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일본제 담론, 특히 가라타니 고진 문학론의 수용과 관련한 논쟁을 옮겨놓는다. 하정일 교수의 문제제기에 소장평론가 조영일씨가 반론을 제기한 상태인데, 논쟁이 추가적으로 더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교수신문(09. 03. 09) 迷惑에 빠진 이론수입 …“우리 내부의 지적 성취를 돌아보라”
중진 연구자이자 문학평론가인 하정일 원광대 교수(국문학·사진 오른쪽)가 최근 한국 문학 연구·비평의 ‘일본 의존성’을 작심한듯 비판하고 나섰다. 부산에서 발행되는 <오늘의 문예비평>(72호)에 기고한 「학문의 식민성과 기원의 은폐」라는 글을 통해서다. 논쟁이 예상된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첫째, 일본발 담론 수입의 일방성은 우리 내부의 지적 성취에 대한 무관심의 반영이다. 1980년대 본격화된 대학원 학생교류는 일본의 최신 이론 수입 통로를 넓히는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일본 학계의 유행 담론이나 주요 동향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에 소개되고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를 터부시할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이것이 ‘쌍방향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일방성 수입에 의존한 결과 2000년대의 문학연구·비평이 우리 내부 즉 “1970~80년대 탈식민적 사유들에 무관심할뿐더러 그것들을 민족주의의 변종 정도로 치부하는 심각한 왜곡마저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하 교수는 작금의 한국 문학연구·비평이 우리 내부의 지적 성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외국 이론을 수용하는 작업은 “민족적 열등감에서 비롯된 식민적 무의식의 發露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부분은 다분히 논쟁적이고, 계산된 발언으로 읽힌다.
둘째, 수용 과정에서 일본 학술 담론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부족했다. 니시카와 나가오, 우에노 치즈코, 고모리 요이치의 저작들은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특수에 바탕해 구성된 담론인데, 이것이 보편으로 정립될 수 있으려면 다른 특수들과의 맞대면을 통해 조정하고 再構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최근 한일 학술교류에서는 이러한 ‘보편의 특수화’와 ‘특수의 보편화’라는 왕복운동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 교수가 이들에게 돌리는 ‘혐의’는 ‘제3세계의 민족운동에 대한 심각한 무지’(니시카와 나가오), ‘민족 담론의 과잉 일반화’(우에노 치즈코), ‘민족에 대한 강박관념’(고모리 요이치)이다. 요컨대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국의 진보적 민족 담론들을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이들 일본 학자들에게 무엇이 결핍돼 있는가를 강조한 복화술인 셈이다.
셋째, 문제가 보다 심각한 쪽은 ‘한국의 문학연구/비평’이다. 사실 하 교수 글에서 겨냥한 비판의 진짜 과녁은 이 셋째 항과 이어지는 다음 항이다. 왜 그런가. 일본 학자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실상에 근접한 연구를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특수의 보편화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특수의 특수성은 규명해냈다, 그러나 ‘우리’는 뭐하고 있냐. “2000년대 한국 문학연구·비평은 일본의 특수 이론을 수입해 그것을 한국근대문학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데 급급할 따름”,“이식성은 해당 담론을 보편 이론으로 전제하는 안이함에서부터 나타난다.”
넷째, 그 결과 2000년대의 한국 문학연구·비평이 신실증주의의 경향을 극심하게 드러내는 현상이 이어진다. 수입 이론이 보편으로 전제돼 있는 상태에서 연구자나 비평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그 이론을 입증할 ‘증거 찾기’에 골몰하는 일뿐이다. “한국 문학 연구·비평 전공자들은, 풍자적으로 말하자면, 증거 수집가가 됐다. 최근 10여 년간 엄청난 양의 한국문학 관련 논저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시대와 대상과 자료만 다를 뿐 내용이 엇비슷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데는, 곧 “이론을 스스로 창출하려는 문제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여기에 기름을 부어준 것이 ‘탈이념화’ 현상이다. 하 교수에 따르면 “신실증주의와 탈이념이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켜주는 악순환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제도사, 풍속사, 문화사를 넘어 사상사나 문학비평사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좀 진부한 이름 붙이기일수도 있지만, 하 교수는 이를 ‘실천적 사유의 거세’ 결과로 본다. 이 대목에서 하 교수는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80년대 민족문학론의 유효성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민족문학론의 역사는 한국문학이라는 특수의 특수성을 규명하고 또 다른 특수들과의 맞대면을 통해 보편으로의 상호지양을 이루려는, 다시 말해 특수의 보편화와 보편의 특수화의 끊임없는 왕복운동을 통해 보편에 다가가려는 실천적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2000년대 한국문학 연구·비평은? 역동성이 없다는 거다. “소란스러운데 말은 없고, 분주한데 열매는 없다. 이론 수입업자들, 지식중개상들, 증거수집가들이 판치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학문의 식민성은 그래서 무섭다.”
