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제까지 한 두어 주 동안 살레클(*살레츨)을 읽었다. 다른 일들로 바빠서, 전철에서만 찔끔찔끔 읽는 바람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인데, 무난한 번역이었기 때문에 읽는 일이 전혀 고역은 아니었다. 독후감은 바쁜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정리해볼 생각이지만, 그러기 전에, 번역과 관련하여 생각이 다른 부분이나 오역/실수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서 ‘마저’ 지적을 한다. 혹 개정판을 낸다면, 의견이 반영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혼자만의 기대에 편승해서.
2장에서 7장까지, 그리고 결론까지 읽으면서 매끄럽지 못하거나 오역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1장에서만큼 두드러지진 않았다. 아마도 역자의 번역이 어느 정도에 궤도에 오른 때문이리라(실제로 2장 같은 경우는 원서를 거의 참조하지 않고서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부터의 지적은 애독자의 투정 같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참고로, 요즘 하는 일이 학술지 편집 같은 것이기 때문에, 교정되어야 할 부분을 그냥 못 지나치는 것은 일종의 나의 ‘직업병’이기도 하다.
-81쪽 8행. ‘그는’은 ‘그/녀는’이다. “he or she”를 옮길 경우, 역자는 ‘그/녀’라고 표기해 왔는데, 여기서는 빠졌다.
-85쪽. 중간부분. “욕망이 끝없이 질문을 한다면, 충동은 질문이 멈추는 곳에서 관성을 내놓는다.” 원문은 “If desire constantly questions, drive presents an inertia where questioning stops.”(50쪽)이다. 매끄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 두번째 절이다. 관계사 where가 받는 것이 inertia이며, 따라서 ‘질문이 멈추는 곳=관성’이다. “충동은 질문이 중단되는 관성을 내놓는다.” 정도로 옮겨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102쪽. “사이렌의 노래는 사이렌의 출현에 관한 노래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멈춰야 한다”는 인용문에서 ‘출현’이 중복 번역되었다.
-103쪽. 5행의 ‘상징적인 것’은 흔히 ‘상징계’로 번역되는 ‘the symbolic’인데(물론 ‘상징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이도 있다), 역자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다. 거의 관례화된 용어인데... 그리고 하단의 ‘가희’는 'singer'를 번역한 것인데, ‘singer’는 일반적으로 뮤즈의 시종으로서의 ‘시인’을 지칭하는 말인데, 여성명사(‘가희’)로만 번역돼 있는 것이 조금 아쉽다.
-105쪽 인용문에서. “예술이 인식으로 간주되기를 포기하고..”는 “So long as past declines to pass as recognition...”을 옮긴 것인데, 'past'가 어떻게 ‘예술’이란 뜻을 가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실수가 아닐까 싶은데, 바로 다음 줄에서도 확고하게, “예술은 쾌락과 마찬가지로...”라고 옮긴다(여기선 대명사 ‘it’인데). 의역한 것인지?...
-112쪽 1행. “타자가 그녀를 접근불가능한 욕망의 대상으로서뿐만 아니라 향유의 대상으로 취급할 때”는 “when the Other takes her as object of jouissance and not simply as the inaccessible object of desire.”(67쪽)를 옮긴 것인데, 내가 보기엔, ‘대상으로서뿐만 아니라’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접근불가능한 욕망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이다. 그리고, 오 헨리의 단편 이야기에서 브로드웨이의 ‘dancer’를 ‘무희’로 옮기는 것은 너무 점잖은 번역이다. 그냥 ‘댄서’가 낫다. 내용상 그녀가 추는 춤은 스트립쇼이거나 그와 비슷한 춤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댄서’는 ‘댄서의 순정’이라고 할 때의 그 ‘댄서’이다(‘무희의 순정’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무희’는 발레리나 정도에 어울리는 말이다).
-117쪽. “(라캉은) 여성적 향유는 여자에게만 하나의 잠재성인 것임을 지적한다.”는 “Lacan points out that feminine jouissance is only a potentiality for woman...”(71쪽)을 옮긴 것인데, ‘only’가 수식하는 것은 ‘woman’이 아니라 ‘potentiality’이므로, 번역도 그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라캉의 지적에 따르면, 여성적 향락은 여성에게서 단지 하나의 잠재성일 뿐이다.)
-124쪽. “나의 요점은 카프카가 오디세우스와 사이렌의 조우에 대한 표준적 판본에 근대주의적 비틀림을 제공한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에서 ‘근대주의적 비틀림’은 ‘a modernist twist’를 옮긴 것인데, 여기서 ‘modernist’는 전근대주의의 짝개념으로서의 근대주의가 아니라 리얼리즘의 짝개념으로서의 모더니즘을 말한다. 즉 루카치가 토마스 만(=리얼리즘)이냐, 카프카(=모더니즘)냐, 라고 할 때의 그 모더니즘이다. 그 모더니즘을 ‘근대주의’라고 옮기는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여기서는 그냥 ‘모더니스트적 비틀기’나 ‘모더니즘적 비틀기’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리고, 몇 줄 아래에서 “(사이렌의) 선주체화된”은 'presubjectivised'를 옮긴 것인데, 그것은 ‘주체화 이전’을 뜻하기 때문에 ‘선주체화’란 말은 맞지 않는다. 역자가 즐겨쓰는 ‘전(前)’이란 말 대신에, 왜 여기선 ‘선(先)’이란 말이 들어갔는지 모르겠다(‘선주체화된’은 ‘먼저 주체화된’이란 뜻이지 않은가?)
-126쪽. 각주12)에서 'subjects'는 ‘신하들’로 옮겨졌는데, ‘신민(臣民)들’이란 뜻이니까 신하들과 백성들을 포괄하는 말이다. ‘백성들’이란 번역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132쪽 이하에서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가 전부 ‘부카레스트 Bucharest’로 옮겨졌다. ‘부카레스트’는 영어권에서의 명칭일 뿐이며, 이미 ‘부쿠레슈티’(루마니아식 원음에 가깝다)가 통용되고 있는데, 그걸 ‘부카레스트’로 옮긴 이유를 모르겠다. 역자가 ‘영어중독자’가 아닌 이상, 이해하기 힘든 일이고, 독자의 한 사람으로선 불쾌한 일이다. 이건 ‘파리’를 ‘패리스Paris’라고 옮기고(영어를 병기해서), ‘모스크바’를 ‘모스코Moscow’이라고 옮기는 식인데, 가뜩이나 미국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아주 못마땅하다. 철자대로 옮겼다면, 살레클이 ‘Romania’로 표기하고 있는 루마니아는 왜 ‘로마니아’로 옮기지 않았을까?...
혼자서 괜히 흥분한 것인가? 잠시 다른 업무에 매진한 다음에, 마저 지적하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