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3.1절에 '3월의 읽을 만한 책'을 꼽았던 듯싶은데, 며칠 앞당겨본다. 아직 꽃샘 추위를 남겨놓고 있지만 이미 봄은 문턱에 있기도 하고. 한달 넘게 끌던 원고들을 어제 넘긴 터라 잠시(아주 잠시!) 휴식도 취하는 김에 '이달의 읽을 만한 책' 구경에 나선다. 방송용어를 빌리자면 '밧데리 교체 타임'이라고 해야 할까. 언제나처럼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선정도서 목록에 두 권씩 보태놓는다.   

1. 문학   

정과리 교수가 고른 책은 지난해 우리 곁을 떠난 이윤기 선생의 유고 산문집/소설집이다. <위대한 침묵>(민음사, 2011)와 <유리 그림자>(민음사, 2011). 번역서를 보태자면 <천로역정>(섬앤섬, 2010)도 있다. 정 교수는 고인이 무엇보다도 '후각적인 존재'였다고 평하고 이렇게 적었다. 

이윤기의 고유한 문체는,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그이의 문장 한 줄만으로도 독자의 머리 속에 꽤 특별한 글 세상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였다. 게다가 후각은 또한 깊이 스며드는 감각이다. 그래서 거기서는 “정신과 감각의 혼융”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윤기의 글은 느낌이 곧 지성이고, 지성이 곧 느낌인 글이었다. 그래서 그이는 없어도 있었고, 조금 있어도 많이 있었다.

 

이윤기 소설집 얘기에서 신예 작가 최제훈이 떠올려지는 이유는 모르겠다. 데뷔작 <퀴르발 남작의 성>(문학과지성사, 2010)이 뛰어난 '번역소설'이란 평을 들었던 기억 때문인가. 새 소설집 <일곱 개의 고양이 눈>(자음과모음, 2011)도 그가 여간한 작가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고. 요즘 소설의 트렌드도 확인할 겸 독서목록에 올려놓아도 좋겠다.   

 

2. 역사 

김기덕 교수의 추천도서는 김인희의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푸른역사, 2010)이다. 요지는 이렇다고 한다. 간추린 요지에서도 저자의 발품이 느껴진다.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 후 669년 20만 명에 이르는 고구려 유민이 중국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그 중 10만 이상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인은 강회, 산남과 같은 중국 남방으로 이주해야 했다. 이 책은 그 중국 남방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이 현재 중국의 56개 민족 중 인구수가 5번째로 많은 먀오족을 형성한 중심세력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복식, 장식품, 축제, 혼례, 상례, 체질인류학 등 19가지의 증거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그대로 이 책의 목차를 구성하고 있다. 

 

한편 최근 설문조사에서 한국 성인의 35% 가량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역사책을 읽은 적이 없다고 한다.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전5권)>(웅진지식하우스, 2011) 시리즈로 기억을 돌이켜보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추천한 책은 줄리언 바지니의 <가짜 논리>(한겨레출판, 2011)다. 어떤 내용의 책인가는 아래의 사례가 잘 말해준다.   

매일 아침 해가 뜰 때마다 모이를 먹었던 칠면조는 “나는 늘 해가 뜰 때마다 모이를 먹는다”는 보편법칙을 수립한다. 그러나 어느 날 목이 비틀려 죽고 만다. 버트런드 러셀의 귀납적 오류에 관한 이야기다. 오랫동안 일정한 현상을 반복 경험하면, 그것이 일반화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류라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오류로부터 해방될 때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줄리언 바지니는 <빅 퀘스천>(필로소픽, 2011)의 해제를 쓰면서 알게 된 철학자인데, 의외로 국내에 책이 많이 소개돼 있었다. 영국에선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란 평판을 얻고 있다고(음, 알고 보니 나와 동갑내기다). 개인적으론 수다스럽지 않은 <빅 퀘스천>이나 <무신론이란 무엇인가>(동문선, 2007) 등에 더 끌리지만 <가짜 논리>에 구미가 당긴다면 <호모 사피엔스, 퀴즈를 풀다>웅진지식하우스, 2009)를 연이어 손에 들 수도 있겠다.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추천한 책은 박명준의 <사회적 영웅의 탄생>(이매진, 2011)이다. "독일에서 성공한 사회적 기업가 14인을 직접 인터뷰해서 그들의 성장과 활약상 및 비전을 소개"하는 책이다. 그러고 보니 사회적 기업에 관한 책이 최근 몇년간 꾸준히 나온 듯싶다. 정인철의 <빅 소사이어티>(이학사, 2011)과 무하마드 유누스의 <사회적 기업 만들기>(물푸레, 2011)이 최근에 같이 나온 책들이다.   

