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하 지젝은 로셀리니가 버그만을 주연으로 찍은 영화 <독일 영년>, <유럽 ’51>, <스트롬볼리> 3부작을 차례로 분석한다(유감스런 것은 내가 이들 영화들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본 버그만 주연의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가스등> 등이다). 77쪽에서는 예비적으로 <로베레 장군> 얘기를 하는데, 독일 게슈타포가 전설적인 빨치산 로베레 장군을 닮은 좀도둑에게, 레지스탕스의 기밀을 빼내기 위해서 로베르 장군 역을 시키지만, 이 좀도둑이 진짜로 로베레 장군으로서 죽는다는 내용이다(하는 수없이, 독일군은 그를 ‘로베레 장군’으로서 총살한다).

가운데 부분에서, “독일인들에게 그들이 찾는 이름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에서 ‘이름(names)’은 ‘이름들(명단)’로 복수형이 돼야 한다. 물론 이 ‘이름들’은 게슈타포가 찾는 레지스탕스 조직원들의 이름이다. 그러니 단수가 아니라 복수가 돼야 한다. 이 ‘가짜 로베레 장군’ 사례를 일컬어 지젝은 ‘상징적 동일시의 변증법’(혹은 ‘상징적 위임 떠맡기의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78쪽은 그에 대한 자세한 부연설명이다.

(5) “이러한 변증법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모든 인간 행위(성취, 실행)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행위(자세, 가장)일 뿐이라는 통념적인 지혜에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다.” 이게 요점인데, 나는 ‘자세(posture)’란 번역이 맘에 들지 않는다. 이건 가장(pretence)과 유사한 의미로서 ‘포즈’라고 옮기는 게 어떨까. 그러니까 우리의 통념적/상식적 지혜란 것은 모든 행위가 다 (진정성이 결여된) 포즈라는 것이다. 하지만, 상징적 동일시의 변증법에 의해서 이러한 지혜는 전복된다. 이어지는 문장, “우리가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성은 인격화의 진정성, ‘우리의 행위(자세)를 진지하게 취하기’가 갖는 진정성이다.”(78쪽) 이것의 원문은 이렇다: “the only authenticity at our disposal is that of impersonation, of "talking our act(posture) seriously.”(34쪽)

역자는 ‘impersonation’을 ‘인격화’라고 옮겼는데, 물론 이 단어는 ‘인격화’ ‘의인화’란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흉내’란 뜻이다. 앞의 사례에서 좀도둑이 로베레 장군을 ‘흉내’냈다고 말하지, ‘인격화’했다고 말하지 않는다(‘인격화’란 ‘사물화’와 반대되는 말로서, 말 그대로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걸 말한다). 그래서 다시 옮기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성은 흉내의 진정성, 즉 ‘우리의 (연기)행위(혹은 포즈)를 진지하게 하기’의 진정성이다.”(로베레 장군 역을 정말 진지하게 연기한 좀도둑처럼!)

여기에 붙어 있는 각주5)에 바로 나오는 것이지만, act란 말은 굉장히 다의적이다. 그것은 상상적 차원에서 fake, show, performance이고, 실재의 차원에서 doing, exertion, stroke이며, 상징적 차원에서는 edict, decree, ordinance, enactment이다. 또한 독일어에서 ‘Act’는 누드화(the painting of a nude human body)이기도 하다(영어에서도 act는 성행위란 뜻을 내포한다). 이상을 종합해서, 나는 ‘act’가 우리말로는 대략, 연기, 행위, 성행위, 법(조문)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부분에서 ‘행위’ 대신에 ‘(연기)행위’를 고른 것은 그러한 문맥을 좀 살리기 위해서이다.

(6) 79쪽부터는 본격적으로 3부작 얘기이다. 지젝은 이 세 편의 영화에는 어떤 미끼(함정)가 있다고 말한다. 당연히 세 영화에 대한 손쉬운 독해/이해를 피해야 할 것이다. “즉, 만일 우리가 ‘자연발생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지각한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것의 원문은 “if we perceive it in a 'spontaneous' way, we are inevitably led stray.”이다. 뭐가 문제냐고? 내가 맘에 안들어 하는 건, “‘자연발생적인’ 방식”이란 말이다. 번역은 단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문맥을 옮기는 것이다(더 확장시켜서 거창하게 말하면, 문화를 옮기는 것이다). 일대일로 대응하는 단어들을 옮긴다고 해서 문맥이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번역을 잘 하는 게 아닌 것은 영어실력이 이러한 문맥에 대한 이해력을 보증해 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한 여자친구가 <동갑내기 괴외하기> 같은 영화를 보고(오늘자 <씨네21>을 보니까 평론가 정성일이 이 영화 등과 ‘귀여니’ 현상에 대해서 다소 흥분한 글을 썼던데) 순진하게 받아들이며 재미있어 할 때(이 영화 정말 짱이다!), 우리는 그 여자친구가 이 영화를 ‘자연발생적’으로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넌 영화를 너무 자연발생적으로 이해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spontaneous' way”란 표현이 이 문맥에선 ‘깊은 생각(고려) 없이’란 뜻이므로, 똑같이 좀 현학적인 어휘이긴 하지만, 이럴 땐 ‘즉자적’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즉, 만일 우리가 ‘즉자적인’ 방식으로 이 영화들을 본다면, 우리는 필시 길을 잃게 된다.”(원문에서 ‘it’이 받는 건 ‘each of these films’이다.)

