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읽을 때마다 많이 배우게 되는 칼럼이 있다. 한겨레에 연재되는 '시대를 읽는 문학'이 그런 종류다. 내일자 칼럼을 읽고 생각난 김에 지난달 칼럼까지 옮겨놓는다. 연재의 타이틀 자체가 쉽게 '감당'할 수 성질의 것이 아닌데, 박혜영 교수의 칼럼은 유려함과 침착함, 그리고 날카로움을 겸비하고 있다. 본받을 만하다.    

 

한겨레(09. 05. 23) 작가여, 누구의 사랑을 받을 것인가 

경제사상가인 슈마허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세 명의 친구들이 모여 누구의 직업이 가장 오래된 것인지를 두고 내기를 벌였는데, 먼저 외과의사인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떼어내 이브를 만드시는데, 이게 바로 외과에서 하는 수술이지.” 그러자 건축가인 친구가 말했습니다. “글쎄,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시기 전에 먼저 혼돈으로부터 이 우주를 만드셨지.” 두 사람의 논쟁을 듣던 경제학자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 혼돈을 누가 만들었지?”

가장 오래된 직업이 경제학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요즘 우리 사회도 태초의 혼돈만큼이나 여러 가지 경제문제로 어지럽습니다. 환율과 주식 가치는 급변하고, 외환위기설은 끊이지 않으며, 공기업의 구조조정과 공공재의 민영화 논란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돌이킬 수 없는 가장 큰 혼돈은 바로 정부가 ‘경제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우리 국민을 향해, 우리의 계곡과 강을 향해 선전포고도 없는 개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경기부양을 위해 정부가 시작한 이 소리 없는 전쟁으로 무고한 철거민들은 반체제 테러리스트로 체포되었고, 지금까지 평화롭게 흐르던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은 그동안 방치되었다며 느닷없이 대토목공사용 정비소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일견 평화롭게 보이는 일상의 한가운데 앞으로 대혼란을 초래할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 주목하는 작가들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는 제국주의 전쟁으로 무너진 자기 시대를 돌아보며 “선인은 모든 신념을 잃어버리고, 악인은 강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라고 슬퍼했지만 우리 시대의 개발 전쟁으로 인한 이런 파괴는 누가 지켜보며 슬퍼해줄까요? 매스컴의 관심을 끌 만큼 웅장한 서사도, 대규모의 학살도, 대폭발의 섬광도 없는 시시한 이 전쟁을 예민한 작가들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주목해줄까요?  

이 총성 없는 전쟁은 ‘이름 바꾸기’로 시작됐습니다. 강제철거 사업이 ‘뉴타운 개발사업’으로 바뀐 것처럼 경인운하 사업도 ‘아라뱃길 잇기’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 대운하 사업도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친근하게 개명됐습니다. 물론 이름이 달라진다고 정체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아라뱃길 잇기도 김포에서 인천까지 수심 6미터의 깊이로 한강을 파내는 사업이고, 4대강 살리기도 4대강을 모두 수심 6미터의 깊이로 파내는 사업입니다.  

거기다 4대강에는 물을 가둬둘 총 16개의 콘크리트 보와 96개의 중소 규모의 댐을 잇달아 만들 계획입니다. 2011년 완공까지 예산 규모가 14조원이 넘는 대규모 사업입니다. 참고로 세계 최대의 간척사업이었다는 새만금 사업이 10년 동안 1조2000억원 규모였습니다. 실제로 민간에서는 4대강 정비사업 예산이 앞으로 더 불어나 20조원이 넘을 거라며 흥분하고 있습니다. 새만금의 20배에 가까운 돈을 불과 3~4년 만에 그야말로 폭포수처럼 4대강에 쏟아붓는다면 우리의 강은 어떻게 될까요? 강물도 저들 관료와 건설업자와 학자들처럼 흥분될까요? 이 사업이 첫 삽을 뜨는 순간 정부 발표로도 여의도 면적의 22배에 해당되는 농지가 사라진다고 합니다. 오래된 마을이 수몰되고, 나무가 잘려나가고, 농지는 매립되고, 이웃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것은 수백억원짜리 댐을 하나 건설할 때도 반복되던 일입니다. 하물며 14조원이 넘는 사업이면 얼마나 많은 파괴가 일어나겠습니까? 

