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연휴 끝에 쓴 글을 여기에 옮겨둔다... 연휴가 끝나고 연 사흘째 이삿짐을 싸고 있다. 모레부터 3주 동안 지난 1년간 몸담았던 연구소의 천정과 바닥 공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연구소 비품도 챙겨야 하고 그동안 쌓아두었던 책들을 몽땅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해서 30박스쯤 정리하는 일이니까 일이야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짐을 챙기는 손은 더디고 마음은 심란하다. 2월에 해야 할 일들이 빽빽한 터에, 벌써(!) '이삿짐'이나 챙기고 있다니!..

 

 

 

 


잠시 기분풀이로 올해에 나올 책들과 영화들을 꼽아본다. 영화잡지들을 그다지 챙겨보지 않기 때문에, 현재 제작중인 영화들이 어떤 것들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올해 어떤 영화들이 개봉된다 하더라도 내가 보고싶은 영화로 첫손가락에 꼽을 건 이미 정해져 있다. 그건 홍상수의 다섯번째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다. 지난주 <씨네21>에 실린 촬영장 취재기를 보면, 벌써 지난 10일에 모든 촬영이 마무리되고, 편집 등의 후반부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돼 있다(5월초 개봉예정). 그의 모든 영화를 개봉관이나 시사회장에서 보았었는데(<강원도의 힘>은 시사회장에서 허진호 감독 바로 앞자리에서 보았다), 아쉽게도 이번만은 그러지 못할 거 같다. 예정대로 개봉될 때쯤이면 나는 다른 나라에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이 생각을 하니까 외국에 나가는 일이 싫어진다!).(*그로부터 1년도 더 지났다. 나는 얼마전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비디오를 '떨이'매장에서 2,000원 주고 샀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말을 빌면, 나는 매번 홍상수의 영화가 '뒈지게' 기다려진다. 사실 데뷔작이었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가 문제적이었는데, 나는 그 영화가 개봉되기 일주일 전에 (잘못알고) 개봉관에 가서 왜 영화를 하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홍상수는 '한국영화의 발견'이다(나는 개봉관에서 연거푸 그의 데뷔작을 보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아직은 임권택을 꼽지만, 그건 노장에 대한 예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학에 들어와서 나중에야 그의 전환점이 된 <만다라>나 <길소뜸>을 봤지만(나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맘에 든다), 아무런 유보없이 '임권택 만세!'를 부르기엔 나는 너무 젊었다.

 

 

 

 

아마도 내가 극장에서 최초로 본 임권택 영화는 <씨받이>였던 거 같다. 그 전에 그해 아카데미작품상 수상작인 <아웃 오브 아프리카>란 영화를 볼 때 <씨받이>의 예고편이 나왔고 관객들이 다 웃음을 터뜨린 기억이 있다. 비록 강수연이 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고선 그 영화에 대한 평가가 다소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모습이 한국영화에 대한 당시 관객들의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80년대 중반의 한국영화는 주윤발의 홍콩 느와르보다도 못한 평가를 받았고, 한국영화를 (공개적으로) 보러 가는 대학생은 아주 드물었다.

가히 한국영화의 몰락이라고 할 만한데, 그러한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감독이 이장호이다. 그의 80년대 필모그라피는 <바람불어 좋은 날>(그의 가장 좋은 영화)에서 <바보선언>(그나마 객기가 문제의식처럼 보인 영화)을 거쳐서 <어우동>으로 빠진다(혹은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익사한다). 그나마 퇴행적으로라도 80년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영화가 이장호의 조감독 출신인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시리즈이다(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답답한 청춘들!) 하지만, 이 배창호도 흥행몰이에 우쭐하여 장미희에 대한 오마주로 <황진이>를 만들면서 하향안정세로 접어든다.


 

 

 


 

그리고, 80년대 후반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이 당시 히트 연극을 영화화한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1988)부터이다. 장선우의 <성공시대>나 이명세의 <개그맨> 등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면서 이른바 한국영화의 새로운 젊은 감독 3인방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박광수는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좀 일찍 정점을 보여주더니(그 이상을 기대했지만, 지나고 나니까 그게 정점이었다) <베를린 리포트>부터 곧바로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해서 아직 돌아온다는 소식이 없고(복고풍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잠시 재기하는 듯했지만 <이재수의 난>으로 완전히 찍혀 버렸다), 장선우는 세속세계(그가 잘 만드는 쪽이다)와 화엄 세계(그가 죽을 쑤는 쪽이다)를 왔다리갔다리하면서 들쭉날쭉 영화를 만들다가(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우묵배미의 사랑>이다) <성냥팔이소녀의 재림> 이후에 잠적중이고(이번에 재기한다는 소문도 있다. 시집 한권 내고서), 그나마 엘리트의식 없이 이장호-배창호 사단의 적자로서 꾸준히 진화하고 있는 감독이 이명세인데(<인정사정 볼것없다>로 드디어 대중적인 인정을 받았다), 현재는 도미중이다.


