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나온 중량감 있는 책 두 권은 중국공산당의 전 총서기 자오쯔양의 비밀 회고록 <국가의 죄수>(에버리치홀딩스, 2010)와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의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 2010)이다. 욕심은 굴뚝 같지만 당분간은 읽을 시간을 못 낼 것 같다. 일단은 리뷰기사를 챙겨놓고 '길게' 봐야겠다...
한겨레(10. 05. 29) 노정치가의 ‘천안문’ 회억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탱크 앞을 가로막는 동영상, 그리고 청년들 앞에서 확성기를 들고 연설하는 자오쯔양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빛바랜 사진 한장. 1989년 6월 중국 베이징에서 있었던 ‘그 사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미지다. 그 사건은 중국 한쪽에선 여전히 천안문(톈안먼) 폭동으로 또 한쪽에선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라고 불린다.

지난해 홍콩과 미국 등에서 출간된 자오쯔양의 회고록은 순식간에 매진이 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중국군의 탱크와 총칼이 광장을 휩쓴 1989년 6월4일 이후 2005년 숨질 때까지 가택에서 연금생활을 했던 노 정치가는 2000년 무렵 30개의 테이프에 몰래 육성을 녹음해 미국으로 반출했고, 자신의 비서 바오퉁의 아들 바오푸 등이 이를 글로 옮겼다.
자오쯔양의 회고에 따르면 89년 ‘혼란’의 전환점은 4월26일 <인민일보>에 게재된 사설이다.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하고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는 제목의 이 사설은 4월15일 후야오방 서거를 계기로 추도식에 모여 부패 해결 등을 요구하던 학생과 시민들을 순식간에 반동분자와 체제전복세력으로 낙인찍어 버렸고, 인민들의 분노를 들쑤셨다. 자오쯔양은 북한 방문에서 돌아온 뒤 이 사설을 수정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하지만 몇 번이나 그의 개별 면담 요청을 거부하던 덩샤오핑은 5월17일 상임위원들을 소집해 계엄선포를 결정해 버린다. 3 대 2로 계엄이 결정됐다던 당시 회의가 사실은 어떤 투표도 없었다는 것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상황이 회고록엔 낱낱이 증언돼 있다.
리펑 등으로부터 학생 시위 확산의 책임자로 몰렸던 그는 19일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시위를 벌이고 있던 학생들을 찾아간다. “내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너무 늦게…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아무 상관없어요. 여러분 같은 젊은이들이 큰일이지…여러분들의 요구는 언젠가 받아들여질 겁니다.” 이 연설은 그의 마지막 공개 연설이었다. 반역과 영웅, 극단적으로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지만 정작 자오쯔양은 자신이 공산당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당을 진정으로 위하는 시각이 달랐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한 듯하다.
1989년 이후 죽의 장막 뒤에 다시 숨었던 중국은 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개혁개방의 속도에 불을 붙여 이제 미국과 함께 G2로 등장했다. 그사이 빈부 및 도농 격차는 끊임없이 벌어졌고, 관료와 상류층의 부패는 극심해졌다. 자오쯔양은 80년대의 회고에서 자신이 덩의 경제노선에 전적으로 찬성했지만 ‘속도’를 강조하는 그의 방향에 우려감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21년 전 자오쯔양이 주장했던 대로 경제개방의 속도조절과 정치개혁이 이뤄졌다면 지금의 중국이 달라졌을까. 누구도 단언할 순 없다. 89년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외세의 개입 등에 대해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어찌됐든 간에 군대를 동원해 학생을 진압한 당 총서기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그의 울림은 여전히 크다. 광주민주화운동 30년을 맞은 우리에겐 더욱. 그 어느것도 국가의 폭력을 정당화할 순 없다.(김영희 기자)
한겨레(10. 05. 29) 근현대사 거목이 몸으로 쓴 ‘당대사’
강만길(77) 교수의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을 읽고 한홍구 교수가 한 얘기가 인상적이다. 하나는 우리나라에서는 정작 역사학자들이 자서전을 쓰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군국소년’ 세대인 강 교수가 이 땅의 대다수 군국소년들과는 판이한 길을 걸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가의 시간>은 역사학자로서 자서전을 썼다는 사실 그 자체와 군국소년 세대이면서 그것을 거부한 삶의 궤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주목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다.
강 교수 얘기에 따르더라도 “국내 역사학자가 남긴 것(자서전)은 어느 특정 시기만을 다룬 것 외에는 없지 않나 생각”될 정도다. 왜 한국 역사학자들은 자서전을 쓰지 않는 걸까?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이는 군국소년 세대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자서전 목차에 올라온 강 교수 삶의 궤적을 약간만 훑어보면 짐작이 간다. 1933년에 태어난 그는 1940년에 마산의 ‘심상소학교’에 입학해 창씨개명과 우리말 금지 수난 속에 소년기를 보내다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라가 해방을 맞았다. 그러곤 바로 사생결단의 신탁통치 찬반 탁류에 휩쓸렸다. 중학교 5학년 때 6·25전쟁이 터지고 학도의용군이 됐다. 대학에서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겪었고 고려대 전임교원이 된 뒤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시작됐다. 더불어 중앙정보부 남산분실 지하 취조실에서 그 자신의 수난도 시작됐다. 전두환 군사정권 때 두 차례나 해직당했다. 서대문 교도소까지 갔다. 자서전을 쓰겠다고 마음먹는 것 자체가 어렵고 위험한 세대였다.
