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를 찢어버려라!
이번주 시사IN의 '10월의 책꽂이'에 실린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몇달 전 책이긴 한데, 임지현 교수의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휴머니스트, 2010)에 대한 글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지난 6월쯤에 이달의 주목할 만한 책의 하나로 추천하지 않았던가 싶다. 서평은 좀 밋밋하게 나갔지만, 책은 더 흥미로운 대목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시사IN(10. 10. 09) "국경에 갇힌 국사 책은 찢어버려라"
“역사 교과서를 찢어버려라!”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국사 해체론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역사학자 임지현 교수가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편지>의 서두에서 던지는 도발적인 주장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시간에 교과서를 깨끗이 찢어버리라고 권유하는 장면을 그는 역사수업 시간으로 그대로 옮겨놓고자 한다.

무엇이 문제라고 보는 것인가. 제대로 된 교육이라면 국가가 요구하는 규범이나 기준을 의문시할 수 있는 비판적인 안목을 키우는 게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은 오히려 그러한 규범과 기준이 옳다고 암기하도록 강요만 하는 판이니 교육이라기보다는 도그마 주입에 불과하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그래서 ‘우리’, ‘우리나라’, ‘우리 민족’ 등의 주어와 ‘해야 한다’, ‘해야 할 것이다’ 같은 규범적 진술들로 이루어진 역사 교과서에 대신에 그는 20세기의 역사적 인물들과 역사가, 그리고 동료 시민들에게 부치는 ‘세계사 편지’를 내민다. 우리가 어떤 역사를 살았고, 그 역사적 진실은 어떠하며 그것이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명석하면서 비판적인 성찰을 통해 일러준다. 저자가 띄운 편지의 수신인 가운데는 에드워드 사이드나 한나 아렌트 같은 지식인도 포함돼 있지만 권력을 전횡한 독재자와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나치돌격대를 지휘했던 헤르만 괴링에게 부친 편지에서 저자는 홀로코스트가 나치의 고유한 발명품이 아니라 유럽 식민주의 폭력과 식민지 전쟁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며, 무솔리니에게 건네는 편지에서는 국가 사회주의와 우파 개발독재가 어떻게 동거했는가를 짚는다. 김일성 주체사상의 골자가 버마사회당의 당 강령과 아주 흡사하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런 주의주의(主意主義)적 해석이 실상은 레닌 이래 제3세계 사회주의의 일반적인 특징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란 구호가 결국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동원의 논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잊지 않는다. 또 북한 체제가 사회주의의 외투만 걸친 극우 독재에 가깝다는 지적은 남과 북의 독재자 박정희와 김일성을 ‘적대적 공범자’로 묶게 해준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박정희에 대하여 “80년대 주체사상에 경도된 애국청년학생들을 키운 건 8할이 당신의 유산”이라고 힐난하는 대목도 억지가 아니다. 저자는 체게바라에 대해서는 혁명에 대한 헌신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똑같은 헌신성을 민중에게 요구한다면 또 다른 압제라고 지적한다. 그가 공감을 피력하는 쪽은 "혁명은 새로운 정치집단이나 사회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작동방식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지도자 마르코스이다.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고정관념으로부터 탈피하도록 이끄는 이러한 성찰과 재평가의 바탕에는 ‘국사 패러다임’을 넘어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아직도 ‘한국사’를 ‘국사’로 가르치고 배우는 우리 역사 교육의 가장 공고한 고정관념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경에 갇혀 있는 우리의 상상력을 민족주의의 주술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한 ‘새로운 역사’가 아니라면 역사 공부를 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이 ‘새로운 세대’에게 건네는 저자의 충고다.
10. 10.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