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의 2장 2절 ‘세계의 밤’부터이다. 102쪽. 진도를 좀 빨리 나가기로 하겠다. 이제까지처럼 일부 오역들을 지적하면서,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정리하는 방식이다.

(21) 둘째 문단, “실증주의적 에고 심리학의 상승과 함께”(with the ascent of positivist ego psychology)는 “득세와 함께”가 더 낫겠다. 이러한 (미국식) 에고 심리학의 득세 때문에, 정신분석학의 고유한 혁신성과 전복성이 거세되는데, 이에 대한 비판으로 러셀 자코비(제이코비)의 <사회적 건망증>(원탑문화사, 1992)이 있다(이 책에 대해서는 <향락의 전이> 초반부에도 언급이 되고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정신의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은 모두 에고 심리학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의 가장 큰 특징은 심적 장치가 얼마만큼 현실(현실원칙)에 잘 적응하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가름하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적응’심리학이라고 불릴 만하다(이 적응심리학은 ‘승화’를 대단히 중요하게 다룬다. 승화란 자칫 ‘병리적일 수 있는’ 리비도 에너지를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방식으로 방출하는 걸 말한다). 라캉-지젝의 정신분석학은 물론 그러한 현실원칙과 기준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이론적 기획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문명비판과 상통한다.

(22) 103쪽. “그러나 이러한 비판의 시야는 그것이 비록 도래할 소외되지 않은 사회에서...”에서 ‘그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뒤엣말을 받는 지시대명사이며, 우리말 문법에 맞지 않는 번역투이다. 우리말에서라면, ‘그것’은 ‘시야’(나 혹은 ‘비판’)을 받지만, 원문에서는 (심적 장치와 현실과의) ‘일치’를 받는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적 출발점은 이 심적 장치의 논리와 현실의 요구 사이의 본래적인, 환원불가능한, 말하자면 구성적인 불일치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바, “‘문명의 불만’이 인간적 조건을 정의하는 것은 이 불일치 때문이다.” 여기서도 ‘인간적 조건(condition humaine)’은 ‘인간의 조건’이라고 고치고 싶다. ‘인간적’은 ‘비인간적’과 쌍으로 쓰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단락의 마지막 문장: “현실에 대한 우리의 가장 ‘자연적인’ 열려 있음은 심적 장치의 본래적인 논리에 압력을 행사하는 금지들이 성공적으로 그 본래적 논리를 붕괴시키고 우리의 ‘제2의 자연’이 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에 대한 원문은 “Our most 'natural' openness to reality implies that the prohibitions which exert pressure upon the inherent logic of the psychic apparatus have successfully broken it down and become our 'second nature'.”이다. 여기서 ‘제2의 자연’은 ‘이차적 본성’이라고 하는 게 옳다. 요지는, 우리가 현실(원칙)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은 사회적 금지들이 (심적 장치의 내적 논리를 무너뜨리고) 내면화되어 이차적 본성이 되었다는 걸 암시한다는 것이다.

(23) 104쪽. 중간에 “외적 현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정신계의 매우 내재적인 기능화에는 완전한 만족에 저항적인 어떤 것이 있다.”(there is something in the very immanent functioning of the psyche, notwithstanding the pressure of 'external reality,' which resists full satisfaction.) 여기서 notwithstanding은 ‘-에도 불구하고’란 뜻이긴 하지만, 문맥상 맞지 않는다. “외적 현실이 압력이 아니더라도” 완전한 만족에 저항하는 어떤 내재적인 기능이 있다는 게 요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완전한 만족을 방해하는 건 외적 현실만이 아니라는 것. ‘매우 내재적인 기능화’는 엉뚱한 번역이다. 매우 내재적인? the very는 ‘바로 그’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24) 각주29)에서, noism을 ‘부정주의’로 NON-ideology를 ‘비이데올로기’로 옮긴 것도 다소 무신경하다. 이 대중적인 이데올로기는 문맥상, ‘금지주의’나 ‘금지의 이데올로기’라고 옮겨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명제’는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제’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저자를 뜬금없이 ‘톨스토이’라고 오역한 것은 무슨 선입견의 작용인 것인지? 무지이거나, 착각이거나.

