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289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창비담론총서의 하나로 나온 <세계문학론>(2010)을 거리로 삼았는데, 내가 쓴 글도 포함돼 있어서 서평을 쓴다는 게 좀 어색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다른 글들을 읽고 세계문학론의 쟁점이 무엇인지 정리해보고 싶었다. 물론 이런 정리야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기획회의(11. 02. 05)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둘러싼 쟁점들

“거대담론과 구체적인 실천과제 논의를 아우르면서 비판적이고도 균형잡힌 담론을 개척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는 취지로 출간되고 있는 창비담론총서가 ‘이중과제론’과 ‘87년체제론’ ‘신자유주의 대안론’에 이어서 화두로 삼은 것은 ‘세계문학론’이다. 이는 세계문학전집 출간 열풍을 떠올리기 쉽지만, 세계문학론 혹은 ‘세계문학이라는 문제’는 세계의 고전들을 한데 모아놓자는 세계문학전집과는 출처가 다르고 지향이 또한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지구화시대의 민족과 문학’이란 글을 통해 문제의 지형과 윤곽을 잡아주고 있는 백낙청 교수에 따르면, 애초에 지구화가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확장을 개시한 16세기부터 시작됐다고 하면 국민문학들의 탄생 자체가 지구화시대의 결과 중 하나이다. 더불어 지구화의 진전은 자연스레 세계문학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더욱 강하게 유인한다. 그런 가운데 세계문학에 대한 구상과 기획이 두 사람의 독일인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바로 괴테와 맑스다.  

괴테는 1827년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이제 민족문학은 별로 의미가 없는 용어이다. 세계문학의 시대가 임박했고, 모든 이가 그것을 앞당기도록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강조점은 두 가지다. “이제는 세계문학의 시대”라는 선언적 메시지가 하나라면,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그것을 앞당겨야 한다”는 당위적 주장이 다른 하나다(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운동’이다). 거기에 더 얹어서 맑스는 <공산당선언>의 유명한 구절에서 “일국적 편향성과 편협성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며, 수많은 국민문학․지역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문학이 형성된다.”고 예언했다. 물론 다분히 선언적, 예언적 성격을 띤 발언들이어서 세계문학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하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계문학이란 무엇인지 명확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것을 구체화하는 일은 과제로 남겨진 듯한 인상이다. 아무려나 이 두 사람의 발상을 한데 묶어서 백낙청은 ‘괴테․맑스적 기획’이라고 부른다(‘민족문학과 세계문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실제적인 비평 활동을 고려하면 ‘괴테․맑스․백낙청적 기획’이라고 부르는 게 더 온당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든다). 그리고 ‘지구화시대 문학의 쟁점들’이란 부제를 살리자면, 지구화의 도전에 맞서 세계문학의 이념을 어떻게 되새겨볼 것인가, 이 ‘괴테․맑스적 기획’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가 <세계문학론>의 전체적인 관심사이다.   

책은 서장과 3부로 나누어진 11편의 글, 그리고 ‘세계문학의 이념은 살아 있다’는 제목의 대담으로 구성돼 있다. ‘지금 우리에게 세계문학은 무엇인가’를 제목으로 한 서장에서 엮은이의 한 사람인 김영희 교수는 “한편에서는 유럽중심의 기존 정전에 대한 비판과 세계문학 지형도의 새로운 구축을 향한 시도들이 진행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전지구적으로 팽창하는 세계적 상품으로서의 작품들이 이 지형도 자체를 허물고 있는 이같은 복합적인 국면이 ‘지금’의 세계문학이 처한 상황”이라고 정리해준다. 이 두 가지 경향의 배경은 물론 지구화 혹은 세계화이다. 그리고 세계문학론과 관련하여 ‘지금’의 문제적인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의 등장이다. “많은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힌다는 것이 세계문학의 일차적 요건 내지 필수요건인가, 지금 당장 세계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각 민족/국민문학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작품들의 경우는 또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물음들이 따라나오는 것”은 이러한 현상과 새롭게 마주하게 됐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그 물음들을 세계문학에 관한 두 가지 쟁점으로 읽어도 좋겠다 싶다.  

먼저, “많은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힌다는 것”과 세계문학의 관계. 그런 표현이 염두에 둘 만한 작가로 몇 사람의 이름을 떠올려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문제적인 작가는 단연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실상 ‘하루키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세계문학론의 향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때문에 2007년에 이루어진 대담 꼭지에서도 하루키 문학이 도마에 올랐는데, 세계적인 지명도와 국내외를 막론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도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는 전제하에 윤지관 교수는 “하루키도 그렇고 무라카미 류도 그렇고, 표피성이 강해서, 가령 괴테나 맑스적인 의미에서 세계문학, 세계화에 대항하는 몇 안되는 거점으로서의 세계문학, 그런 저항 가운데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과 사회체제를 움직이는 근본원리에 대한 해석, 이런 거에는 미달”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의 빌미가 된 작품은 2007년 당시 화제작이었던 <해변의 카프카>이다. 하지만 최근에 더 강하게 휘몰아친 <1Q84> 열풍도 하루키와 세계문학의 관계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바꿔놓을 것 같지는 않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둘러싼 쟁점들’이란 글에서 윤지관 교수가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장에 진입하고자 해도 일본의 경우를 모델로 삼아서 추종하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하루키처럼 ‘국제적으로 통하는 작가’가 차후에 한국에서도 배출될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국내문학의 평가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점이다. ‘세계문학의 지평에서 생각하는 한국문학의 보편성’이란 글에서 정홍수 문학평론가가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하고, 번역에 견딜 수 있는 작품을 써야 한다”는 작가 김영하의 주장에 유보적 태도를 비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세계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각 민족/국민문학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작품들”이 ‘세계문학’으로 새롭게 자리매김되고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할까. 하지만 이 또한 문제가 없지 않다. 대담에서 윤지관 교수가 지적한 대로 한국문학처럼 소수언어로 씌어진 문학은 “번역이 안되어 있으면 세계문학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번역이 “세계화가 초래할 수 있는 획일화된 문화, 획일화된 언어에 맞서는 필수적인 매개이자 힘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번역은 세계문학이 가져야 할 선택적 요건이 아니라 필수조건이지 않을까. 물론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둘러싼 쟁점들’에서 온당하게 지적되듯이 한국문학도 번역만 되면 세계문학을 ‘변혁’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번역하느냐는 고민은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새로운 구성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란 문제는 번역의 문제와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세계문학론은 자격 미달인 문학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문학 사이에 걸쳐 있는 듯싶다.  

11. 0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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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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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1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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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1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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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1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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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0 1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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