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름슬레우를 다룬 글에서 미루어 두었던 숙제를 해치우기로 한다. 검토의 대상은 <그라마톨로지>(민음사)에서 옐름슬레우와 관련된 대목들이다. 2장 ‘언어학과 문자학’ 중 115-121쪽.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몇몇 부분을 예로 들고 문제점을 지적해 보겠다. 내가 참고한 것은 스피박(G. Spivak)의 영역본 'Of Grammatology'(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6)이다.



먼저, 115쪽 하단부: “정의상 언리소는 비물질적이며 물질적인(음성적, 문자적 등) 실체(또 의미적, 심리적, 논리적인 실체)와 독립되어 있다.” 이 대목은 괄호가 잘못 쳐져 있는데, “정의상 언리소는 비물질적 실체(의미적, 심리적, 논리적), 물질적 실체(음성적, 문자적 등)와 독립적이다.”로 고쳐져야 한다. 이어서 “우리가 위에서 제안했듯이, 소리와 의미의 단위는 여기서 놀이의 확실한 폐쇄이다.”/ “The unity of sound and of sense is indeed here, as I proposed above, the reassuring closing of play.”(57쪽)

바로 이전에 얘기되고 있는 것은 엘름슬레우의 언리학(Glossemantics) 개념들이 갖는 특징으로서의 형식성(formality)이다. 이에 따르면, “소리와 언어 사이에는 아무 연계성”이 없다.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 ‘유희’이다. 이것은, 소쉬르식 용어를 쓰자면, 기표와 기의간의 안정된 결합이 유예되면서, 즉 기표가 미끄러지면서 벌어지는 유희이다. 그런데, 소리라는 단위나 의미라는 단위는 자연스레 그들간의 안정적인 결합을 가정하면서 이러한 유희를 중단시킨다. 해서, “우리가[내가] 앞에서 주장한 바 있듯이, 소리 단위와 의미 단위는 정말로 그러한 유희를 확실하게 중단시킨다[는 뜻을 갖는다].”(난 처음에, ‘소리와 의미의 결합’이라고 봤는데, of가 양쪽에 걸린 걸로 봐서는 각각의 단위로 해석돼야 할 듯하다. 그럼에도 ‘the unity of sound and sense’라고 해석하면 더 이해하기 편하다.)

다음, 옐름슬레우로부터의 인용: “...그러나 어느 경우든 현대 언어학이 인지하듯 통시적 고찰은 공시적 기술에 대해 변별적이지 못하다.”(118쪽) 변별적이지 못하다라는 말은 구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통시적 고찰=공시적 기술’이 되는가? 문맥으로 봐서, 통시적 고찰은 공시적 기술(description)과 ‘무관하다’고 옮겨져야 한다(영역은 A are irrelevant for B 구문이다).

이어지는 언어학자 울달 인용문. “...왜냐하면 형식과 실체의 차이라는 개념 덕분에 우리는 언어와 문자가 대체로 유일하고 동일한 언어 표현들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for it is only through the concept of difference between form and substance that we can explain the possibility of speech and writing existing at the same time as expressions of one and the same language.”(58-9쪽)

문제는 speech를 ‘언어’라고 옮긴 것.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건,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이다. 따라서 ‘언어와 문자’는 ‘음성과 문자’로 고쳐져야 한다. 다시 옮기면, “왜냐하면 형식과 실체라는 서로 다른 개념 덕분에 우리는 음성과 문자가 각각 같은 언어에 대한 동등한 표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지는 부분: “만약의 공기의 유출 또는 잉크의 유출, 이 두 가지 실체 중 하나가 언어 자체의 일부분이라면 언어를 바꾸지 않고 이 둘 중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If either of these two substances, the stream of air or the stream of ink, were an integral part of the language itself, it would not be possible to go from one to other without changing the language” 여기서 ‘공기의 유출’은 ‘음성(언어)’이고 ‘잉크의 유출’은 ‘문자(언어)’이다. 잘못 옮긴 건, ‘일부분이라면’이라고 한 것. 완전히 반대로 옮긴 것인데, ‘전체라면(integral)’으로 옮겨야 한다. 그래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다시 옮기면, “만약에 공기의 유출[음성]이나 혹은 잉크의 유출[문자]이라는 이 두 가지 실체 중 어느 하나가 한 언어의 전체라면, 그 언어를 바꾸지 않고 한 실체에서 다른 실체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즉 L1(언어1)=S(음성)이거나 L2(언어2)=W(문자)라면, 당연히 S에서 W가 교호하기 위해서는 두 개 이상의 언어(L1, L2)가 필요하다. 이건 형식논리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옐름슬레우와 그의 코펜하겐학파가 소쉬르처럼 음성언어에만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 문자언어 혹은 표기적(graphic) 표현-실체에 의존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개방한다는 것. 이들은 음성과 문자에 표현적 실체(substance of expression)로서의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 그들은 서로 독립적이며 서로를 대신할 수 없다.