(25) 106쪽부터 entity의 쇼가 시작되는데, 역자는 ‘실체’라고 번역하기를 꺼려하는 바람에, ‘실존체’니, ‘실재하는 단위체’(110쪽)니 하는 말들로 옮겼다. entity는 실제로 있는 것을 뜻하는데(하이데거의 ‘존재자’를 entity로 번역하기도 한다), ‘존재’나 ‘것’ 혹은 ‘실체’ 등으로 번역된다. ‘실존체’라니? 그렇게 강한/대단한 뜻을 갖고 있지 않다. 문제가 된 문장은 “대상a는 공간 속에 존재하는 실정적인 실존체가 아니다”인데, 실존체는 그냥 ‘실체’라고 하면 될 거 같다. substance와 구별해 주기 위해서 ‘실존체’라고 옮긴 것 같지만. 앞의 (23)에서 얘기됐던 ‘내재적인 기능’이 바로 이 ‘대상a’이다. 해서, 106-7쪽에서는 대상a에 대해서만 잘 이해하고 넘어가면 된다.

(26) 108쪽부터 나오는 내용은 지젝의 책에 단골로 등장하는 대목이기에(그만큼 초기 지젝에게서 핵심적이다) 중요하다. 그가 독일 관념론을 라캉 정신분석학으로 어떻게 재독해하는지 그 단초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고. ‘세계의 밤(night of the world)’에 대한 헤겔의 언명을 지젝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추상적 부정성’의 경험, 자아 속으로의 주체의 ‘정신병적’ 퇴각(세계의 밤)은 변증법적 운동의 최종적인 결과, 구체적 내용의 긍정적 접합 속에 지양되는 지나가는 계기가 아니다. 차라리 그 요점은 긍정적인 정신적 내용의 이 매우 구체적인 접합은 근본적 부정성(세계의 밤)의 일정한 존재를 취하는 형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걸 아이디어로 해서 지젝은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Tarrying with the Negative>란 책 한권을 썼을 정도이다.

두번째 문장의 원문: “the point is rather that this very concrete articulation of the positive spiritual content is nothing but a form in which the radical negativity (the 'night of the world') assumes determinate being.” 그러니까 기존의 해석에서 이 ‘근본적인 부정성’으로서의 ‘세계의 밤’이라는 건 변증법적 지양의 한 계기였을 뿐이지만, 지젝에 따르면 이 지양이라는 것, ‘긍정적인 정신적 내용의’ 구체적인 절합/분절이야말로 ‘근본적 부정성’이 취하는 한 가지 형태일 뿐이다. 이 ‘세계의 밤’의 정신분석학적 이름이 ‘죽음충동’이며 ‘대상a’이다.

positive는 ‘긍정적’ ‘실정적’으로 번역되는데, 어떻게 구별해서 써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이론서 번역에서 까다로운 부분은 한 개념어에 대응하는 우리말이 둘 이상 있을 경우이다. 가령, 여기서의 articulation은 ‘분절’도 되고, ‘절합’도 된다(‘접합’은 좀 이상하다). substance는 ‘실체’도 되고 ‘실질’도 된다. body는 ‘신체’도 되고 ‘물체’도 된다(이정우는 <의미의 논리>에서 body를 ‘신체’로 번역되어야 하는 부분까지도 전부 ‘물체’로 옮겼고, 김재인은 <천개의 고원>에서 전부 ‘몸체’로 옮겼다). 번역에서 까다로운 건 이런 단순한 개념어들이다.

(27) 이하 114쪽까지의 내용들은 앞의 진술을 부연설명하는 부분들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112쪽 중간 부분: “라캉적 정신분석학의 교훈들 가운데 하나는 - 그리고 동시에 라캉이 헤겔과 재접합하는 지점은 - ‘삶’의 유기적인 직접성과 상징적 우주 간의 근본적인 불연속성이다.” ‘라캉적 정신분석학’은 ‘라캉 정신분석학’이라고 해야 한다. ‘재접합’은 ‘재결합(rejoin)’으로, ‘상징적 우주’는 ‘상징적 세계’로 옮기고 싶다. 라캉에게서 ‘상징적 세계’란 물론 ‘언어의 세계’이며, 헤겔 또한 이 언어의 힘(지배력)을 강조한다. 그것은 유기적 ‘삶’에 대한 ‘죽음’(=로고스/언어)의 지배/통치이기도 하다.

(28) 115쪽. “그러므로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의 존재론적 지위 바로 그것에 있어서는 삶에 대한 죽음의 통치, 즉 ‘죽음충동’이 실정적인 존재치를 획득하는 형식이다.” 원문은 “What we call 'culture' is therefore, in its very ontological status, the reign of the dead over life, i.e., the form in which the 'death drive' assumes positive existence.” 오역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중요한 대목이어서 옮겨보았다. 한참을 우회했는데, 115쪽에서 지젝은 이러한 사전정지 작업을 배경으로 하여 로셀리니 영화의 ‘헤겔적인’ 교훈과 매력을 말한다. “그것들은 항상 어떤 ‘진정한’ 실체적인 삶의 그림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치 여주인공의 구원은 이 실체적인 ‘진정성’(substantial authenticity)으로 뛰어드는 그녀의 능력에 달려 있는 듯 보인다.”

