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나온 책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타이틀의 책은 비비아나 젤라이저의 <친밀성의 거래>(에코리브르, 2009)다. '친밀성의 구조변동'이 원제였던 앤소니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새물결)을 떠올려주는데, 기든스의 책이 '친밀성의 사회학'에 관한 것이라면 젤라이저의 책은 '친밀성의 경제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책이다. 사실 자식의 양육이나 부모 부양에서 언제나 갈등을 빚곤 하는 것이 '돈' 문제인데, 책은 그 껄끄러운 문제에 대한 '솔까말'의 기회를 마련해줄 수도 있을 듯싶다. 지난 주말에는 알라딘에 북이미지가 뜨지 않은 탓에 관련기사를 조금 늦게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09. 06. 17) 친밀한 관계에 내재한 경제적 거래 파헤쳐
미국의 작가 셸비 화이트는 “(가족관계에서) 가장 큰 실수는 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낭만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낭만을 돈으로 사는 것이 가능한 자본주의 시대에도 인간관계의 친밀성과 경제행위를 분리돼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적 정서는 엄연하다. 반면 최근의 존엄사 논쟁에서 보듯 가족 중 누군가를 돌보는 숭고한 일도 사회경제적 이슈로 논의되고 판정받는 게 현실이다. 말기환자가 가족들의 지불가능한 비용을 넘어서 살게 될 경우에 대해 사회가 걱정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경제적인 활동과 사적인 친밀함이 긴밀하게 마주치는 영역에 입문해 있다.

저자인 비비아나 A 젤라이저 프린스턴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상적인 대인관계를 ‘경제’라는 필터를 끼운 채 들여다본다. 책에서 저자는 로맨틱한 관계에 내재한 다양한 경제적 거래를 파헤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는 경제활동을 통해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고 재협상한다. 경제활동과 친밀한 관계는 심지어 서로의 관계를 촉진시킨다. 그는 미국 역사상 법정에서 벌어졌던 광범위한 분쟁사례들을 통해 이를 제시한다. 특히 조건 없는 사랑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겨졌던 부부·연인, 부모·자녀 등 가장 친밀한 관계들을 법정에 세워 놓는다.
9·11테러 사건은 ‘관계에 대한 금전적 보상’ 논쟁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테러로 목숨을 잃은 여성 매캐너니의 희생자 보상금을 놓고 그녀와 20년 동안 함께 산 동성애인 크루즈는 50만달러의 보상금이 매캐너니의 남동생에게만 주어진 것이 부당하다고 청구했다. 자신은 고인과 집, 신용카드를 공유하고 모기지와 생활비를 공동 지출했으며, 생명보험 수혜자로 서로를 지명했기 때문에 자신이 절반의 몫을 받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고인의 남동생은 두 사람의 관계를 법적으로 승인할 수 없고 유언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보상금을 모두 가져야 한다고 반박했다. 9·11사태 때 희생자 한 명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유족은 별거 중인 남편, 동거자, 전 남편, 애인, 자녀 등 여럿이었고 얼마나, 어디까지 보상해야 하는지 논란이 이어졌다.
이처럼 결혼하지 않은 동거 커플, 소원해진 배우자, 동성가정의 경우 종종 법적 분쟁의 대상이 된다. 하룻밤 혹은 일생 동안 침대와 식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경제적 보상을 받을 만한 ‘진짜’ 친밀함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혼한 부모가 자녀의 양육비를 어떻게 분담해야 하는가, 빚에 쪼들리는 자녀가 늙고 병든 부모를 어디까지 부양해야 하는가 등 현대의 인간관계 상당부분이 법정의 결정에 의존하고 있다.

◇요즘 맞벌이부부들의 상당수는 자녀 양육을 노부모에게 맡기며 양육비 보상을 얼마나 할 것인지 고민한다. 이처럼 진심과 친밀함을 담은 관계에도 물질적 보상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요즘 자녀 양육을 노부모에게 맡기는 맞벌이부부들이 양육비 보상을 고민하는 것도 부모자식간의 조건 없는 사랑에 흠집을 내는 사례. 하지만 지은이는 이조차 “경제활동은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며, 친밀함이라는 존재는 경제활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설명한다.
책의 다종다양한 사례들은 관계의 친밀함을 ‘맹목성’이라는 두꺼운 유리창을 가진 온실에서만 살아남는 민감한 화초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충격과 함께 해방감을 줄 수 있을 듯하다. 지은이는 “목표는 경제적인 문제로부터 친밀함을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혼합을 만드는 것이다”면서 “돈이 악영향을 미치는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을 멈추고, 대신 어떤 조합이 더 행복하고 더 생산적인 삶을 만드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김은진 기자)
09. 06. 29.

P.S. 저자인 젤라이저 교수의 다른 책들을 찾아보니 '아이의 사회적 가치'를 다룬 것과 '돈의 사회적 의미'를 다룬 것이 눈에 띈다. <친밀성의 거래>는 이 두 전작의 변증법적 종합(!)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