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키워드>(민음사, 2010)는 두 주쯤 전에 나온 책인데, 이번주에 리뷰기사들이 올라오고 있다. 문화연구를 위한 요긴한, 필수적인 기본어휘 사전이다. 기본교양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줄 만한 책.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두 주 전에 구입해놓고 아직 펼쳐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 기사다.
한겨레(10. 10. 02) 같은 말 쓰는데 왜 말이 안 통하는 걸까?
영국의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1921~1988·사진)는 현대적 의미의 ‘문화 연구’를 창시한 사람으로 불린다. 문화라는 다소 모호한 분야를 연구와 비평의 대상으로 삼아 평생 천착했다. 마르크스주의 영향을 짙게 받았고 젊은 시절 한때 공산당에도 가입했던 그는 케임브리지대학 재직 시절에 스튜어트 홀, 테리 이글턴 같은, 나중에 자신을 이어 문화 연구·문화 비평의 대표자가 될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번에 처음 번역된 <키워드>(1976)는 <문화와 사회>(1958), <기나긴 혁명>(1961)과 함께 그의 대표작이다.
웨일스 지방의 철도노동자 아들로 태어난 윌리엄스는 케임브리지대학에 진학한 뒤 2차대전 중에 징집됐다가 전쟁이 끝난 뒤 복학했다. 그가 군대에 있었던 기간은 4년 반이었는데, 이 공백을 거쳐 대학에 돌아온 뒤 적잖은 혼란을 겪었다.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는데, 전쟁 전의 케임브리지 분위기와 제대 후 대학 분위기가 아주 달랐던 것이다. 윌리엄스가 받은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왜 같은 말을 쓰는데 서로 다른 말을 쓰는 것 같이 느껴지는 걸까? 이 의문 속에서 윌리엄스가 포착한 것이 문화였다. 문화가 바뀌었던 것이다! 그는 그 문화 현상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변화하는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10여년의 연구 끝에 나온 결과물이 <문화와 사회>였다. 여기서 윌리엄스는 1780년부터 1950년까지 문화 변화의 역사적 지도를 그려냈다. 윌리엄스는 문화 연구를 좀더 진척시켜 3년 뒤 다시 <기나긴 혁명>을 펴냈는데, 여기서 ‘기나긴 혁명’이라는 모순어법으로 그가 지목한 것이 ‘문화혁명’이었다. 그가 보기에 근대 세계는 민주주의 혁명, 산업혁명 외에 제3의 혁명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바로 문화혁명이다. 문화혁명은 수백년의 장구한 시기에 걸쳐 근본적 변화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기나긴 혁명의 과정 속에 살고 있으며, (…) 그것은 인간과 제도를 변혁시키는 진정한 혁명이다.”
<키워드>는 완결되기까지 30년이 걸린 저작이다. 윌리엄스는 <문화와 사회>를 완성한 뒤, ‘문화’라는 단어를 포함해 핵심 어휘들을 설명하는 어휘집을 부록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편집 과정에서 부록이 빠지고 말았다. 윌리엄스는 그 후 20년 동안 더 많은 용례를 수집하고 자료를 축적했다. 그리하여 어휘 130개를 추려 정리한 결과가 이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문화와 사회의 어휘집’인데, “사회적·문화적 논의의 핵심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어휘들이 어디에서 기원해 어떤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그 역사를 보여준다.
이 책에는 문학·미학·표상·무의식·자유주의 같은 비교적 논란이 적은 어휘도 있지만, 계급·민주주의·평등 같은, 사회적 갈등을 안고 있는 어휘도 있다. 윌리엄스가 특히 주목하는 것이 이렇게 해석의 진폭이 큰 단어들이다. 이런 단어들은 사전을 찾아본다고 해서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런 말들은 개인의 신념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 말의 용법과 역사를 잘 이해하지 않으면 편견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경우는 대개 이런 어휘들을 구사할 때다. 불통의 원인이 되는 말들을 역사적으로 살핌으로써 소통의 장을 마련해보겠다는 뜻이 이 어휘집에 담긴 셈이다.
이렇게 사용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는 단어 중 하나가 ‘이데올로기’(ideology)다. 1796년 ‘정신의 철학’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신조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이 단어의 시작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널리 보급한 사람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나폴레옹은 민주주의 옹호자들을 “인민에게 주권 행사의 능력이 없는데도 그들을 주권자의 자리로 끌어올리려 현혹하는 무리”라고 비난하면서 이들의 주장을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이렇게 하여 ‘공론’(空論)이란 뜻의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퍼졌는데, 그 경멸적인 의미를 받아 쓴 진보주의자들이 마르크스·엥겔스였다. 두 사람은 <독일 이데올로기>(1845~1847)에서 독일 급진파 사상들이 역사의 실제 과정으로부터 괴리됐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썼다. 현실을 거꾸로 이해하는 허위의식이라는 뜻이었다. 이 경우 이데올로기의 반대어는 ‘과학’이다.
마르크스는 다른 곳, 이를테면 <정치경제학 비판 서설>에서는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물질적 과정에 대응하는 관념 체계라는 다소 중립적인 의미로 쓰기도 했는데, 이런 용법은 특히 뒷세대 레닌의 저작에서 두드러졌다. 레닌은 이데올로기를 계급적 토대와 조응하는 관념 체계로 이해해,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경우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보다 더 올바르고 진보적이고 진실하다. 윌리엄스는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이렇게 두 가지로 쓰이고 있지만, 대개의 경우엔 나폴레옹적 의미로 통용된다고 말한다. 자유주의 진영에서 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나폴레옹 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모욕하는 말이다.”(고명섭 기자)
10. 10. 02.
P.S.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책은 다수 번역돼 있다. 주저로 거명된 <문화와 사회>(이화여대출판부, 1988)까지 포함해서. 이미 절판된 지 오래인 것이 흠이다.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된 건 <이념과 문학>(문학과지성사, 1982)인 듯싶은데, 원제는 <마르크스주의와 문학>이다. '마르크스주의'란 말을 서명에 쓸 수 없었던 시대상의 반영이다. 이 책은 다른 역자에 의해 <문학과 문학이론>(경문사, 2003)으로 번역됐다가 원래의 제목을 찾아 <마르크스주의와 문학>(지만지, 2009)으로 다시 나왔다. <키워드>도 나온 김에 엊그제 구입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