더듬어 올라가면, 기억엔 유병선의 <보노보 혁명>(부키, 2007)이란 책이 있었다. 그리고 데이비드 본스타인의 <달라지는 세계>(지식공작소, 2008)이 화제를 모았고, 전 세계 사회적 기업가들과의 만남을 다룬 <아름다운 거짓말>(북노마드, 2008)도 나왔었다. <사회적 영웅의 탄생>의 전사라 할 만하다. 어느 책이 가장 요긴한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테마 서평거리로 한번 고려해봄직하다.   

5. 경제/경영 

박원암 교수가 고른 책은 댄 애리얼리의 <경제심리학>(청림출판, 2011)이다. 저자는 <상식 밖의 경제학>(청림출판, 2008)으로 소개된 바 있는 듀크대 경제학과 교수. 경제학에서 '비합리적' 심리와 행동 패턴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관심사인 듯하다. <경제심리학>의 원제도 'The Upside of Irrationality'이다. 간단한 소개는 이렇다.   

저자는 2008년에 이미 베스트셀러가 된 <상식 밖의 경제학>을 출간하여 인간 행동이 매우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임을 강조한 바 있다. 이 책에서도 비합리성을 강조하지만 앞선 저서와는 달리 비합리성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려 한다. 인간의 비이성이 우리의 습관, 데이트 상대의 선택, 일터에서의 동기의식, 기부행위, 물건이나 아이디어에 대한 애착, 적응력, 복수욕 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흥미 있는 실험 결과를 통해 보여준다.

   

경제학에서 (비합리적) 감정을 변수로 다룬 책이 또 없는 건 아니다. 아예 이 분야를 '이모셔노믹스'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댄 힐의 <이모셔노믹스>(마젤란, 2011)란 책을 보건대 그렇다. 이건 원제 자체가 'Emotionomics'이다. 저자는 소비자 행동에서 감각(바디)의 문제를 주로 연구해온 마케팅전문가라고.   

6. 과학 

과학분야의 책은 최준곤의 <행복한 물리여행>(이다미디어, 2011)이다. 이런 '여행' 시리즈는 워낙에 많이 나왔었기에 어떤 특징이 있는 건지 궁금한데, 장경애 동아사이언스 실장에 따르면 "이 책이 기존의 과학 상식 책과 다른 점이 바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호기심이다. 학생들에게 현상을 설명하려고 글을 썼다기보다 개인적인 관심과 흥미를 덧붙여 ‘자신이 궁금한 것을 해결한 비밀노트’ 같은 느낌이다." 일간지에 연재한 '생활 속의 과학' 칼럼을 묶은 것이라고.  

<행복한 물리여행>은 청소년 과학도서로도 분류되는데, 서울과학교사모임에서 지은 <시크릿 스페이스>(어바웃어북, 2011)도 학생들이라면 챙겨둘 만하다. "지퍼, 전자레인지, 프린터, 바코드, 3D영화 등 늘 사용하는 물건과 그 물건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어려운 과학원리를 쉽게 풀어내고 있다." 거기에 보태자면 '이윤석의 웃기지 않는 과학책' <웃음의 과학>(사이언스북스, 2011)도 부담없이 읽을 만한 책이다. 개그맨이자 신문방송학 박사인 저자가 '웃음의 과학'을 총정리했다.  

 

한편 개인적으로 '웃음'하면 떠올리게 되는 책은 베르그송의 <웃음>인데, <웃음의 과학>의 참고문헌에 빠져 있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국내에 3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어느 사이엔가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돼버린 듯하다...  

 

7. 예술 

이주은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고연희의 <그림, 문학에 취하다>(아트북스, 2011)이다. 부제는 '문학작품으로 본 옛 그림 감상법'. 저자는 우리 옛그림에 관한 책들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몇 페이지만 둘러봐도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책 자체가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그림을 읽어보기로 '작정'한다면, 인상파부터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이택광의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아트북스, 2011)로 '산책'의 걸음을 떼고 존 리월드의 <인상주의의 역사>(까치글방, 2006)로 무게를 보탠 다음에 홍석기의 <인상주의>(생각의나무, 2010)으로 '학술'까지 카바하는 여정이 한 가지 코스이다.   

