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에서

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어제 오전에 쓴 글인데,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의 한 대목을 다루고 있다. 시중에는 세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밑바닥>(동천사, 2005)은 영어본을 옮긴 중역본이며 기억에 번역이 좋지 않았다. 이 글에서의 인용은 <밑바닥에서>(지만지, 2008)와 <밤주막>(범우사, 2008)을 근거로 한 것이다.  

한겨레(10. 09. 25) 결론은 인간이 위대하다는 거야 

만년에 요양중인 톨스토이에게 고리키가 찾아가 자주 대화를 나누곤 했다. 하루는 <밑바닥에서>를 읽어주었는데, 주의 깊게 듣고 난 톨스토이의 평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기교적이라고 말하면서 좀더 단순하게 쓸 것을 주문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는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그렇게 해서는 독자들이 그들을 기억할 수 없어.” 



톨스토이에게선 탐탁잖다는 평을 들었지만 <밑바닥에서>(1902)는 고리키의 가장 대표적인 희곡이다. 국내에는 <밤주막>이란 제목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 작품에는 빈민 합숙소를 배경으로 다양한 군상의 ‘밑바닥 인생’이 등장한다. 합숙소의 주인과 안주인, 자물쇠공과 그의 병든 아내, 만두장수, 모자장수, 구두수선공, 남작과 배우, 그리고 여러 무직 부랑자가 그들이다. 치정에 얽힌 살인과 비관자살로 이야기는 마무리되지만, 작품의 이념적 핵심은 ‘인간에겐 얼마만큼의 진실이 필요한가’란 문제다. 혹은 고리키 식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물음이다.

작품에서 순례자 노인 루카는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위로의 거짓말’을 남기고 떠난다. 폐병으로 죽어가는 여인에게는 죽음 이후에 안식이 있다고 일러주고, 알코올 중독자에겐 병을 치유해주는 자선병원이 생겼다고 말한다. 사랑에 빠진 청춘남녀에게는 ‘황금의 시베리아’로 도망가서 살라고 충고한다. 물론 그의 거짓말은 현실에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는 단지 나약한 사람들을 동정하여 거짓말로라도 위로하고 싶었을 뿐이다. 반면에 전신기사 출신의 사틴은 거짓말은 노예나 주인의 종교일 뿐이며 스스로가 주인인 자에겐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인간의 신은 진실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연 인간이 진실을 견딜 만큼 강하고 자유로운가이겠다. 현재의 인간이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사는 거요?”란 사틴의 질문에 루카는 ‘더 나은 사람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야 사람들은 더 나은 인간을 위해 사는 거지”라고 직역될 수 있는 대목을 두 종의 우리말 번역본은 각기 이렇게 옮겼다. “그야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살고 있는 거지!”(<밑바닥에서>·지만지)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낳기 위해 사는 거야!”(<밤주막>·범우사) 전자의 번역에서 ‘보다 나은 삶’을 ‘후세의 삶’으로 본다면 두 가지 해석은 대동소이하지만, 자신의 ‘미래의 삶’으로 본다면 초점이 달라진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전자가 “누구나 자신을 위해 살다 보면 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라고 옮긴 문장이 후자에서는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낳기 위해 살지!”라고 옮겨졌다. 원문에 더 가까운 것은 후자 쪽인데, 이 대목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영향도 내보인다. 알다시피, 니체는 결혼을 “당사자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 하나를 산출하기 위해 짝을 이루려는 두 사람의 의지”라고 정의했다.    


 
물론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이 어떤 사람이고, 왜 태어났으며,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도, 더 많은 혜택을 줄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 사틴의 주장이다. “인, 간! 인간은 위대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름인가! 인, 간! 인간을 존중해야 해!”란 그의 외침은 ‘인간’을 언제나 대문자로 쓴 고리키식 휴머니즘의 최대치를 표현해주고 있다. 

10. 09. 24.  

P.S. 본문에서 톨스토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고리키가 쓴 회고록 <톨스토이와 거닌 날들>(우물이있는집, 2002)에서 인용한 것이다. <밑바닥에서>가 영어본 제목을 옮긴 탓에 <더 낮은 심연>이라고 돼 있다. <밑바닥에서>에 대한 톨스토이의 평은 이렇게 이어진다.  

"자네 이야기의 늙은이는 공감이 가지 않아. 어느 누구라도 그가 선량하다고 믿을 수 없어. 배역들은 좋아. <계몽의 열매>를 아는가? 거기 나오는 내 요리사가 자네 배우보다 낫네. 희곡을쓰는 것은 어려워. 그렇지만 창녀들은 괜찮군. 바로 그래야 해. 그런 여자 많이 아는가?"(104쪽) 

'늙은이'는 '루카 노인'을 가리킬 것이다. 평생 거짓을 혐오해온 톨스토이니만큼 '위로의 거짓말'에 부정적인 것은 예상할 수 있는 바다. 인용문을 러시아어 원문과 대조해보니 두 군데가 오역인데, 먼저 "배역들은 좋아"는 "배우는 좋아"라고 해야 맞다. '배우'는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살하는 등장인물이다. 그리고 <계몽의 열매>는 톨스토이 자신의 희곡이며 거기 등장하는 "내 요리사가 자네 배우보다 낫네"는 "내 요리사가 자네 배우를 닮았네"를 잘못 옮긴 것이다. 영역본 자체의 문제일까. 한편, <밑바닥에서>의 이념적 주제는 좀더 복합적인데, 자세한 해명은 이강은 교수의 <막심 고리끼>(경북대출판부, 2004)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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