(7) <독일 영년>의 내용은 1945년 점령지 베를린에서 10살된 소년이 나치 교사의 영향 하에 아버지를 죽이고 방황하다가 아파트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콘크리트 폐허 더미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이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 전체가 그것을 위해 찍혔던 장면이란 물론 베를린의 폐허 속을 헤매는 에드문트의 마지막 방황과 그의 자살이다.”(80쪽) 이것의 원문은 “The scene for which the entire film was shot is of course the final wandering of Edmund in the ruins of Berlin and his suicide.”(35쪽)이다.

번역문에 내용상 하자가 있는 건 아니다. 사소한 거지만, 우리말에서 ‘그것’이란 지시대명사는 앞엣말을 받지 뒤엣말을 받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번역문은 말 그대로 번역투의 문장이다. 좋은 번역, 좀더 섬세한 번역은 그러한 (우리말로는 어색하거나 비문법적인) 번역투의 흔적을 가급적 드러내지 않는 번역이다. 해서, 나라면, “이 영화 전체의 초점은 물론 베를린의 폐허 속을 헤매는 에드문트의 마지막 방황과 그의 자살 장면에 맞추어져 있다.”라고 옮기고 싶다.

이 영화에 대한 즉자적인 독해는 한 어린 소년이 못된 교사의 사주에 의해서 (부친살해라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 그 죄의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죄지은 자가 벌받는 이야기라고 읽는 식이다). 하지만, ‘뒤집기의 천재’인 지젝은 이 에드문트의 (자살)행위를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적인 ‘충분한 지반’에도 정초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정초된 행위”로서의 ‘자유의 행위’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에서 에드문트는 ‘성자(saint)’이다.

(8) 역시 내용에는 지장이 없는 지적인데, 81쪽에서 “<독일 영년>을 만든 지 2년이 지난 다음 로셀리니는 성 프란시스에 관한 영화 <프란체스코>를 찍는다.”는 어떤가. 여기서 ‘프란시스(Francis)’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수도사 프란체스코의 영어식 표기이다. 이 번역의 우스꽝스러움은 가령, “플레이토(Plato)에 관한 유명한 영화 <플라톤>”이라고 대치시켜보면 알 수 있다. 당연히 ‘성 프란시스’는 ‘성 프란체스코’로 바뀌어야 한다. 이런 부적절한 번역은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번역에 대해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91쪽에서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영어식 ‘부카레스트’로 옮긴 데에서도 반복된다.

한편, 각주 7)에서 ‘순수 지출점(a point of pure expenditure)’. ‘expenditure’는 바타이유에게서 흔히 ‘낭비’나 ‘탕진’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하지만, ‘a point of pure expenditure’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저주의 몫>에 나올 거 같기도 하고... 이 각주의 뒷부분(82쪽)에는 ‘인디언 신민들(Indian subjects)’란 말이 나오는데, 남미의 원주민은 ‘인디언’이 아니라 ‘인디오’라고 번역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subject'도 이 문맥에서 '신민들'이라고 옮기는 것은 너무 고상해 보인다. 해서, 나라면 '피지배 인디오들'이라고 옮기고 싶다.

(9) 82쪽 본문 맨아래줄. “모든 ‘병리적’ 동기화로부터 구출된 의지”에서 ‘구출된(delivered)’은 ‘해방된’으로 옮기고 싶다. 이후에 85쪽까지는 별 문제 없이 읽힌다. 84-5쪽에서 지젝은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이 어째서 히치콕의 <로프>보다 뛰어난 작품인가를 해명한다. <독일 영년>의 상황에 대입시켜서 말하자면, <로프>는 소년을 사주한 나치 교사에 대해서, “그러니까 애들한테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라는 교훈을 제시하는 정도에 머문다는 것. 때문에, <로프>에는 ‘자유의 지점(point of freedom)’이 결여돼 있다.

(<유럽 ’51>부터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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