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와 푸코의 인간 본성 논쟁

기획회의(285호)에 실은 리뷰를 오타를 교정하여 옮겨놓는다.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시대의창, 2010)을 서평감으로 골랐는데, 두 사람의 견해를 대조하는 방향으로 쓰다 보니 막상 자세히 못 다룬 대목도 많다. 정의와 권력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차 등은 따로 정리해보고픈 생각이 든다.  

 

기획회의(10. 12. 05) 동일한 산을 정반대로 오르는 두 사람

노엄 촘스키와 미셸 푸코의 대담? 개요는 이렇다. 대담은 1971년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졌는데, “노엄 촘스키는 영어로, 푸코는 프랑스어로 말했고 이들의 대담은 네덜란드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그것은 네덜란드의 사상가 폰스 엘더르스가 사회를 맡고, 서로 다르거나 대립되는 사상을 지닌 20세기 철학자 두 명이 초대되어 토론을 벌이며 때로는 격돌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다.” 말하자면 ‘촘스키 VS 푸코’를 내건 프로그램에서 두 사람이 격돌한 것이다.

1971년이면 두 사람 모두 40대 초중반의 나이로, 문제적인 저작을 내놓긴 했지만 절정의 명성을 누리기 이전 시점이다. 하지만 세월은 세월인지라 책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지금 푸코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촘스키는 80을 넘긴 노구의 몸이 됐다. 그들이 39년 전에 나눈 대담 또한 역사의 먼지를 덮어쓰고 있지 않을까. 마치 ‘회고대담’을 읽는 듯한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오히려 대담은 ‘생방송’의 실감과 열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인간의 본성 문제에 대하여 그들은 어떤 대담을 나누었나. 촘스키와 푸코의 대담을 1장에서 ‘메인’으로 다루고 있지만 책에는 이후에 두 사람의 인터뷰와 강연 등이 추가로 실려 있다. 그중 1976년에 언어철학을 주제로 한 프랑스의 언어학자와의 인터뷰에서 촘스키는 푸코와의 1971년 대담을 나름대로 정리해주고 있어서 유익하다. 일단 “우리는 ‘인간의 본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합의를 보았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합의를 보지 못했어요.”라는 게 그의 총평이다. 대담 사회자의 표현대로라면 두 사람은 동일한 산을 정반대 방향으로 오르고 있었는데,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창조성 개념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랐다. 촘스키가 말하는 창조성은 인간과 앵무새를 구별해주는 범주로서의 ‘평범한 창조성’이었지만, 푸코는 뉴턴의 업적 같은 것을 생각했다. 누구나 다 그런 업적을 낼 수 있는 건 아니므로 푸코가 보기에 창조성은 인간의 내재적 특성보다는 사회적․지적 조합과 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푸코는 사회적․역사적 조건들과 무관한 생물학적 개념으로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반면에 촘스키는 최소한 언어학에서만큼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미심장한 개념을 구성하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촘스키는 언어능력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점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인간은 어떤 도식체계를 갖고 있어서 제한된 정보로부터 고도로 복잡하고 조직된 지식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자 확고한 믿음이다. 가령 어린아이가 복잡한 언어체계를 습득하게 해주는 인지구조적 특성은 인간성의 구성요소이며 이것은 ‘생물학적 소여’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지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촘스키의 이러한 인간 본성론은 그의 정치철학 내지는 정치적 비평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그는 실천적 차원에서 두 가지 지적인 과제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인간의 본질 혹은 본성에 맞는 인본주의적 사회이론을 창조하는 것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사회 내 권력과 억압과 테러와 파괴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촘스키는 인간 본성의 개념과 사회구조의 문제를 연결하는 과제를 도외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과연 긍정적이기만 한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데 촘스키의 해법은 간단하다. 인간에게는 좋은 본능과 나쁜 본능이 있다는 것. 정치적 입장으로서 아나키즘을 지지하는 그의 판단에 따르면, 권력의 탈중심화와 자유 결사는 인간의 정의로운 본능을 더 잘 구현하며, 반대로 집중된 권력은 인간의 나쁜 본능, 곧 탐욕과 공격성, 권력 축적, 타인 파괴 등을 더 부추긴다. 촘스키가 보기에 모든 어린아이는 블록을 가지고 뭔가 만들려 하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즉 창조와 놀이의 충동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이자 인간적 본성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그런 충동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억압됐기 때문이다. 촘스키는 인간이 근본욕구에 따라 자기의 개성을 표현하고 창의적이고 탐구적이며 진취적인 일을 해낼 수 있는 사회가 바람직하며 마땅히 그렇게 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의 정치비평은 그러한 인식의 사회적 실천이다.

반면에 푸코는 인간 본성이란 개념 자체에 회의적이다. 푸코의 입장은 “우리가 현재 상상할 수 있는 것은 현대 세계의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낸 것뿐”이며 “정의와 ‘인간 본질의 실현’ 같은 개념은 우리 문명이 만들어낸 것이고, 우리의 계급 제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쪽이다. 촘스키는 모든 사회적 투쟁은 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만, 푸코가 보기엔 ‘정의’라는 개념조차도 오염된 것이다. 권력을 잡은 계급 혹은 권력을 잡으려는 계급이 내놓은 구실에 불과하다는 것이 푸코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그럴 경우, 개혁이나 혁명에 대해서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가 전반적 권력관계를 집대성한 것이라면 혁명은 동일한 권력의 네트워크를 다른 유형으로 집대성한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의 젓줄을 그는 니체에게서 끌어오는데, 니체주의에 따르면 ‘진리’조차도 권력과 복합적으로 연루돼 있다. ‘진리와 권력’을 주제로 한 1976년의 인터뷰에서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이 세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의 제약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의 주기적인 효과를 유도합니다. 각 사회에는 진리의 체제가 있고, 진리의 ‘일반 정치학’이 있습니다.” 푸코는 진리 자체가 이미 권력이므로 권력의 체계로부터 진리를 해방시킨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촘스키와 푸코의 독자라면 이러한 서로의 관점과 의견 차이는 어느 정도 짐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담은 읽어볼 만한 흥밋거리를 더 제공하는데, 가령 전쟁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MIT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것이 자기모순 아닌가란 방청객의 질문에 대한 촘스키의 답변 같은 것이 그렇다. 그는 MIT에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런 문제에 대한 판단은 간단하지 않다고 답한다. 모든 억압적 기관과 절연해야 한다면 마르크스는 가장 사악한 제국주의의 상징인 대영박물관에서 공부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생각은 물론 다르다. “저는 카를 마르크스가 그곳에서 공부하기를 잘했다고 봅니다. 자원을 활용한 건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 문명의 자유주의 가치관을 활용하여 그 문명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었지요. 제게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고 봅니다.” 

10.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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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2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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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8 06: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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