일찍이 인도 작가인 아룬다티 로이는 국가가 추진하는 ‘개발’이란 그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에게 싸움을 걸어 이들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작은 것들의 신>으로 일약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로이는 1999년 인도 대법원이 나르마다 강의 댐 공사 재개를 결정하자 명성과 부를 뒤로하고 바로 반정부 운동에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인도의 아름다운 계곡과 강은 그녀의 작가적 상상력의 원천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강물 속에서 가난한 농부와 어부들과 함께 저항하면서 로이는 3200개의 댐을 건설하는 나르마다 강 재개발 사업이란 결국 이 강에 생존을 의지했던 무수한 약자들의 삶을 무너뜨리려는 전쟁임을 알아챘습니다. 로이는 나르마다 강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한 사람의 작가를 간절히 찾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누가 밀려나고 누가 이득을 챙겼는지, 약자들의 삶은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다시 이어질 수 있는지, 전문용어와 회계 수치 뒤에 가려진 이런 보이지 않는 진실들을 들려줄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곧 낙동강과 금강의 아름다운 금모래, 은모래들이 사업비를 벌기 위해 골재로 팔려 나가게 됩니다. 구불거리던 물길은 쫙 펴지게 되고, 갈대밭이 있던 강둑은 시멘트벽으로 미끈하게 포장되고, 곳곳에 생길 담수용 댐으로 주변 산들의 허리는 벌겋게 깎이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분명히 어떤 선을 넘고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저 아름다운 계곡과 강이 우리 세대만의 것일까요? 겨우 유람선이나 바지선 몇 대 띄우려고 농지를 파괴하고 농부들을 내는 것이 과연 발전일까요? 이 거대한 대토목공사의 이해관계는 또 서로 어떻게 얽혀 있을까요? 개발로 누가 쫓겨나고 누가 이득을 보게 될까요? ‘알타이문화연합’이나 ‘중도실용정부’만 작가를 부르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계곡과 강도 나르마다 강처럼 작가를 찾고 있습니다. 하천 준설이니, 수상 레저니, 다기능 복합발전 인프라 구축이니 이런 추상적인 말이 아닌, 강에 의지해 살아온 사람들과 작은 생물들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언어로 들려줄 작가를 말입니다. 국가나 대통령이 아닌 우리의 계곡과 강으로부터 영원한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그런 작가를 말입니다.(박혜영 인하대 교수·영문학)   

 

한겨레(09. 04. 18) '필요’만 허용되는 헐벗은 삶이여 

최근 정부는 208명이던 국가인권위의 규모를 164명으로 대폭 축소시켰다. 인권위의 인원이 ‘불필요하게’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는 인권위가 처음 생겼던 2002년에 비해 인권 관련 민원이 10배 이상 증가했지만 정부는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구조조정을 했다. 또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정부는 국립오페라 합창단도 해단시켰다. 42명의 단원들이 그동안 4대 보험도 안 되는 비정규직으로 일했지만 알고 보니 규정에 없는 임의단체라는 이유에서였다. 인권위와 마찬가지로 2002년 처음 창단된 이래 오페라합창단의 공연 횟수는 두 배 이상 늘었지만, 정부는 ‘필요없다’며 전원을 해고시켰다.  

사람을 필요한 사람과 불필요한 사람으로 가르는 것은 비단 정부만 하는 짓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효율성이나 필요성이란 말은 정부, 기업, 학교, 병원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람을 털어낼 때 사용하는 구조조정용 잣대가 되었다. 아마도 ‘자른다’는 말을 사람에게 처음 쓰기 시작한 것도 우리 시대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엔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게 아니며, 사람이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할 때 우리 삶이 어떤 비극으로 떨어질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한때 왕이었던 리어의 처참한 몰락을 통해 사람살이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린 희곡이다. 흔히 리어는 욕심 사나운 두 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욕과 분노를 겪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사람다운 삶을 오직 ‘필요성’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그런 세계가 사실은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묻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늙은 리어는 세 딸 가운데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허풍을 떤 두 딸에게만 영토를 물려준 뒤 자신은 100명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두 딸의 왕국을 오가며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리어의 낭만적인 생각은 이내 본색을 드러낸 두 딸들의 현실논리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먼저 불필요한 수행원 수를 줄이지 않으면 받아줄 수 없다고 한다. 큰딸은 100명은 많으니 50명으로 줄이라고 하고, 둘째딸은 50명도 많다며 25명으로 줄이라고 한다. 그러자 다시 큰딸은 우리가 돌봐드리니 실은 한 명도 필요 없다고 되받아친다. 두 딸의 배은망덕에 격분한 리어는 사람의 삶을 필요성으로 논하지 말라며 이렇게 고함친다. “오, 필요를 논하지 말라! 가장 미천한 거지도 가장 보잘것없는 것이나마 여분을 갖는다. 자연이 인간본성에 필요한 것 이상을 허락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짐승만큼 비천할 것이다.” 늙은 왕은 마침내 사랑하던 막내딸도, 드넓은 영토도, 왕의 지위도 모두 잃어버린 채 껍데기만 남아 거지와 광대와 광인들과 함께 황야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끝끝내 리어는 두 딸들이 말한 필요성의 현실논리에 순응하지 않는다. “싫다! 늑대나 올빼미와 한 무리가 되어 필요성의 날카로움에 쥐어뜯기느니 맹세코 모든 거처를 버리고, 모든 증오에 맞서 싸우는 편을 택하겠다.”  