해서, “언리학은 문학적 요소에 대한 접근과 문학에서 형식의 놀이와 규정된 표현 실체를 연결하는 문자로 표기된 텍스트로 통하는 것에 대한 접근을 지칭한다.”(120쪽 두번째 문단) 이건 우리말로 너무 심하지 않을까? 영역은 이렇다: “It[Glossemantics] showed how to reach the literary element, to what in literature passes through an irreducibly graphic text, tying the play of form to a determined substance of expression.”(59쪽)

다시 옮기면, “언리학은 (문학의) 이 ‘문자적’ 요소, 즉 문학에서 ‘형식의 유희’[기표의 유희]를 규정된 표현 실체[의미]에 연결시켜 주는, 이 환원불가능한 표기 텍스트를 관통하고 있는 그 무엇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literary를 ‘문학적’이 아닌 ‘문자적’으로 옮겼다. 이탤릭체로 강조돼 있는 것이 그것의 어원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문(文)적’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색하기에 ‘문자적’이라고 해둔다.

데리다는 이 문자적 표기에는 텍스트의 ‘의미’(현전으로서의 음성)로 다 환원될 수 없는 요소가 있다고 보며 옐름슬레우와 코펜하겐학파의 언리학은 이를 이론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코펜하겐학파가 루소나 소쉬르와 달리 문학에 관심을 나타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의 작업을 더욱 전면화(radicalize)한다.

“따라서 문학사나 문학 텍스트 일반의 구조에서 이 심급을 벗어나는 것은 일정한 기술 유형을 필요로 할 가치가 있는데, 언리학이 아마 그 규범과 가능성 조건을 최상으로 도출시켰을 것이다.”(121쪽)/ “That which, within the history of literature and in the structure of a literary text in general, escapes that framework, merits a type of description whose norms and conditions of possibility glossemantics has perhaps better isolated.”(59쪽)

오포야즈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의 문학성(being-literary; literariness), 혹은 ‘문학적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면서, 음운론적 심급을 특권화하고, 그것이 지배적인 시문학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코펜하겐 학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시만이 아닌) 문학 전반의 ‘문학성’의 탐구에 관심을 두며, 이때 언리학이 요긴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 해서, 다시 옮기면, “문학사나 문학 텍스트의 일반 구조에서 (형식주의자들의) 이론적 틀을 벗어나면서도 그 규범과 가능성의 조건을 하나의 유형으로 기술할 필요가 있는, 그러한 유형을 언리학은 보다 잘 도출시켜 왔다.” 약간 의역을 했는데, isolate의 번역이 좀 까다롭다.

계속. “아마도 이렇게 해서 언리학은 문학 테스트의 구조와 문학성의 문학적 생성사에서, 특히 <근대성>이라는 개념에서 순전히 문자 표기적인 성층을 연구하는 데 최상의 준비를 해온 것이다.”/ “It has perhaps thus better prepared itself to study the purely graphic stratum within the structure of the literary text within the history of the becoming-literary of literality, notably in its 'modernity.'”

불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literality는 '문학성'이 아니라 '문자성'이다. 다시 옮기면, “언리학은 문자성이 점차 문학으로 생성되어 가는 역사, 특히 그 ‘근대성’의 역사 속에서 문학 텍스트의 구조 안에 들어 있는 순전히 표기적인 층위에 대한 보다 나은 연구를 준비해 왔다.”

이어지는 문단들도 읽기에 불편한데, 하여간에 이런 식으로 계속 읽어나가야 한다...



덧붙임: 앞에서 약간 의역했다고 한 부분에 대한 러시아어판 번역(Laputsky옮김, 2000)을 우리말로 옮기면, "문학사와 문학텍스트의 구조에서 음성과 무관한 것은 다른 설명을 요구했고, 그것의 규범과 가능조건에 대해서는 특히 언리학이 분명 더 잘 밝혀주었다."(185쪽) 더 간명하게 번역돼 있는데, 이해하기도 물론 더 쉽다.(여기서 다른 설명이란 건, 음운론과 시에 집중했던 형식주의와는 다른 설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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