 

 

 

 


한국영화에서 이들 3총사를 잇는 차세대의 대표적인 감독이 1996년에 데뷔한 홍상수이다. 시작은 아주 미미했지만, 요즘들어 서서히 대가급으로 인정받는 박찬욱 감독과 나이는 박광수, 장선우 세대이지만 (박광수 조감독 출신의) 한국영화감독이 맞나 싶게, 영화를 잘 만드는 이창동 감독(겸 장관)이 같은 세대이고(새로운 3인방이라고나 할까?),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나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한국영화의 미래이다(물론 확실한 자기 스타일을 먼저 보여준 건 장준환이고, 봉준호는 감독 자신의 고백대로 아직은 암중모색단계이다).

거기에, 아직은 홍상수의 그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허준호나 박찬옥 감독까지 곁들이면, 강우석-김상진 계보나 강제규 감독 등과 대비되는, 한국영화에서의 작가주의 진영이 대략 갖춰진다(여기서, 작가주의라는 건, 관객의 코드보다는 감독 자신이나 영화에 대한 고려가 우선적인 영화만들기를 통칭한다). 참, 가장 과대평가된 '속죄양' 혹은 영화판의 '장정일' 김기덕이 빠졌다. 지젝이 잘 쓰는 표현에 따르면, 김기덕은 홍상수식 작가주의 영화의 외설적인 이면처럼 보인다.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게 아닌데, 뜬금없이 한국영화사 얘기가 돼 버렸다. 어쨌든 한국영화라는 장 속에서 홍상수의 자리가 어디인가를 간단히 짚어보고 싶었을 뿐이고, 가까운 장래에(한 10년쯤 후에)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임권택 대신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꼽을 수 있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사실 이러한 평가는 국외에서나 평단에선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직은 대중적인 인지도가 그에 못미칠 따름이다. 잠시 이번 신작의 촬영장을 훔쳐본 기자에 의하면, 이번 영화는 이전보다 더 많은 유머들로 넘쳐난다고 하고, 또 성현아가 주연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영화들 중 역대 관객동원 기록을 갱신할 가능성이 높다. 그 관객에 내가 빠지더라도.

하니, 바라건대, "우물에 빠진 돼지가 강원도에서 수정을 만나서 발견한 것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우스개도 있는 만큼 가급적이면 그의 영화들을 두루 섭렵하신 다음에 올봄에 개봉박두인 영화를 기대해 보심이 어떠실지? 이 정도면 나도 홍상수에 대한 애정을 충분히 표시한 셈인가? 나는 받은 만큼 갚는다(이게 비평의 기본 자세이다). 그렇다면, 제목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무슨 뜻인가? 제목 풀이는 <씨네21>의 기사를 참조하시길(그래야 감독의 육성을 직접 읽을 수 있다)...

참, 올해에 나올 책 얘기를 빠뜨릴 뻔했다. 올해 나올 책으로 내가 가장 기대하는 건 데리다의 <법의 힘>이다. 역자는 진태원씨이고(그는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다시 번역중이라고 한다. 국내에도 데리다 전문 번역자가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교정중이라고 하니까, 올봄엔 책이 나올 거 같다. 비로소 데리다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사건'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어쩌면 올해 그의 부고를 들을지도 모르고). 유감스럽게도, 이 책 역시 내가 뜨끈한 책을 읽어보긴 힘들 거 같군. 그리고 아마도 지젝의 주저 두 권이 올해 안에 나올 것이다. 두 권 모두 기대반 우려반이다. 데리다보다도 수준이 떨어지는 지젝 번역서라면?

라캉의 <에크리>는 판권을 갖고 있는 새물결이 연말에 나온 사진집으로 떼돈을 벌었다고 해도 올해를 넘길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번역의 질이기 때문이다. 올해 안에 나온다면, 2% 정도 기대해 봄직하다(98%는 아마도 우리말이 아닐 확률이다). 나는 그의 문장들이 어떻게 우리말로 변환될 수 있는지, 그 번역의 연금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연금술은 '연금술'에 그칠 거라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다. 해서, 라캉과의 조우라는 사건은 아직은 미래형이다. 적임자가 곧 도래하기를 바란다.

또, 무슨 책들이 나올 것인가? 간혹 나이 먹는 일이 덜 유감스러운 것은 순전히 이러한 기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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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inda 2009-08-24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워낙 소심해서 읽으면서 조마조마 했습니다/ㅎ/참 삼천포라는 단어도 포함해서/요즘 명예도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훼손했다고 야단법석이라서...../하지만 여기에 거론되지 않은 가독은 서운해 할지 모르겠습니다/한 시대를 순간 읽어내리면서 동의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한국사람은 세계 1등 좋아하는데/세월이 지난 지금도 김기덕과 홍상수는 알아주지 않습니다/세계에서 알아주는데 말입니다/저는 외국에서 유명하다고 그래서 더 좋아할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음.......데리다/이 번에도 데리다가 발목을 잡네요/지금쯤 다른 항목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