리어의 말대로 사람이 단지 생을 연명하기 위한 것, 그 이상을 삶에서 누릴 수 없다면 우리는 더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딸들에게 ‘불필요한’ 것을 모두 빼앗기고 광야를 헤맸던 미친 리어처럼 그런 삶에서는 인간 정신이 깊이 병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위 불필요한 것은 모두 빼앗기고, 오직 필요한 것만 허용되는 삶이란 짐승처럼 그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만 사는 삶이며, 이런 ‘헐벗은 삶’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당연하지만 예술이나 인권은 결코 뿌리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필요성의 논리로 보면 마치 물이 빠진 갯벌이나 물이 고인 늪지가 모두 불필요하게 보이듯이 예술이나 인권도 불필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찍이 리어가 두 딸에게 절규했듯이 만물은 눈에 보이는 ‘필요성’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봄날 새싹도 보이지 않는 땅의 힘으로 움터 나오는 것이며, 가을날 알곡도 밤하늘의 달빛과 별빛으로 익어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제대로 여물려면 보이지 않는 것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마치 나무에게 물만 필요한 것이 아니듯이, 새에게 먹이만 필요한 것이 아니듯이. 만약 가끔 잎사귀를 흔들어주는 바람이 없다면, 그리고 마음껏 날갯짓할 텅 빈 하늘이 없다면 나무도 새도 모두 살지 못할 것이다.  

지금처럼 오직 경제논리로만 삶을 저울질하게 되면 그동안 필요성의 영역 밖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점차 필요성의 영역 안으로 넘어오게 된다. 곧 나무는 목재가 되고, 강은 운하가 되며, 갯벌은 용지가 된다. 이렇게 자연이 그저 쓰고 버리는 자원이 되면 다음엔 사람도 그저 쓰고 버리는 인력이 된다. 그래서 필요성의 논리가 횡행하는 사회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불필요할 때는 희소하지 않던 것들이 일단 필요성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갑자기 희소해지기 때문이다. 가령 물은 희소하지 않지만 수자원으로 바뀌면 늘 부족하게 되고, 땅은 희소하지 않지만 택지로 바뀌면 늘 부족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부족하지 않지만 인력으로 바뀌면 경쟁력 있는 인적 자원을 늘 부족하게 된다. 이런 사회는 오직 경쟁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사람들은 더 많은 필수품을 확보하기 위해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게 되고, 일평생 이런 악다구니에 시달리다보면 인간의 존엄성도, 아름다운 예술도 마침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짐승처럼 살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불필요한 것들의 필요성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극작가 이오네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쓸모없는 것의 유용성과 쓸모 있는 것의 무용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는 바로 노예와 로봇의 나라가 될 것이다.” 예술이나 인권은 노예나 로봇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필요성’이나 ‘효율성’의 논리에 갇혀 있는 한, 우리가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도 닫히게 될 수밖에 없다.(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09. 05. 23. 

P.S. '날카로움'으로 치자면 요즘 내가 애청하고 있는 CBS 시사자키의 '서화숙의 송곳' 코너를 빼놓을 수 없다(http://www.cbs.co.kr/radio/pgm/?pgm=1383). 한국일보 서화숙 편집위원의 매섭고도 재치있는 시사만평이 그나마 답답한 현실에 청량제가 돼준다. 지면 칼럼으로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한국일보(09. 05. 07) [서화숙 칼럼] 고리를 끊었습니까

모란은 향기가 있다. 한 그루만 꽃이 펴도 삽상한 내음이 온 마당을 채운다. 모란이 향기가 없다는 속설은 <삼국유사>에서 비롯된다. 선덕여왕이 공주 시절, 중국에서 모란 그림을 보내왔는데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꽃이 향기가 없다는 것을 맞췄으니 공주는 영특하다는 내용이다. 식물에 무지한 일연의 시각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문화에서 과거의 왕후(王候)를 영웅시하는 것은 이와 비슷하다.

