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안되는 분량을 두고 오래 뜸을 들이는 것도 별스러운 것이어서 마저 해치우기로 한다. 우리가 가장 바쁠 때 가장 많은 일을 한다는 속설에 의지해 보면서. 어제는 프로이트-라캉 카페에서 소개받은 지젝 관련 글을 읽었는데, 지젝의 근황과 최근의 사생활이 비교적 자세하게 드러나 있어서 흥미로웠다. 지젝을 이해하는 데, 아니 이해하기 시작하는 데 아주 요긴해 보이는데, 나중에 시간이 되면 미친 척하고 요약/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아니, 그 전에 찾아서들 읽어보시면 되겠고, 어느 분이 먼저 요약/정리해주시면 더욱 좋겠지만...
-데리다 인터뷰로 넘어와서, 대담자의 다음 질문은 좀 어리숙하다(독자와 눈높이를 맞추는 것인지). "지식과 지혜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그 둘은 서로 이질적이지 않습니다." 이건 원문의 "They aren't heterogeneous."를 그대로 옮긴 것인데, 아무래도 논리상 맞지 않는다. 뒤에 나오는 내용을 고려해 보건데, '그 둘은 서로 이질적입니다'가 돼야 할 거 같다. 아마도 녹음된 구어를 옮기는 과정에서 오타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They are heterogeneous."라고 말했을 것이고, 그래야 말이 맞다. 데리다의 영어발음이 부정확했거나 필사자의 청력에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해서 이어지는 대목은, "그래서 당신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 아무런 지혜도 갖지 못할 수 있습니다." 번역하면서 계속 께름직했는데, 결론은 오타일 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 "지식과 행위 사이에는 심연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심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가능한 한 더 많이 알고자 하는 노력이 방해받는 건 아닙니다. 철학, 즉 필로소피아는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필리아가 사랑이고 소피아가 지혜죠. 따라서 지혜에의 의무가 바로 철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전적으로 지식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가능한한 많은 것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결정의 순간에 내가 가진 지식으로부터 어떤 비약을 감행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지혜가 문제되는 건 행위이다. 즉 지식과 행위(지혜를 필요로 하는) 사이에는 심연이 있고, 철학은 그 지혜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주장이다, 고 나는 생각한다.
-지식과 지혜에 대한 이런 얘기는 좀 고리타분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목들은 재미있다. 그리고 데리다의 '사생활'이 조금씩 내비친다. "1967년에 출간한 책들 덕분에 당신은 더 행복해졌습니까?" 나로선 좀 예기치 못한 질문이다.
-"내가 더 행복해졌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데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나는 매우 활동적이고 정력적으로 살아왔습니다. 만약에 내가 20세때 누군가 지금 나이인 72세에 내가 무얼 하고 있을지 말해줬다면, 나는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 나는 아주 병약했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반에 반만 하더라도 쓰러졌을 겁니다. 그 작업(책)이 얻어낸 호응이 내게 지금과 같은 에너지를 준 것이죠. 사람들은 저와 제 작업을 관대하게 대해주었습니다. 만약 그런 관대함이 없었더라면 확신하건데, 나는 진작에 주저앉았을 겁니다."
-그 다음 뜬금없는 질문. "왜 여성 철학자는 없는 걸까요?"(그런데, 왜 여성 대법관은 없는 겁니까?) 페미니즘에 대한 데리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질문이다.
-" 왜냐하면 철학적 담론이란 건 자체가 여성과 아이들, 동물과 노예 들을 주변화하고, 억압하고, 침묵시키는 방식으로 조직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철학적 담론의 구조입니다. 그걸 부인하는 건 어리석은 것이죠. 따라서 당연히 위대한 여성 철학자는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위대한 여성 사상가들은 있었지만 말이죠. 하지만, 철학이란 건 여러 사고양식 중에서 대단히 특별한 사고양식의 하나(일뿐)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변화되어 가는 역사적 국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건 거창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의 많은 저작들이 남근중심주의의 해체와 관련돼 있습니다. 자화자찬하자면, 나는 그러한 문제를 최초로 철학적 담론의 중심에 놓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나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종식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한 억압은 특히 남근중심주의의 철학적 근저에 끈질기게 남아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나는 페미니즘 문화의 동맹군입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몇몇 선언적인 주장들에 대해서는 유보적입니다. 단순히 위계를 뒤엎는다든가 관습적으로 남성적인 행동으로 간주돼 왔던 가장 부정적 측면들을 여성들이 전유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저작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오해는 무엇입니까?"
-"그건 나를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텍스트는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회의적인 니힐리스트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그러한 오독은 35년전에 시작되었고 이젠 깨뜨리기도 어렵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언어적이며 우리가 언어에 갇혀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나는 정반대를 말해왔습니다. 그리고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해체는 모든 것이 언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러한 철학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내 책을 주의깊게 읽은 독자라면 내가 긍정과 신앙을 고집스레 주장하며, 내가 읽은 텍스트들을 전적으로 존경한다는 점을 이해할 겁니다."
-"타자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살인의 충동을 제거할 수 있을까요?"
