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비판/해체하고자 하는 두 권의 책을 묶어서 다루었다. 그냥 이런 책들이 나왔다는 소개 정도다. 지난주에 여러 편의 원고를 쓰는 바람에 미처 퇴고를 못했더니 역시나 오탈자에다가 구겨진 문장이 눈에 띈다. 못 사는 집은 어디 가도 티가 난다고 하던가.
한겨레21(09. 05. 18) 동서양 이분법, 상상의 역사학
‘유럽중심주의’란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유럽 중심적 사고와 이해를 가리키는 것이니 보통 비판과 극복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말이다. 흔히 ‘세계의 역사’쯤으로 이해하는 ‘세계사’도 유럽중심주의의 사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최근 한국서양사학회에서 엮어낸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푸른역사 펴냄)의 문제의식에 따르면, “서양인들이 200년 이상 발전시킨 서양사 체계는 기본적으로 유럽중심주의에 의해 강하게 채색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서양 역사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의 서양사학 또한 유럽중심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이 ‘자기반성’까지도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유럽중심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비판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성립된 것은 아니다. 19세기 중엽, 좀더 정확하게는 아편 전쟁이 일어난 1840년대 이후 유럽은 약 1세기에 걸쳐 전 지구적 차원의 패권을 차지했다. 미국의 헤게모니까지 포함하면 150여 년이다. 이것은 물론 사실이고 현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근대 유럽이 쟁취한 패권적 지위와 우월성을 과거로까지 투사해 세계사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는 점. 그때 세계사는 그리스로부터 이어지는 서양 문명의 역사와 동일시되며, 비서양 세계의 역사는 주변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문명론적인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아시아지역에는 동아시아의 유교문명, 남아사이의 힌두문명, 그리고 서아시아의 이슬람문명 등 각기 다른 세 개의 문명이 별개로 존재해왔지만 유럽 중심적 관점은 이를 한데 묶어서 ‘동양’이란 말로 뭉뚱그린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분할이 허구적인 ‘상상의 지리학’(에드워드 사이드)에 불과함에도 아직까지 우리의 사고틀로 남아있다. 유럽중심주의의 뿌리가 깊다는 증거다.
이러한 유럽중심주의 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강철구 교수(이화여대 사학과)는 비서양 지역의 역사에 대한 재평가를 통한 진정한 세계사적 시각의 확보와 함께, 비교사적 방법과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문제의 뿌리는 더 깊은 곳까지 뻗어있는 듯하다. 최갑수 교수(서울대 서양사학과)의 지적대로 유럽중심주의가 고질적인 것이 된 데에는 19세기 유럽이 만들어낸 분과학문 체계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말이다. 실상 근대 역사학 자체가 유럽의 발명품이라면, 진정한 세계사적 시각의 확보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세계사의 해체’가 아닐까.
사카이 나오키와 니시타니 오사무의 대담집 <세계사의 해체>(역사비평사 펴냄)는 그런 고민을 좀더 정교하게 다듬어주는 책이다. 두 사람은 ‘세계사의 해체’란 주제가 주체성과 국민국가 자체에 대한 의문까지도 포함한다고 보며, 근대세계의 서양중심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중심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을 탐색한다.
번역의 정치학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대담에서 니시타니는 인문학의 어원으로서 그리스․로마의 고전학을 가리키는 ‘후마니타스’와 그와는 대비되는 전통에서 인류학의 어원이 되는 ‘안트로포스’를 대비시킨다. ‘후마니타스’가 앎의 주체로서 인간을 다룬다면 ‘안트로포스’는 인류를 오직 앎의 대상으로만 다룬다. 때문에, 인문학(후마니타스)은 유럽 연구 내지 유럽적 인간의 연구가 되는 반면에, 인류학(안트로포스)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연구가 된다. 간단히 말해서, 인문학의 탐구대상은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유럽적 인간’이라는 얘기다. 만약 비유럽인, 곧 안트로포스가 서양 철학을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하면, 이것은 니시타니의 표현으론 “아, 원숭이가 그리스어를 말하기 시작했다”가 된다.
이러한 지적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 극복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라는 걸 시사해준다. 문제는 역사학이나 인문학의 한 경향으로서의 유럽중심주의가 아니라 역사학과 인문학 자체이기 때문이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보다 철저한 성찰과 대안의 모색이 필요해 보인다.
09. 0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