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 여기저기서 정산하고 결산하느라 분주하다. 오늘자 한겨레(28면)엔 여성관객들이 뽑은 최고의 영화, 최악의 영화 순위가 소개돼 있는데, 예상할 수 있듯이 최악의 영화 1위는 김기덕의 <나쁜 남자>이다.

 

 

 


이번주 씨네21에 각 평론가들이 뽑은 올해의 영화 목록을 보면, <나쁜 남자>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은 이들도 적지는 않다(25%정도). 김기덕에 대한 평단의 시각은 엇갈리지만, 나는 그를 신뢰하지 않는 쪽이어서(<나쁜 남자>엔 적의만 있지 리얼리티가 없다) <나쁜 남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그리고 2위는 <가문의 영광> 3위는 <취화선> 4위는 <중독>이다. <최화선>은 언제 시간나면 볼 예정이지만, 나머지 영화들에는 아직 관심이 없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다. 아마 임권택의 영화로는 <노는 계집 창>도 그해의 최악의 영화에 뽑혔던 듯하다(그리고 물론 그럴 만하다). 임권택식 휴머니즘은 대개 남성중심적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5,6위 영화들이다. 대다수 평론가들에 의해 올해의 영화로 지목된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과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각각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묘사", "장애여성이 성폭행하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비상식적 설정"이라는 이유로 최악의 영화 리스트에 오른 것. 물론 이 목록은 일반 여성관객들(+여성문화예술인)의 평가를 근거로 작성된 것이니만큼 어느 정도 '대중주의'적 편견이 작용하고 있으리라. 그렇지만, 이 영화들이 여성관객들을 불편하게 한 최악의 영화들인지는 의심스럽다. 즉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요즘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하게 됐지만, 올해 내가 본 한국영화들 가운데, 두 편은 가장 재미있는 영화들이었고, 가장 동의할 만한 영화들이었다.

나의 동의의 근거는 리얼리즘에 있다(나는 영화에서의 리얼리즘을 지지한다. 순수한 환타지를 나는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다). 물론 시야를 넓히면, 마술적, 환상적 리얼리즘의 걸작들을 꼽을 수도 있지만, 한국영화에서 그런 계열의 걸작이 나올 가능성은 아직은 희박하다. 때문에 한국영화에는 제대론 된 영화('리얼리즘 영화'와 '쟝르 영화'가 주종이다)와 덜 떨어진 영화(여기에도 두 부류가 있다. '돈번 영화'와 '돈날린 영화')가 있을 뿐이다.

물론 홍상수의 영화는 지극히 모던적이며, 모더니즘 영화로 분류될 수 있지만, 내가 그의 영화에서 즐기는 것은 디테일(리얼리티)이다. <생활의 발견>과 <오아시스>는 리얼리티에 근거한 유머와 환타지로 올해의 '발견'에 값하는 영화들이다. 그 영화들에서의 여성 이미지는 내가 보기에 '현실'의, 아주 '현실적인' 이미지들이다. 그런 이유로 그 영화들이 최악이라면, 공권력의 무자비한 유혈진압으로 아수라장이 된 시위현장을 담은 영화도 지나치게 '폭력적'이란 이유로 최악의 영화가 될 만하고, 여성들의 성적착취 현장을 담은 영화도 지나치게 '차별적'이란 이유로 최악의 영화가 될 만하다.

 

 

 

 

한편 최고의 영화로 꼽힌 두 작품은 변영주의 <밀애>와 유하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이다. <밀애>는 보지못해서(보려고 했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다) 뭐라 말할 수 없고, <미친짓>의 경우는 사회적 메시지를 예쁘게 포장한 얄팍한 상업영화이다. 물론 감독도, 관객도 그 영화가 상업영화란 걸 알며 6000원 어치의 감동을 팔고사는 거에 불과하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여성의 욕구를 솔직히 표현"했다는 이유로 이 영화가 여성영화라니?

