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이어지는 내용이다. 어쨌든 독자로선 더 좋은 책을 읽을 권리가 있고, 나는 그런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 이런 식의 참견의 말을 거두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도 겸하고 있다.

-143쪽. “라캉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 기억은 외상을, 즉 주체의 바로 그 존재가 집중되는 지점인 실재를 기억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다.”는 “For Lacan, memory primarily has to do with not remembering the trauma, the real on which the subject centers his or her very being.”(86쪽)을 옮긴 것인데, 일단 ‘지점’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불필요한 말이다. 그리고 타동사 ‘center’도 ‘집중되는’이란 뜻보다는 ‘근거짓다’란 뜻으로 보인다. ‘기억하지 않은’이라고 과거형으로 옮긴 건 현재형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옮기면, “라캉에게서 기억이란, 일차적으로 외상, 즉 주체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근거지우고 있는 실재를 기억하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다.” 약간 의역하면, “라캉에게서 기억이란 일차적으로 외상, 즉 실재를 기억하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는바, 이 실재는 주체가 자기 존재 자체를 근거지우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 “우리가 우리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실재를 건드리는 지점이다. 거기서 우리의 말은 실패하지만, 결국 언제나 다시 외상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그것을 조음할 수 없는 채로 말이다.” 원문은 이렇다: “When we tell our stories, it is the point at which we touch the real that our words fail, but fail so as to always come back to the trauma without being able to articulate it.”

여기서 ‘그것은’이라고 옮긴, ‘it’은 (내가 보기에) 강조구문의 가주어이기 때문에, 번역할 필요가 없다. 강조되는 것은 “the point at which we touch the real”이다. 즉 우리의 말이 실패하는 지점이 우리가 실재를 건드리는 지점이다. 말이 실패하는 지점이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어떤 지점이다. 역자는 강조구문의 접속사 ‘that’을 관계사로 보고 번역한 듯하다(그래서 'that'을 ‘거기서’라고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다. 'that'이 'where'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다시 번역하면, “우리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지점이 바로 우리가 실재를 건드리는 지점이다. 하지만, 그렇게 실패함으로써 말로 표현하지 못한 채로 우리의 말은 언제나 그 외상으로 되돌아온다.”

-또 같은 쪽의 인용문에서. “다만 나중에 모든 것 속에서 다시금 그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의 원문은 “...if only to find itself again later in everything”인데, 역자는 'to find'란 부정사를 목적을 나타내는 용법의 것으로 봤는데, 이건 당연히 결과를 나타내는 용법의 To-부정사이다. ‘if ony’는 그냥 ‘only’의 뜻인바, 이 문장 전체는 ‘적합한 사유’(‘적절한/적당한 사고’라고 옮기고 싶다)가 “언제나 동일한 것을 회피”하지만, 결국엔 나중에 모든 것에서 그 자체와 대면하게 될 뿐이다, 란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역시 143쪽 맨마지막 문장에서. “이따금 무죄를 주장하는 죄수들은 그것에 대한 기억을 묻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에서 ‘이따금(occasionally)’이란 부사가 수식하는 것은 ‘주장하는’이 아니라, ‘묻고 있는’이다. 전체 원문은 이렇다: “Thus one can imagine that prisoners who do not talk about their crime and insist on their innocence occasionally bury their memory of it.”(87쪽) 사소하긴 한데, 내 생각에 ‘occasionally’가 ‘insist on’을 수식하려면, 뒤에 콤마(,)가 와야 하지 않을까 한다.

-145쪽. “따라서 그 주체에게 있어서(For the subject)”는 앞에서 ‘그 주체’를 적합하게 받을 만한 말이 없다. 나는 그것이 한정적인 주체가 아닌 일반적인 주체에 관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냥 “따라서, 주체에게 있어서”라고 옮겨져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같은 문장에서 “상징적 질서의 실존(the existence of the symbolic order)” 같은 경우, ‘existence’가 ‘실존’으로 번역되는 것은 오히려 제한적인(즉, 실존철학적인) 문맥에서인바, 그냥 ‘존재’라고 옮겨지는 것이 낫다. 역자는 한두 군데를 빼고서는 ‘existence’를 모두 ‘실존’이라고 옮겼는데(가령, 162쪽에서도), 사르트르식으로 말하면, ‘실존’은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의 ‘대자적 존재’를,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현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므로(그는 ‘탈존’이란 용어도 쓰지만) 용례를 좀더 제한할 필요가 있다(사물들은 실존이 될 수 없다).

-147쪽. 차우셰스쿠의 공화국의 집이 오늘날 ‘민중의 집(People's House)’이라고 불린다는 내용인데, 이게 오역이란 얘기는 아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People's House’는 ‘인민의 집’(153쪽)으로, ‘people’은 대개 ‘인민’으로 번역되고 있다는 점이다. 통일성을 위해서라면, ‘인민의 집’으로 바뀌어야 한다. 고유명사의 혼동된 표기는 흔히 공동번역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데, 이 책 또한 그런 것인지?

-150쪽. ‘기표사슬’은 ‘signifying chain’의 번역인데, 어디에선가 한번 'chain of signifier'(기표의 사슬)란 표현이 나오는바, 그 둘이 같은 말인지 궁금하다. 대개 'signification'이 ‘의미작용’이라고 번역되므로, 그에 따라, ‘의미(화) 사슬’이나 ‘의미작용 사슬’ 정도로 옮겨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게 내 생각이다(‘chain’은 흔히 ‘연쇄’라고도 옮겨진다.). <천개의 고원>의 역자처럼, 'signification'을 ‘기표작용’이라고 옮기지 않는다면.

