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전문잡지 '공간'(520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김동일의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갈무리, 2010)을 읽은 인상을 적었다. 모스크바에서 쓴 리뷰 중의 하나로 기억에 남는다. 책은 주로 딱딱한 논문들을 모은 것이어서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이란 제목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걸 서두로 삼았다.
공간(11년 3월호)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 ‘사회 속의 예술(art in society)’을 다루는 책의 제목으로는 특이하다. 김동일의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이 주는 첫인상이다. 저자는 “어쩌면, 예술과 예술가를 유혹하는 것은 이제 사회일지도 모른다. 사회는 예술가들이 창조해낸 예술보다 더 아름답고, 더 정교하고 더 마술적이다.”이라고 서두에서 미끼를 던지는데, 정작 그렇다면 ‘더 아름답고, 더 정교하고 더 마술적’인 사회가 예술보다도 더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맞을 것이다. 게다가 예술과 사회란 이분법을 지양하자는 것이 저자의 또 다른 제안이고 보면 제목만으론 초점이 모호하다. ‘부르디외 사회이론으로 문화읽기’란 부제도 마찬가지다. 부르디외의 사회이론이 저자가 동원하는 핵심적인 이론이긴 하지만 책의 구성은 광범위한 ‘문화읽기’보다는 ‘미술읽기’에 한정된다. 미술과 미술사, 미술관, 미술시장 등을 폭넓게 다룬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책은 예술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의 결과이므로 자연스레 ‘예술사회학’으로 분류된다. 예술 속에 사회가 어떻게 반영돼 있는가를 묻기도 하고, 예술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생산되고 소통되는가를 연구하는 분야다. 저자는 이 가운데 특별히 ‘스타일의 사회학’을 주창하며 강조한다. 왜 그런가. 스타일이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 토대이자 그 본질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스타일이 곧 예술이라면, 예술사회학은 달리 스타일의 사회학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스타일을 ‘사회적 실천’과 그 ‘맥락’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보며, 이를 설명하는 데 부르디외의 사회이론이 최적이라고 판단한다. 부르디외의 ‘장’이나 ‘아비튀스’ 개념을 적용하면 스타일이 갖는 실천의 논리와 맥락을 정교화하게 개념화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고 제안이다. 그래서 부르디외의 용어들을 ‘스타일장’과 ‘스타일 아비튀스’이란 말로 새롭게 개념화한다. ‘성향의 체계’를 뜻하는 아비튀스는 스타일 행위의 보편성과 유사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사회적 공간으로서 ‘스타일장’의 지형과 역학은 개별 스타일행위자들에게 가능한 실천의 범위를 제공한다.
이렇게 정립된 개념들을 예술에 적용하면, 스타일 실천자로서 예술가를 ‘주관적 천재’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적 공간의 ‘합리적 행위자’로 앉힐 수 있게 된다. 가령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백남준의 미학적 성취 역시 그것이 가능하게 한 객관적인 사회적 조건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발한 걸작을 생산한 광기 어린 전채가 아니라, 정확하게 예술장이라는 사회적 공간 속에서 미학적 실천의 방향성을 설정해 나간 사회적 행위자”라는 것이 백남준에 대한 그의 평가다.
이러한 이론적 관점을 저자는 미술사, 구체적으론 전후 한국화단의 스타일장에도 적용한다. 그에 따르면 “전후 한국화단에서 벌어진 추상과 구상의 투쟁은 곧 사회공간의 정치적 영향을 스타일장 내의 특수한 내기물을 놓고 벌어진 인정투쟁으로 변환하는 과정인 동시에 결과”였다. 기존의 비평이나 미술사 기술에서는 스타일 투쟁을 소수 선구자의 미학적 성과 정도로 바라보는 데 반해서, 저자는 스타일장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 이 투쟁이 포괄적 스타일 네트워크 사이의 투쟁이라는 걸 보여준다. 현대미술가협회 같은 단체가 사회 변동에 대응하여 스타일장에서 변환의 주체 역할을 수행했으며, 일군의 비평가들이 추상스타일에 미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옹호했다. 전후 스타일 전쟁이 구상에 대한 추상의 승리로 귀결됐다면, 그것은 “추상 네트워크 내에 수렵되는 자원의 범위와 강도, 효율성이 구상스타일의 그것을 압도했음을 의미”한다.
스타일과 함께 저자의 예술사회학을 지탱하는 키워드는 ‘일상’이다. 그는 미술을 일상적 실천이자 일상적 놀이로 본다. 이 놀이의 공간은 미술관, 화랑, 작업실, 강의실 등이며, 작가, 큐레이터, 미대 교강사, 문화부 기자, 미술사가, 평론가, 미대재학생, 관객, 독자들이 그 놀이의 참여자들이다. 미술이 곧 일상적 실천이기에 일상과 미술의 구분은 환영이다. 그럼에도 이 환영과 일상/예술이라는 이분법이 유지되는 주된 근거로 저자는 미술관의 존재를 든다. 일상과 미술은 원래 한 몸이지만 미술관이 이 한 몸에 작위적인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육체와 두뇌(기획력)을 갖춘 ‘위험한 실천자’로서 미술관은 제도적 권위와 자본주의 논리의 작동을 대리하며 아주 특별한 어떤 것들만 예술로 규정한다. 다분히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때문에 일상과 미술 사이에 미술관이 쌓은 거북스런 경계를 낮추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미술관의 존재 자체를 되묻게 하는 ‘게릴라적인 미술관’이 그의 대안인데, “이건 물론, 미술사와 미술이론에 정통하면서도, 일상에 투철한 게릴라들이 잔뜩 힘이 들어간 딱딱한 미술관 제도에 틈입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의문이 없는 건 아니다. 일상에 투철하면서도 미술사와 미술이론에 정통한 ‘일상인’은 가능할까, 라는 것이다. ‘사회학을 유혹하는 예술’에 사회이론으로 대응하는 일도 마찬가지인데, ‘독자를 유혹하는 사회학’이려면 일상과 딱딱한 논문 스타일의 경계를 좀 더 낮추는 작업도 필요해 보인다.
11. 03.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