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가 엮은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쥬 이론>(영화언어, 1990)에서 1부를 읽다. 주로 자전적인 내용으로서 러시아 영화와 주변 인물들에 관한 얘기가 덧붙여져 있다. 120쪽 정도의 분량을 훑어봤는데, "나는 왜 영화연출가가 되었는가?"(1944)란 자기 분석, 일종의 정신분석적인 글이 그나마 인상적이다. 보통의 착한 아이들도 어릴 때는 무얼 부수고, 분해하고, 못살게 구는 '나쁜 짓들'을 하는데, 제 때에 그런 짓들을 해보지 못한 '얌전한' '나쁜 아이'는 뒤늦게서야 그런 파괴적인 본능에 눈을 뜨게 되는바, 영화감독의 길이란 바로 그런 나쁜 아이의 길이라는 것이 에이젠슈테인의 자기분석적인 주장이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본다. "파리나 잠자리나 개구리에 적용되지 않았던 잔학성은, 연출가로서의 나의 작품의 주제, 방법, 이데올로기의 선택에 격렬한 특징을 부여하게 되었다. 사실 나의 영화에는, 군중에게 포화를 퍼붓거나, 가난한 농민들을 밧줄로 묶어 머리까지 땅 속에 파묻고 그 위를 말발굽이 짓밟거나(<멕시고 만세!>), 오뎃사의 계단에서 아이들을 짓뭉개거나(<전함 포템킨>), 또는 지붕에서 떨어뜨리거나(<파업>), 부모에게 아이를 죽이게 하거나(<베진 초원>), 타는 장작불 속에 던져 넣거나(<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스크린에 소의 생피를 흘리거나(<파업>), 배우의 피를 흘리게 하는(<전함 포템킨>) 등의 잔인한 장면들이 가득찼다. 또한 소를 독살하기도 하고(<총노선- 낡은 것과 새 것>), 황후에게 독이 퍼지게 하고(<폭군 이반>), 총에 맞는 말을 열린 도개교에 늘어뜨리기도 했다(<시월>). 그리고 포위된 카잔 성의 성벽을 따라 늘어선 사람들한테 비오듯 화살을 퍼붓기도 했다. 게다가 오랜 세월, 내 마음을 사로잡아 왔던 주인공이 다름 아닌 폭군 이반이라는 사실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실로 기분 나쁜 작가! 그럴 수도 있다. <폭군 이반>의 시나리오 속에 바로 그러한 작가의 자기 변호가 감추어져 있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37쪽)
에이젠슈타인의 영화론과 관련해서 전양준 편역, <이미지의 모험>(열린책들, 1990)이 유익하다. 이런 류의 감독론으로는 거의 최초의 책임에도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 잘 짜여져 있고 풍족하다. 문제는 이미 옛날에 구입했던 이 책이 나에겐 실종도서라는 사실이다. 이것과 함께 사라진 영화책으로는 <세계영화사>(이론과실천)가 있다. 에이젠슈테인과 관련한 일화 중에서 서로 라이벌이었던 푸도프킨과의 관계를 극명하게 말해주는 것. "겉으로는 유대를 가장 하면서도 한번 고집이 나오면 이 두 비범한 예술가는 <골목대장>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싸우는 어린아이처럼 서로를 경계했던 것이다. 결국에는 두 사람 다 개를 사서 이 불쌍한 동물에게 상대방의 이름을 붙였다. 푸도프킨은 자신의 개 '에이젠슈테인'에게 앞발을 들고 서 있게 하는 훈련을 시켰고, 한편으로 에이젠슈테인은 개 '푸도프킨'에게 명령을 들으라고 고함을 쳤던 것이다."(16쪽)
에이젠슈테인의 장편영화 7편 중에서 구해볼 수 있는 건 4편뿐이었다. 이 20세기의 다빈치이며, 예술계의 다윈이자, 마르크스에 대해서 더 많은 걸 뽑아낼 수 있을까? 김석만 편역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감독노트>(예하, 1991)도 읽을 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연출강의>(예건사)의 많은 부분은 <죄와 벌>의 장면화에 관한 것이다. <몽타주 이론>(영화언어)의 2부는 <이미지의 모험>(열린책들)과 내용이 겹친다. 다시 한번 <이미지의 모험>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궁금하다...
덧붙임: 이 글은 몇 년전에 쓴 것인데, 실종된 영화관련 서적 몇 권은 아마도 현재 조감독을 하고 있는 동생의 친구가 가져가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이미지의 모험>을 나는 작년인가 다시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