-같은 문단에서. “그 사슬 너머인 ‘무로부터’ex nihilo라는 어떤 곳(기표 사슬은 바로 그곳에 정초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바로 그것 자체로서 절합된다)이 있다...” 원문은 “there is somewhere which is the beyond of that chain, the ex nihilo on which it is founded and is articulated as such.” 전체 문장이 길기 때문에 역자가 괄호안에 넣어 처리한 대목에서, as such를 역자는 ‘그것 자체로서’라고 옮겼는데, ‘그것 자체’는 흔히 명사 뒤에 'as such'가 나올 때 적합한 번역이고, 여기서는 보어로 쓰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서’, 즉 ‘기표 사슬로서’ 분절된다, 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articulate'의 번역은 ‘분절/절합하다’ 모두 가능하다. 단지 방향이 반대일 뿐인데, 어떤 연속체의 마디를 나누는 것이 ‘분절’이고, 나누어진 마디를 결합하는 것이 ‘절합’인바, 영어의 ‘articulation’은 이 두 가지 뜻을 동시에 표시한다.

-그런데, 몇 줄 아래에서는 ‘is articulated’가 다르게 번역되었다. “그것은 기표 사슬의 기능으로서만 정의될 수 있는 층위에서 조음된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그것’은 ‘죽음충동’을 받는 말이므로, “죽음충동은... 조음된다”란 내용이다. ‘조음’이란 말은 음성학의 용어인데, 유의미한 소리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그러니까 아주 제한적인 의미역을 갖는 단어이다). 그러한 뜻이라면, 그냥 ‘말해진다’가 낫고, 보다 포괄적인 뜻이라면, ‘분절된다’로 옮겨지는 것이 더 무난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53쪽 1행에서. ‘후-근대적 효과’는 ‘포스트모던적 효과(post-modern effect)’에 대한 억지스런 번역이다. 개그담에서도 현학적인 어휘로 자주 등장하던 ‘포스트-모던적’이란 말이 ‘후-근대적’이라고 옮겨지면, 그 말의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예술/건축 쪽 분야 어떤 책에서도 포스트-모던을 ‘후-근대적’이라고 옮기지 않으며, 하나의 예술사조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근대주의’라고 번역하지 않는다. ‘하이패션’이란 말도 그냥 옮겨 쓰는 역자가 왜 이런 단어들에서만 결벽증을 발휘하는 것인지? 몇 줄 아래, ‘저속한 것’라고 옮긴 것도 그냥 ‘키치(kitsch)’라고 옮기든가 괄호 안에 병기해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것도 어느 정도 친숙한 전문용어이기 때문이다. 키치미학을 ‘저속한 것의 미학’이라고 옮기지 않지 않는가?

-154쪽. ‘루마니아의 몰’ 절에서. “장소가 부착되어 있지 않은 도시”(a city without a place attached to it)란 말은 어색하다. ‘부착되어’란 말 때문이다. 같은 의미역에서 찾자면, ‘부속되어’ 정도로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어지는 ‘도시 없는 궁전’은 ‘a city without a place’(장소 없는 도시)의 오역들이다. ‘place’를 자주 나오는 ‘palace’로 잘못 본 것이다.

-159쪽의 ‘차우셰스쿠의 땅(Ceausesculand)’은 ‘차우셰스쿠랜드’라고 옮기는 것이 낫다. ‘디즈니랜드’와 운을 맞춰서. 그리고 아랫줄의 ‘루마니아 마을 박물관Musium of Romanian Village’은 ‘루마니아 민속촌’혹은 '루마니아 민속박물관'이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160쪽. “이와 유사하게 디즈니에게 있어서 큰 타자는 영화에서보다 완벽하게 실현되는 기술 세계였다.”에서 ‘기술 세계’도 역자의 결벽이 발휘된 예인데, ‘테크놀로지의 세계’(the world of technology)라 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테크노피아’도 ‘기술-유토피아’라고 번역해야 되는 게 아니라면.

-162쪽. 저자 살레클이 4장의 내용을 친절하게도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는 대목: “루마니아 이야기의 비극은, 차우셰스쿠가 큰 타자는 한낱 상징적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며, 동시에 사람들은 허구가 그들이 상상한 것보다 더 큰 힘을 그들에게 발휘한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구로 이루어진 문장인데, 역자는 차우셰스쿠와 대조되는 'the people'을 하필 여기서만 ‘인민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이라고 옮겼다(독재자의 짝은 ‘사람들’이 아니라 ‘인민들’이다). 아무래도 이 장은 복수의 역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덧붙여, ‘동시에(while at the same time)’는 의미상 ‘반면에’가 더 적합하다.



-165쪽의 각주22)에서 ‘모스크바의 대학교 로모노소프’라고 한 것은 부정확한 표현이다. 우리말에서 ‘OO대학’이라고 하지 ‘대학OO’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모노소프는 1755년에 모스크바대학을 설립한 러시아 18세기 최대의 학자이다. 여기서 살레클이 비교하고 있는 것은 모스크바대학 본관건물인데(사진으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학부)건물의 풀네임에 로모노소프란 이름이 들어간다. 차우셰스쿠 궁전과 외형을 비교해 보시길.

-167쪽. 각주34)에서. “우리의 사회주의 사회가 문명의 우월한 수준에 도달할 때”는 “우리의 사회주의 사회가 보다 높은 수준[단계]의 문명에 도달할 때”로 옮기고 싶고, “인간의 인격은 다면적으로 번창할 것이다”는 “다면적으로 풍성해질 것이다”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인격이 번창한다?).

5장부터는 따로 시간을 내야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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