<나쁜 남자>의 경우가 전형적인 남성 환타지이며, 그래서 최악의 영화라면, <미친짓>은 여성 환타지이기 때문에 여성영화란 말일까? 그 영화에서 여성의 솔직한 욕구란 건, (열정적인) 사랑과 (안정적인) 결혼을 한꺼번에 얻고 싶다는 욕구이다. 즉, 의사남편과 결혼하고 잘생긴 대학강사를 정부로 두며 '영리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 그것이 현실에서는 대개 대립하기 때문에, 영화속 현실은 관객의 환타지가 되며, 대리만족을 준다. 결혼 제도에 대한 비아냥이 대화의 양념으로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영화 속 엄정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의 관객들도 결혼 제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여성적이고, 여성영화란 말일까? 여성들의 솔직한 욕구가 판단의 기준이라면, <죽어도 좋아>는 왜 빠졌을까?

나는 일반적으로 좋은 영화와 여성관객에게 좋은 영화가 구별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여성에게 혐오스러운 영화는 남성에게도 혐오스러운 것이어야 맞다. 물론 그 차이나 간극이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을 테지만, 서로가 판단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좋은 영화는 그런 부분을 포착하고 확장시켜 가는 데 기여한다. 내가 보기에 <생활의 발견>이나 <오아시스>는 그런 영화들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미친짓>(<밀애>는 보지 못했으므로)보다 훨씬 많은 걸 보고 알게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이 나 자신의 '남성'으로서의 편견이 아니기를 바란다.

<오아시스>에 대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비판이 잠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나는 그의 글을 모아 읽고, 재비판하고 싶었지만, 일상적인 일들에 치이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밀린 빨래를 한꺼번에 할 때처럼 몰아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싶다. 정성일은 내가 비교적 신뢰하는 평론가이지만(그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보고 동시에 가장 많은 영화책을 읽는다, 내가 아는 한.) 간혹 그의 취향은 튀어 보인다. 그의 <오아시스> 비판은 공정하지가 못했는데(그래서 나를 설득하지 못했는데), 그 비판의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장애 여성이 성폭행하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비상식적 설정"이다(이런 이유로 한 장애 여성도 <오아시스>를 비판한 적이 있다).

간단히 핵심만 말하면, 영화에서 종두는 그런 식으로밖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관심을 표출할 수 없는 인간이다. 종두가 '철이 들어서' <프리티 우먼>의 리처드 기어식으로 구애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여성적인 설정일까? 공주에게서 문제가 된 건, '폭력'이 아니라 '관심'이다. 그리고 둘이 가까워지는 건 '폭력'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관심'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설정에 리얼리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론 영화의 맨마지막 장면에서 종구가 나무에 올라가 공주를 위해서, 공주의 환타지(오아시스)를 방해하는 나뭇가지들을 베어내고, 공주가 한껏 라디오 음악의 볼륨을 높이는 대목은 압권이다(이미 알고 있는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다가 나는 이 대목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 <오아시스>에서 인물의 대립축은 공주:종두가 아니라, 그들:우리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더 폭력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종두가 아니라 공주와 종두의 주변 사람들, 즉 우리들이다. 성폭행의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사랑이라는 구도로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보기엔 이 영화의 가해자들이다.

올해의 영화 5편에 정성일은 <취화선>을 1위로 꼽고(그의 임권택 숭배에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오아시스> 대신에 <나쁜 남자>를 집어넣었는데, 취향은 저마다 자유인 것이지만, 나는 그 선택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나쁜 선택이다...


2002.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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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inda 2009-08-2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서 반갑습니다/저 모습이 로쟈님인가요?/많은 항목중에 영화를 깊이있게 보지는 못하지만 좋아해서 여기에 처음으로 꼬릿글을 달게 되었습니다/전행영화와 깡패영화가 제작된 영화의 절반을 넘을거라는 저의 통계입니다/모성본능이라면 생산된 자식의 죽음을 바라지 않을것이며 무서운 폭력과 여성을 무시하는 그런영화들이 널려 있는데.....글쓴지 7년이 지났으니 올 년말쯤에는 조금나쁜 영화보다 많이 나쁜 영화를 골랐다는 기사를 접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