한 교수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그 (군국)소년들이 어려서 입은 마음속의 일본 군복을 벗지 못한 채, 반공청년이 되어 병영국가를 만들고, 이제는 군국노인이 되어 전쟁불사를 외치는 그런 나라”다. 광기에 가까운 그 기이한 행태는 최근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다시 한번 유감없이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강 교수는 군국소년 대다수가 간 그 길을 왜 거부했나? 그리고 어떻게 철저한 평화주의자, 남북 대등통일론자, 민주주의자가 됐을까? 바로 그런 얘기를 매우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는 게 <역사가의 시간>이다. ‘분단시대’라는 말을 재창조했고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통일고문에다 남북 역사학자 교류를 이끌었으며 잡지 <민족21> 발행인을 지낸 그에게 ‘역사학계의 이단아’ ‘좌파 민족주의자’라 손가락질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노라면 그가 아니라 오히려 고대·중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순수 실증주의’에 파묻혀 당대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한국 역사학계야말로 이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울러 그가 좌파인 것이 아니라 실은 그를 좌파라 한 사람들이 터무니없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게 문제라는 사실도 여실히 드러날 것이다.
강 교수가 “한 사람의 역사학도 및 역사선생이 평생을 통해 겪은 민족분단시대로서의 우리 현대사 경험담” 정도라고 한 자서전 형식의 이 책은 그런 중대한 사실들을 개인적 체험을 토대로 전혀 딱딱하지 않게 부드럽고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격식을 갖춘 시대사류보다 오히려 더 심층적으로” 풀어가는 대단한 장점을 갖고 있다. 이는 그가 끊임없이 강조해온, 우리 역사학계에는 결핍된 대중성과 현재성을 획득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학부 졸업논문으로 조선시대 상업기관인 시전(市廛), 석사논문으로 조선시대 수공업자들인 장인(匠人), 박사논문으로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에 대해 쓰는 등 자본주의 맹아론에 그가 주목한 것은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조선사의 정체후진성론과 타율성론을 논박하려는 그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제시대 토지조사사업과 빈민생활사 등 사회경제사 연구에 몰두한 것도 마찬가지. 그는 실증주의를 신봉하면서 탈식민 민족해방이라는, 가장 절박했던 당대사적 현실과제를 외면했던 주류 조선역사학계를 비판한다. 식민사학에 대항했던 민족주의사학과 사회경제사학 중 민족주의사학의 일부는 광복 뒤 남쪽에선 반공주의와 결합하면서, 일제시대 실증주의가 결과적으로 식민사학과 식민통치에 기여했듯이 군사독재정권 추수라는 기회주의로 전락한다. 강 교수는 6·25전쟁과 4·19, 5·16을 거치면서 그런 모순을 감지했고 박정희의 유신체제 이후 바로 그 자신이 수난을 당하면서 다수 대중이 겪어내야 했던 자기 시대의 고통스런 현실과 그 근원이라고 할 분단문제·통일문제에 무관심하고 무기력한 역사학에 회의를 품었다. 그가 연구분야를 점점 현대사와 민족통일문제 쪽으로 옮기고 현실문제에 대해 발언하며 ‘논객’으로서의 활동을 강화해간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강 교수는 박정희 시대 평가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에 대한 평가도 골고루 포함된 “종합적·역사적” 평가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볼 때 그 시대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오히려 퇴보했고, 생산성만이 아니라 분배정의까지 고려한 경제적 민주주의도 바닥이었다. 경제성장도 박정희 체제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에서도 진행됐던 일반적 전후복구 과정의 하나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며 또한 희생당한 노동자·농민의 역할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정치·경제력을 특정 세력이 독점한 상태하의 사회적 민주주의, 사상과 문화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은 문화적 민주주의 모두 낙제점이었다. 게다가 그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평가기준인 평화통일 진척도 또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이런 종합적 잣대를 들이댈 경우 박정희 시대 평가는 과도하고 또 잘못된 것이다. 그는 역사학 연구자는 모름지기 “현실적 상황에만 얽매이고 싶지 않은 미래지향주의자, 어떤 이념적 조건에도 구애되지 않으려는 철저한 평화주의자, 분단된 민족의 다른 한쪽을 세상 사람 모두가 적으로 간주해도 홀로나마 기어이 동족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평화통일론자”가 돼야 한다며 그런 사람을 좌경 또는 좌파 민족주의자라 부른다면 자신은 주저없이 그런 평가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이 책 내용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게 지은이와 개인적 인연을 맺은 다양한 등장인물들인데, 한때 유명한 민주투사였다가 뉴라이트의 핵심이 된 사람, 말년이 씁쓸했던 천관우씨, <사슬이 풀린 뒤>란 책을 남기고 월북한, 좌도 우도 아니었던 오기영, 교토제국대 교수였던 비날론을 만든 화학자 이승기와 이태규의 대조적인 삶, 일본인 학자들과 20여 차례 방북하면서 만난 북쪽 인사들과의 기연과 인물평이 흥미롭다.(한승동 선임기자)
10. 0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