-"살인충동은 제거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물로서의 인간(human animal)의 한 부분이니까요. 동물로서의 인간은 잔인하며, 타자의 고통으로부터 쾌락을 얻습니다. 그건 제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살인에의 권리는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철학과 사유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입니다. 즉 이 제거될 수 없는 충동을 제어하는 것이죠. 잔인성과 공격성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을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변형시킬 수는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쓸 때 그러한 활동엔 공격성도 한 요소가 됩니다. 그러나 나는 그 공경성을 뭔가 유용한 것으로 변형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죠. 공격성은 살인보다 흥미로운 어떤 것으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당신은 실제로 살인하지 않고도 죽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도 나는 타자를 (다른 방식으로) 죽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격적이라는 것은 그렇게 천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조훈현이나 유창혁의 공격바둑을 생각해 보라. 박지은의 공격적인 드라이브샷, 전성기 박찬호의 공격적인 피칭, 홍세화나 박노자의 공격적인 글쓰기 등등...)
-"영토나 소유권 등의 개념들이 인간들간의 갈등의 뿌리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관념들은 어디에서 유래하며, 왜 우리는 그런 것에 집착하는지요?"(이건 달라이라마에게 질문해야 하는 거 아닐까?)
-"수세기동안 도시는 교역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과 더불어 이젠 더이상 그렇지 않죠. 장소의 정치학은 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소란 여전히 중요합니다. 한 친구가 최근에 이런 말을 하더군요. 오늘날 탈영토화하거나 가상화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건 예루살렘과 석유이다, 라고요. 자본주의 국가들은 석유에 의존해 살고 있습니다. 비록 그런 상황이 변화할 수는 있지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석유가 고갈된다면?) 모든 사회가 붕괴될 것입니다(이 부분의 번역은 원문을 확인해 주셨으면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석유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건 유럽보다도 미국에서 더 큰 문제입니다. 모든 것이 항상 미국에서는 더 문제가 됩니다. 거기엔 분명한 이유들이 있고요."
-"과거가 사람들에게 쉽게 고통이나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지요?"(이 또한 멍청한 질문에 속한다.)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내 경우엔 다행스럽게도 나는 과거와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조차도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꺼이 나의 삶을 반복하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정확이 일어났던 그대로 끝없이 반복되는 걸 수용할 수 있습니다. 즉 영원회귀를 말이죠."(답변은 똑똑하다.)
-"요즘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우문의 퍼레이드다.)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적이고, 공적이고, 정치적인 일들이 나에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과 함께 끊임없이 의식하는 건 내가 늙어가고 있고, 내가 죽을 거라는 사실입니다.(영화 <데리다>에도 나오는 그의 백발과 눈가의 주름들을 떠올려 보라.) 인생은 짧습니다. 나는 항상 내게 남아있는 시간들에 민감합니다. 그리고 비록 이건 내가 어릴 때부터 죽 그래왔던 성향이긴 하지만, 72세가 되면 문젠 좀 심각해집니다. 아직까지는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거 같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자각이 나의 모든 사유에 침윤돼 있습니다.(누군가의 표현을 빌면, 후기 데리다는 상당히 실존주의적이다.) 세상 돌아가는 일들이 끔찍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내 마음속에서도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나의 죽음의 충격(terror)에 비해 주변적(alongside)입니다."(우리도 72세가 된다! 될까?...)
-드디어 마지막 질문. "당신은 언제 어른이 되었습니까?"(정말 엉뚱하고 기발한 질문이다. 내가 읽은 어떤 인터뷰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질문!)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나는 항상 사람들은 하나 이상의 나이를 가진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세 가지 나이를 갖고 다닙니다. 내 나이 스무살때, 나는 내가 이미 늙었고 너무 현명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지금(일흔 둘)은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집니다. 여기엔 멜랑콜리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마음속으론 아직 젊다고 느끼지만, 나는 객관적으론 내가 더이상 젊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내가 가지고 다니는 세번째 나이는, 이건 내가 프랑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건데, 내가 막 책을 출간하기 시작하던 나이입니다. 그때가 35세, 서른 다섯이었습니다. 나는 마치 내가 한창 작업하던 때의 문화적 환경(cultural world) 속에서 35세로 멈춰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죠. 왜냐하면, 나는 많은 분야에서, 좀 많은 책을 출간한 늙고 저명한 철학자로 간주되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내가 이제 막 책을 출간하기 시작한 신출내기 저자처럼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글쎄, 꽤 전도유망한 녀석이군.""
마지막 질문에 대한 데리다의 답변은 감동적이다. 여러 시간을 이 인터뷰 번역에 쏟아부은 것도 이 마지막 답변을 여러 사람과 같이 읽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는지 모른다. 이 인터뷰의 원래 제목도 '자크 데리다의 세 가지 나이(The Three Ages of Jacques Derrida)'이다. '데리다의 사생활'이란 타이틀이 크게 빗나간 거라곤 생각지 않지만.
영화 <데리다>에서 데리다는 나이가 들면서 같이 늙어가는 '손'과 나이를 먹지 않는 '눈'에 대해서 아주 흥미로워하는 듯한 표정(그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이야기한다)으로 얘기한 바 있다. 그 데리다가 이젠 73세, 일흔 셋이다. 103세까지 장수했던 가다머에 견주면, 아직 30년의 세월이 남았다. 그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