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교수신문에서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꼭지를 옮겨놓는다. 서평위원 칼럼란인데,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대한 이택광 교수의 서평을 싣고 있다. '인터넷 글쓰기'라는 매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로쟈의 저공비행'이 '새로운 글쓰기'와 '게으른 지적 유희' 사이에 놓여 있다는 그의 진단은 나름 정확하다. 이 '서재질' 탓에 논문을 게을리 쓰고 있으니 말이다. 더듬어보면, 사실 학부를 졸업하면서 개인적으로 만든 문집의 타이틀이 '게으른 저공비행'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이미 싹수가 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교수신문(09. 06. 29) 책읽기와 글쓰기, 그 오랜 습속의 전환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취미활동이 아니다. 읽는 것은 항상 쓰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작고한 데리다의 철학이 이 문제를 평생에 걸쳐 숙고한 데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일이다. 묵독이든, 낭독이든, 책을 읽는 활동은 남의 비석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죽어버린 언어의 음각들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그것이 책 읽기의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까.
최근 나온 『로쟈의 인문학서재』라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떠올라서 혼자서 즐거워했다. ‘로쟈’는 한 인터넷 서점에서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서평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현우 박사의 아바타다. 꼼꼼한 번역비평과 책 읽기의 미덕을 보여주는 훌륭한 블로그라는 게 중평이다. 이런 세간의 평가에 별도로, 나는 『로쟈의 인문학서재』가 책읽기가 글(책)쓰기로 바뀐 훌륭한 실례라고 생각한다. 물론 책은 블로그에 비해 작다. 작기 때문에 훨씬 단단하고 조밀하다고 볼 수 있겠다. 세상을 책으로 생각했던 중세의 상상력은 여전히 인문학자의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참으로 식상하면서도 인문학이라는 세 글자에 아직도 연정을 품는 모든 이들의 상식이자 양식인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서재』는 특이한 매체성을 보여준다. 서평에서 비평까지, 문학에서 문화현상까지, 종횡무진한 흔적들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로쟈의 인문학서재』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는 형식이다. 인터넷 글쓰기가 책이라는 전통적 매체를 만나야할 이유에 대해 고민해볼 만하다. 제임슨의 지적처럼, 형식은 사회경제적인 문제와 인과적 관계를 이루기도 한다. 디킨스의 소설이 신문연재라는 시장의 논리 때문에 서사의 분절을 감내해야하고, 도서관 대출이란제도적 한계 때문에 통권으로 묶이지 못하고 낱권으로 나뉘어져야했던 것처럼, 이 책도 인터넷 글쓰기라는 매체의 조건을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글 쓰는 이가 먹고 살 수 있는방법은 글을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것이다. 아직 한국 사회에서 인터넷은 글로 먹고 살겠다는 이들에게 수익구조를 제공하지 못한다. 블로그나 게시판에 올린 글들을 모아, 전통적인 ‘책’이라는 매체성에 담았을 때만 비로소 글은 상품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터넷은 책으로 묶이기 이전에 ‘초벌-기계’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책으로 묶인 ‘로쟈의 서재’는 초벌의 단계를 넘어선 간벌의 과정을 통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훨씬 정제된 사유들이 담겨 있는 셈이지만, 그 형식만을 놓고 본다면, 인터넷 특유의 분절성과 잡학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책을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로쟈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오프라인을 살아가는 평론가 이현우가 아니라 인터넷 서평가 로쟈이기 때문에 가능한 글들이 ‘이현우’라는 이름을 달고 나올 수 있다는 ‘낯선 현실’이 여기에 있다. 천정환이 말하듯 그것은 이현우의 글이 ‘인민의 벗’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이라는 제도에서 더 이상 인문학을 할 수 없기에 로쟈의 책이 필요했다는 역설적인 사실을 드러낸다. 논문쓰기로 복귀해버리고, 아무도 글쓰기의 형식에 대해 의문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대학의 풍토에서 로쟈와 같은 르네상스적 글쓰기는 언감생심 대학평가라는 숫자 놀음이 추방시키고 싶어하는 게으른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유희할 수 없는 대학의 공간에 속하면서도, 속하지 않는 로쟈와 이현우라는 이중적 존재성으로 인해, 『로쟈의 인문학서재』는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작업의 산물을 ‘서재’라는 제목으로 묶어낼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나는 이 제목을 보고 요즘 한 포털 사이트에서 기획연재하고 있는 ‘명사들’의 서재탐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책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그 서재의 클리셰에 대한 하나의 항의처럼 로쟈의 책이 읽히는 건 그래서 놀랄 일은 아니다. 책읽기와 책쓰기에 대한 오랜 습속을 이제 바꾸어야할 때가 됐다는 걸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이택광 서평위원 경희대·영문학)
09. 06. 29.
P.S. 알다시피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마지막 장은 '번역비평'에 할애돼 있는데, 그런 관심사와 관련지어 보자면 '이달의 책'으로 꼽을 만한 것이 지난주에 출간됐다. 역시나 이번주 교수신문을 읽다가 알게 된 것인데, 앙트완 베르만의<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시련>(철학과현실사, 2009)이 번역돼 나온 것. 번역학에 약간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저자와 이 '필독서'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두어 달 전에 영역본을 구했는데, 이번 여름에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시련'을 한번 만끽해봐야겠다. 나대로의 '여름휴가'가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