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언어상대성 가설)로 유명한 미국의 언어학자 벤자민 리 워프의 선집 <언어, 사고, 그리고 실재>(나남, 2010)가 궁금해서 어제 서점을 찾기도 했지만, 지난주는 눈에 띄는 새책이 많지 않은 주였다. 그런 가운데에서 한권 꼽으라면 가장 묵직한 <엥겔스 평전>(글항아리, 2010)이 서가를 장식할 만하다. 자세한 소개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알라딘이 먹통이 되지 않았다면 어제 옮겨놓았을 기사다(상품 이미지 넣기는 아직도 안되는군).   


◇엥겔스(뒷줄 왼쪽)가 1864년 마르크스(〃 오른쪽), 마르크스의 딸들과 함께 찍은 사진.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딸들로부터 ‘둘째 아빠’라고 불릴 정도였으며 그들을 40여년간 보살폈다     

세계일보(10. 11. 20) “마르크스의 예언 가시화 시작됐다” 

공산주의 이론을 완성한 마르크스(1818∼1883)와 엥겔스(1820∼1895·사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종언을 고한 지 20여년 만에 이들의 명성이 되살아나고 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와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를 초래한 무시무시한 존재에서, 최근에는 현대 자본주의를 예리하게 분석한 이론가로 변신 중이다. 이미 1998년 ‘공산당 선언’ 출간 150주년을 맞아 뉴욕타임스는 ‘마르크스의 주가가 150년 만에 다시 치솟았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은 바 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공산당 선언은 지칠 줄 모르고 부를 창조하는 자본주의의 힘을 먼저 인식했고, 자본주의가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며, 여러 나라의 경제와 문화가 세계화라고 하는 불가피한 과정 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게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평했다.

영국의 대표적 소장 역사학자인 트리스트럼 헌트(퀸 메리칼리지대 역사학부 교수)는 ‘엥겔스 평전’을 통해 “지금도 이런 분석은 유효하며 재해석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뉴욕타임스의 예언대로 서방의 정부와 기업, 은행들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유시장 만능주의(신자유주의)라는 태풍을 만났다. 멕시코와 아시아는 경제위기를 겪고 있고, 중국과 인도는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으며, 러시아와 아르헨티나에서는 중산층이 대거 몰락했고, 대량 이주가 일어나고 있다. 저자는 “2007∼09년 전 세계는 자본주의 위기를 겪으며 마르크스의 ‘불길한 예언’은 가시화하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2008년 가을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은행 국유화가 진행됐다. 그 와중에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자본론’(2008년 독일에서는 베스트셀러)을 읽고 있는 사진이 일간지에 나오자 영국 일간 더 타임스는 “그(마르크스)가 돌아왔다”고 외쳤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마르크스를 가리켜 “놀라운 분석력을 가진 존재”라고 극찬했다.

지난 80년간 지구의 3분의 2에 달하는 땅에서 유혈과 파괴를 초래한 마르크스가, 오히려 파괴적인 자본주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인 외경심, 기사도의 열정, 속물적인 감상주의도 몽땅 이기적인 계산이라는 얼음물 속에 처박았다”고 했다. 자본주의가 각국의 언어와 전통 국가체제마저 변질시키는 과정을 밝혀낸 최초의 인물은 마르크스였다.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말이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대명사가 되기 훨씬 이전에 벌써 마르크스는 세계화의 모순을 짚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동업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대한 평가는 마르크스에 대한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그가 부르주아지 출신이었기 때문인가. 동유럽이 몰락한 1989년 사회주의의 아픈 기억을 잊고 싶어하는 분위기와 맞물려 그는 대중의 기억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심지어 마르크스를 윤리적 휴머니스트로, 엥겔스를 기계론적 과학주의자로 양분해 엥겔스는 옛 소련과 중국, 동남아 공산국가들이 저지른 만행의 원조로 지탄받기도 했다. 


◇극심한 빈부차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진으로, 영국 빅토리아시대(1837∼1901) 면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소년의 모습이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 이 사진을 보고 분개했다.

저자는 엥겔스에 관심을 갖는 이유에 대해 “그가 아니었으면 공산주의가 태동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프로이센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돕기 위해 맨체스터 면방직 공장을 40여년간 운영하는 등 그를 성심성의껏 도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국 남부 플랜테이션에서부터 영국 지배하의 인도까지 세계 무역의 흐름을 두루 접하면서 경험한 국제 자본주의 구조와 모순은 마르크스 자본론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빈민가 체험을 하고 무장 봉기에 나섰으며, 식민지 해방 문제를 정확히 제시했다. 그는 또 마르크스의 천재성을 살리고, 공산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적인 야망까지도 버렸다고 저자는 풀이한다. 사회주의자들이 걸핏하면 떠들던 ‘개인희생’은 이렇듯 엥겔스가 시초였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함께 자본주의 비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대와 진보, 종교와 이데올로기, 식민주의, 세계적인 재정 위기, 도시 이론, 페미니즘, 다윈주의, 생명윤리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니 저트는 “본래의 공산주의가 변질됐으며, 레닌주의라는 독소로 인해 일탈했다”고 규정했다. 저자는 ‘못된 공산주의’가 물러간 지금이야말로 다시 한번 그들의 저작을 되돌아볼 좋은 기회라고 제안한다. 경제위기가 반복되면서 대기업과 거대 은행, 거대 자본가 등에 부가 집중하고, 빈부차가 극심해지며 서민과 노동자가 불행해지는 신자유주의 물결 속으로 빠져드는 지금, 이 책은 신자유주의 종말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를 시사하고 있다. 우주와 인간과 역사를 근본부터 잘못 인식해 허물어진 마르크스의 광풍이 다시 휘몰아친다면 역사의 향방은 어떻게 될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유명 사상가의 단순한 평전이 아니다.(정승욱 선임기자) 

10.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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