관 극복 가능성을 찾고 재래적 전통을 강조하는 연구가 봇물을 이뤘지만 최근의 연구들은 객관적 사실을 냉정히 인식하자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근대 자체를 일국적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틀에서 사유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서 교수는 "민족국가의 폭력성이나 근대 자체에 대한 반성이 본격화하면서 젊은 세대 연구자들이 '이식문학론'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며 "번역이나 번안했다고 콤플렉스를 가질 게 아니라 번역이 근대의 또 다른 특징이었음을 인식하고 번역이 만들어 내는 실천적 측면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송용창기자) 

11. 03. 06. 

 

P.S. '번역된 근대'와 관련하여 기본서는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의 대담집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 2000)이다. 일본의 번역문학과 관련한 더 자세한 책이 소개됐으면 싶지만 아직은 희망사항이다. 정선태 교수의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소명출판, 2006)에도 번역과 근대에 관한 글들이 여럿 포함돼 있다. 김욱동 교수의 <번역과 한국의 근대>(소명출판, 2010)는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이제 첫번째 코너에 접어든 느낌이고, 앞으로 더 많은 연구서들이 나옴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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