박지원이 당대로서는 진보적이었다지만 한자로만 글을 쓴 사람인데, 박지원의 개혁성조차 참아내지 못한 정조가 개혁 성군이고 시아버지와 권력투쟁을 하느라 나라를 말아먹은 명성황후는 구국의 여신이 된다. 그보다 더 한심한 대원군도 연속극으로 들어가면 꽤나 현명한 인물로 나온다. 천추태후나 광개토대왕이나 당대의 권력가였을 뿐 양식이라고는 21세기의 범인 축에도 못 낄 인물을 불세출의 덕성을 가진 영웅으로 불러내는 문화에는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이 훌륭하다는 이 시대의 가치관이 들어있다. 



돈 많고 권력 있어야 영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과 이혼율이 가장 높고 출산율은 가장 낮으며 노동시간이 가장 많고 일에 대한 만족도는 가장 낮으면서 잠조차 가장 적게 자는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영웅이 아니다. 양익준 감독의 영화 '똥파리'에는 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영웅이 등장한다.

주인공 상훈은 용역깡패니 공적으로는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지만, 사적으로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때문에 누이와 엄마를 잃고도 배다른 큰누이와 조카에게는 살갑다. 강한 자로부터 받은 폭력을 약한 자에게는 되물림하지 않는 영웅으로는 남편으로부터 학대 받으면서 자식은 지키던 여주인공 연희의 엄마와 상훈의 큰누이도 있다. 연희의 엄마는 폭력가정을 떠나지 못하다가 죽어서 딸에게 물려주지만 보다 젊은 상훈의 큰누이는 이혼하고 자식을 데려옴으로써 폭력의 고리를 끊는다.

가난한 사람들과 글쓰기 공부를 할 때 30대 중반의 남성이 발표를 했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형만 데리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그는 계모와 친부의 학대에 시달리다 못해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출을 했다. 공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음식점에서 일하면서 요리솜씨는 익혔지만 조리사 시험을 볼 때마다 필기 시험에서 떨어졌다. 좌절감에 술에 빠지기도 했다. 나중에 엄마를 만나보니 형은 고등학교는 마쳤다. 배다른 동생도 고등학교는 나왔다. "공부는 내가 제일 못했지만 그래도 나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을 할 때 그도 입술을 깨물었고 같이 듣던 사람들도 모두 울었다. 그에게 밀어닥친 불행의 주먹질을 그는 온몸으로 맞으며 그걸 남에게 풀지 않았다.

폭력 불행의 고리를 끊는 게 영웅

그러나 이 영웅들은 대접받지 못한다. 상훈은 그가 공적인 영역에서 배출하던 폭력성의 대가로 맞아 죽고, 현실의 30대는 알코올 중독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불행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져서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도 많다. 가정이 불행하면 학교가, 사회가 잡아줘야 하는데, 학교에는 불행한 청소년을 117대나 때리는 정신 나간 교사가 있다.

폭력과 불행의 대물림은 꼭 가난한 가정의 일만은 아니다. 부모의 냉대가 가슴 아팠다며 늙고 약해진 부모를 냉대하거나 자식들에게 화풀이하는 어른들은 도처에 있다. 그러니 내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혹은 내가 겪은 교사처럼 내 자식에게 화풀이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이들은 이 폭력의 고리를 끊는 위대한 싸움을 하는 영웅들이다. 그 힘겨운 투쟁에서 져서 죽지 말라고, 당신은 위대한 싸움을 하는 중이라고 격려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돈 많이 버는 것을 성공이라고, 한 자리 차지한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지 말자. 다만 제게 닥친 불행을 더 약한 이에게 대물림하려는 욕망을 끊는 이를 영웅이라고 부르고 영웅이 되기 위해 조금씩이라도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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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5-23 00:13   좋아요 0 | URL
폭력의 고리를 끊는 게 영웅-매우 좋은 내용입니다.평소 제 소신을 시원하게 말해주네요.

로쟈 2009-05-24 11:47   좋아요 0 | URL
네, 학교 교육도 그런 사례를 다루면 좋겠어요...

2009-05-24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4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시비 2009-05-24 12:10   좋아요 0 | URL
효우리(소년법6호처분시설아동들)들의 이야기를 판박이 해놓은
내용입니다. 불행과의 싸움에서 이길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면 합니다. 저의 까페에 퍼갑니다. 감사

로쟈 2009-05-24 20:36   좋아요 0 | URL
'효우리'라고 부르나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