8. 교양 

철학자 탁석산의 교양서는 토마스 크로웰의 <역사를 수놓은 발명 250가지>(현암사, 2011)이다. '250'가지나 다루고 있으니 '527쪽'의 분량이 오히려 '겸손'해 보인다. 추천의 이유는 이렇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수많은 발명품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너무나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를 잡아 이제는 그것이 역사를 바꾼 획기적인 발명품이라는 것도 잊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보면 에어컨, 안전면도기, 파리채, 손목시계, 포스트잇 등등의 역사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꼭 이런 것을 알아야 하는가? 알아도 몰라도 그만인 것 아닌가. 네모난 종이 봉지를 마거릿 나이트가 발명했다는 것을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빵을 살 돈이 우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이 필요한 것은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굳이 인용한 것은 '알라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지식'이 추천자의 교양관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교양/지식을 편애한다(그렇게 치면 사실 '목숨 걸고' 읽어야 하는 책은 많지 않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모멘토, 2011)도 '알라도 그만 몰라도 그만'일까? 혹 아는 게 유익하다 싶다면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살림, 2011)에 대해서 좀더 읽어봐도 좋겠다.   

9. 실용 

손수호 논설위원이 고른 책은 박상진의 <우리 나무의 세계 1,2>(김영사, 2011)이다. 이미 지난달에 '2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놓은 책이다. 저자는 <궁궐의 우리나무>(눌와, 2001)의 저자. 추천자는 책의 의의를 이렇게 짚는다. 

이 책에는 목재조직학자, 수목학자로서 40년을 보낸 저자의 학문적 열정이 담겼다. 1000여 종이 넘는 우리나라 나무 가운데 일반인들이 접할 수 있는 242종의 나무에 대한 식물학적 정보에다 문화적 의미를 보탰다. 그래서 우리는 또 하나의 든든한 텍스트를 곁에 두면서 알뜰살뜰 나무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이달의 책'을 고를 때마다 '실용'이란 범주를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데, 소설가 김연수의 말대로 '모든 책은 실용서'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 역사, 철학... 과학... 이렇게 나가다가 '모든 책', 이런 게 말이 되는 건가? 그런 시비를 가리는 게 내 소관은 아닐 터이므로 나대로 '실용서'를 보태자면 폴 콜린스의 <토머스 페인 유골 분실 사건>(양철북, 2011)을 들겠다. '상식의 탄생과 수난사'가 부제. 며칠전 관련기사를 포스팅해놓기도 했지만 덕분에 페인의 <상식, 인권>(필맥, 2004)에 관심을 갖게 됐으니 내겐 '실용'이 있는 셈. 덧붙에 유골 훔치기에 관한 책으로 패트릭 기어리의 <거룩한 도둑질>(길, 2010)에도 관심을 갖게 했다. '중세 성유골 도둑 이야기'이다. 한때 도굴범에 관한 뉴스가 심심찮게 등장했고 그걸 소재로 한 영화도 만들어진 나라에서 재미있는 '유골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것은 의아한 일이다. 내가 모르는 책이 있는 건가..  

 

10. 세계철학사  

내 맘대로 고르는 책은 주제를 '세계철학사'로 잡았다. 물론 이번에 나온 이정우의 <세계철학사1>(길, 2011)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전체 3부작으로 기획된 '세계철학사' 시리즈의 1권이 나온 것인데, 부제가 '지중해세계의 철학'이다. 연이어 나올 2권은 '아시아세계의 철학', 3권은 '근현대 세계의 철학'이 될 것이라고 한다. 완간된다면 그 시도만으로도 기념비적인 저작이 되지 않을까 한다. 저자가 '여는 말'에 적고 있듯이 <세계철학사>란 타이틀 달고 나와 있는 기존의 책들, 가령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철학사>(자음과모음, 2008)이나 소비에트과학아카데미의 <세계철학사>는 '서구철학사'에다 중국과 인도 철학사 정도를 '얹은' 형태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세계'를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철학사' 기술 시도는 흥미를 끈다. '지중해철학'을 부제로 내건 만큼 클라우스 헬트의 <지중해 철학기행>(효형출판, 2007)과 같이 읽으면 더 '입체적인' 독서 여행이 될 듯싶다. 

11. 02. 26.  

P.S. '3월의 읽을 만한 고전'으론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고른다. 세계문학전집류 쪽에서는 아직 새 번역본이 나오지 않고 있어서 현재로선 김석희 번역의 <모비딕>(작가정신, 2010)이 가장 신뢰할 만한 듯싶다. 부피와 가격이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3월에는 '바다 구경'을 좀 할 수 있을 듯싶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한다. 바닷바람 좀 같이 쐬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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