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의 별책부록 에 실은,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길, 2009)에 대한 서평을 옮겨놓는다. 폴라니의 기본사상은 이미 여러 차례, 여러 지면을 통해서 소개/조명됐고, 간명하게는 역자 홍기빈 박사의 해설이나 인터뷰를 참고할 수 있다. <인물과 사상>(12월호)에도 인터뷰가 실려 있다. <거대한 전환>은 출판 편집자가 꼽은 '올해의 번역서'이기도 한데, 인터뷰 기사를 보니 내년엔 또 다른 대표작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교역>과 논문집 <인간의 경제>도 출간될 예정이라 한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의 전망대로, '대안의 삶'이 내년 출판계의 키워드라면, 폴라니는 내년에도 가장 중요한 이론적 지주이자 전거가 될 듯하다.
시사IN(09.12. 26) '거대한 고통'의 기원을 찾아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의 부제는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이다. 그가 우선 염두에 둔 ‘우리 시대’는 책이 출간된 1940년대를 포함한 20세기 전반기일 터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으며 경제 대공황에 빠져들었고,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다가 급기야는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대체 이런 전대미문의 사건들이 어찌하여 일어난 것일까? 폴라니는 이 ‘거대한 고통’의 기원을 19세기 초 영국의 산업혁명과 그로 인해 나타난 자기조정 시장경제의 출현이라는 ‘거대한 전환’에서 찾는다.
문제는 이 ‘거대한 전환’의 동력이자 이념인 ‘자기조정 시장’이란 것이 실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적나라한 유토피아’, 곧 ‘완전한 망상’이라는 점이다. 가령, 노동을 상품화하여 필요에 따라 팔고 살 수 있으며, 이러한 매매가 오직 시장가격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이상적인’ 노동시장은 결코 자연적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폴라니는 산업혁명 초기의 백인 노동자와 함께 식민지 원주민을 노동자의 원형으로 들었다. 식민주의자들을 원주민을 노동자로 만들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식량부족 사태를 일으켰다. 굶주림에 빠뜨려야만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끄집어낼 수 있었기에 그들은 빵열매 나무도 베어 넘어뜨렸다.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원주민들이 화폐 벌이에 나서도록 강제했다. 그렇게 하여 앉아서 굶을 것인가 아니면 노동을 시장에 내놓을 것인가라는 선택지로 내몰았다.
왜 굶주림이란 징벌적 수단만이 사용되었나? 임금이 높아질 경우에 원주민은 기를 쓰고 일할 이유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식민지 원주민이나 백인 노동자나 일정한 체벌로 위협을 당하지 않는 한 자발적으로 노동에 매달리지 않았다. 때문에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을 과로 상태로 몰아넣고 완전히 밟아버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야지만 동료들과 작당하지 않고 고분고분한 몸종처럼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협박과 강압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된다는 점에서 노동시장은 수용소를 떠올리게 한다. 가령 2차 세계대전시 독일군의 포로가 돼 채석장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던 한 러시아군 포로는 “저들에겐 4입방미터의 돌을 캐낼 필요가 있지만, 우리는 각자의 무덤을 위해 1입방미터의 돌만 캐내도 충분하다”고 불평을 토로했다. ‘1입방미터’로 충분하지만 ‘4입방미터’의 돌을 캐내야 했던 이유는 물론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독일군의 감시 때문이다. 이러한 강압에 누구도 굶주려서는 안 된다는 전통사회의 원칙 또한 파괴된다. 영국의 경우에도 1834년에 빈민구제법이 폐지됨에 따라 임금노동으로만 생계유지가 가능하게 되면서 노동시장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시사적이다.
폴라니는 이런 방식으로 노동이 다른 활동으로부터 분리되어 시장법칙에 종속되면 인간적 사이의 유기적 관계는 소멸되고 대신에 전혀 다른 형태의 조직, 원자적 개인주의의 사회조직이 들어서게 된다고 말한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 아닌가? 따라서 문제는 시장경제의 비인간성이나 비합리성이 아니다. 모든 것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불가능한 믿음이다. 그런 믿음이 가져온 파행적 현실이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거대한 전환>은 2009년 또한 폴라니의 ‘우리 시대’임을 말해주면서 진정한 전환으로의 결단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09. 1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