(29) 117쪽부터 얘기되는 것은 ‘희생의 매혹’이다. 이 ‘희생’은 앞에서 얘기된 ‘행위’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 희생은 “큰 타자에 대한 ‘화해의 선물’”인데, 이것은 큰 타자의 욕망의 심연을 은폐한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희생의 논리는 케보이(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의 논리와 단절된다(역자는 Che vuoi? 음역/번역하지 않거나 이중으로 번역했다). 이러한 단절/저항의 주체로서 지젝이 르네 지라르(<희생양>)를 따라서 꼽는 인물이 바로 욥이다. 지젝은 욥의 희생에 논리에 대항하는 욥의 물음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윤리적 혁명”으로 묘사한다. 이하 122쪽 사랑의 논리로까지 이어지는 부분은 순조롭게 읽히며 재미있다.

(30) 123쪽. “즉 주체는 그의 상상적 자기 경험 속에서 효과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운영하는’ 의미화 메커니즘을 오인하다는 표적인 구조주의적 테제가 라캉에게 얼마나 낯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효과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운영하는”은 “effectively ‘runs the show’”의 번역이다. 구조주의의 테제란 주체의 ‘상상적 자기 경험’을 실질적인 ‘의미화 메커니즘으로서’의 구조라는 ‘큰 타자’와 대비시키는 것인데, 라캉이 보기에 그러한 ‘큰 타자’는 없다. 그것은 주체의 가정/전제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라캉의 큰 타자와 알튀세르의 큰 타자 간의 차이점이기도 하다.(<라캉의 재탄생>에 실린 ‘라캉과 알튀세르’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31) 그래서 라캉이 더 강조하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퇴각(=물러남)’이다: “큰 타자로부터의 주체의 이 ‘퇴각’이 라캉이 ‘주체적 궁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희생의 행위가 아니라 바로 그 희생을 희생시키는 포기의 행위이다. 이렇게 해서 획득되는 자유가 우리의 이웃으로서의 타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큰 타자 자체 속의 지지대 또한 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지점이다.”(124쪽) 그리고 이 자유는 해방의 정반대물이다(해방은 항상 주인으로서의 큰 타자를 상정한다). 결론적으로 로셀리니의 영화들은 이러한 자유에 관한 영화들이며, “어떤 외상적 만남의 실재와 타협하려 하지만, 궁극적으로 실패한 시도”들이다. 그리고 그의 영화들에서 이 모든 행위(act), 즉 연기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것이었다.(왜 여자는 남자의 징후인지 이젠 아셨는지?)

 

 

 

 

(32) 이 절에 대해선 이상으로 대충 마치기로 한다. 집에 갈 시간이 다 됐다. 이 절을 마감하는 각주47)에는 로셀리니 영화의 알레고리적 성격과 관련하여, 제임슨의 ‘히치콕을 알레고리화하기’란 글을 참조하라고 돼 있다. 그래서 나는 정말 그 글을 참조해 보고자 했다! 그 글은 얼마전에 번역된 <보이는 것의 날인>(한나래)에 실려 있다. 그런데, 한번 언급한바 있듯이 번역이 좀 미덥지가 못하다. 제임슨도 악문이지만, 번역문은 한술 더 뜨기에. 비근한 예로 ‘히치콕을 알레고리화하기’의 212쪽에 “라캉의 표현으로는 ‘신성하지 않은 시침들 upholstery tacks’로서 기능하는 특별한 기표들”이란 말이 나온다. 신성하지 않은 시침들? 이게 라캉의 용어라고?

라캉을 좀 읽은 독자라면, ‘upholstery’란 단어에서 대충 때려잡을 수 있는바, 이건 흔히 ‘quilting point’로 더 많이 번역되는 ‘누빔점’ 혹은 ‘고정점’이란 뜻의 어구이다. 그걸, upholstery tacks라고 낯설게 옮겨놓은 제임슨도 짓궂지만(이런 게 변증법과 무슨 관계가 있나?) 그걸 눈치없이 ‘신성하지 않은 시침들’이라고 번역해놓은 역자의 무식 또한 상당한 수준이다(요컨대, 라캉을 별로 읽어본 바 없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역자가 다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다. 부록으로 책 한권 더 준다고 해서 덥석 25,000원이나 하는 비싼 책을 사버렸는데, 이걸 어디에다 하소연해야 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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