다섯째, 그래서 “한국 문학연구·비평에 가장 커다란 지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 이론가” 가라타니 고진 컬럼비아대 객원교수(사진 왼쪽)에게 주목한다. 황종연 동국대 교수와 평론가 조영일은 고진 수용에 있어서 가능성과 아쉬움을 남기는 존재들이다. 황종연은 진즉부터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은 끝났다”는 진술에 동의했었고, 탈근대주의적 문학관을 피력해왔기 때문에 새삼스럽지 않다. 다만 번역가이자 신예 평론가 조영일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고진의 테제를 “너무 쉽게 긍정해버렸다.” “종언론을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문학연구·비평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조영일은 신중했어야 했다는 게 하 교수의 불만이다. “문학이 없는데, 문학연구·비평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논쟁의 여지를 남겨둔 대목이기도 한, ‘종언론’의 전제와 조건을 두고 하 교수는 가라타니 고진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곡해해 도달한 것(가치를 만들어내는 유력한 장소는 소비=유통영역이다)으로 읽어낸다. 이로써 고진 자신이 설정한 ‘소비=유통영역’이라는 유력한 장소에서 과연 고전적 의미의 근대소설(문학)은 존속하기 힘들겠지만, 여전히 ‘영구혁명 중에 있는 주체성의 표현’(싸르트르)으로서의 근대문학은 유효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조영일의 종언론 해석에는 이 문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결락돼 있다”고 보았지만, 조영일로서도 이에 대해서 돌려줄 답변이 있을 것같다.
하 교수가 제기한 비판의 핵심은, 가라타니 고진의 ‘종언론’은 그 전제와 조건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잉여)가치론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원의 은폐’에 골몰하고 있는 담론이다. 가치의 기원, 유통의 기원, 소비의 기원, 영구혁명의 기원, 주체성의 기원. 근대문학 종언론은 이것들의 기원을 은폐함으로써 성립된 담론이다.” 지배와 저항, 적대와 대립, 주체성의 충돌이 생동하고 있는 ‘생산과 노동이라는 기원’에 기대고 있는 하 교수에게는 기원을 은폐한 가라타니 고진의 담론이란 ‘보편 이론’이 되기에는 여전히 ‘왕복운동’이 불충분한, 수입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수입 담론에 휘둘려 있는 2000년대 한국문학 연구·비평도 어떤 ‘迷惑’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니냐는 그의 추궁은이제 ‘수입’ 과정에 관여하고 있는 ‘혐의자들’의 본격적인 반대심문에 마주칠 차례가 됐다.(최익현 기자)
교수신문(09. 03. 16) '근대문학의 종언’은 일본제 담론일 뿐인가
하정일은 「학문의 식민성과 기원의 은폐」라는 글에서 오늘날 한국문학계에 불고 있는 일본제 담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얼핏 보면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이를 테면, “번역과 소개를 포함한 학술교류 자체는 권장돼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그러나 그것은 쌍방향적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추가됨으로 그 중립은 사실상 알리바이에 그친다는 인상 또한 든다. 물이 흐르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높거나 낮아야 하는 법이다. 이런 접대성 균형감각은 일본발 담론의 활발한 흡수에는 내발적인 이유도 있다(민족이라는 이념에 의해 억압돼온 가치들의 부상)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식민성의 탈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단서를 단 후, 그와 같은 식민성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자생적 담론의 창조적인 계승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해외담론의 수입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판적 수용(주체적 전유)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중심(자생담론)을 확고히 붙들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 땅에서 문학 또는 학문을 하는 사람 중 이런 주장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중요한 것은 이런 원론을 떠받치고 있는 ‘무엇’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자생담론’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그는 ‘그것은 저항적/민중적 민족운동에서 나온 민족문학론’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물론 그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민족담론이 그동안 노정시킨 문제점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식민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쪽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중요한 것은 중립이 아니라 가중치 내지 우선순위인 셈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정일이 이글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생이론으로서의 민족문학론에 대한 옹호’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일본제 담론의 무분별한 수입’에 있다기보다는 실은 ‘민족문학론의 위기’에 있고 볼 수 있다(즉 제목 「학문의 식민성과 기원의 은폐」가 은폐하고 있는 제목은 「민족문학론의 위기」인 셈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그의 입장은 가장 강력한 일본제 담론으로 여겨지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민족문학론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하는 최원식의 그것과 사실상 같다 하겠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에 대해 거부감이 비단 민족문학 진영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필자가 다른 곳(『한국문학과 그 적들』)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오늘날의 한국문학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의해 나뉘며, 흥미롭게도 이 과정에서 문학생산양식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문학적 당파성과는 상관없이 ‘근대문학의 종언’ 퇴치를 위해 동맹을 맺고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식민적/자생적(외발적/내발적)이라는 구분은 본래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희석시킬 위험이 있다.
하정일의 글을 읽으면서 계속 눈에 거슬린 것은 그가 키워드로 구사하는 ‘식민성’이라는 단어이다. 이 개념은 그에게 만능열쇠와 같은 단어인데, 왜냐하면 아무리 복잡한 상황이나 다층적 텍스트라 하더라도 이것으로 열리지(정리되지) 않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식민성’이라는 딱지만 붙이고 나면, 딱지를 발부하는 자는 발언상 우위에 서며, 상대방(대상)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식민성’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편리하고 신속한 처리방식은 한때 친일/저항이라는 잣대로 텍스트의 혼란(복잡성)을 일률적으로 잠재우던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도대체 식민성은 무엇이고 탈식민성(자생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불법주차 스티커처럼 손쉽게 발부가능한 개념들인가? 어쩌면 문제는 도리어 탈식민성의 공간을 너무 손쉽게 가정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의문도 든다. 하정일 비평의 이론적 기반으로 보이는 탈식민주의는 외래담론인가? 아니면 자생담론인가?
중요한 것은 외래담론과 자생담론을 구별한 후 후자에 입각해 전자를 주체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구분은 결국 자생담론이라는 것을 실체로서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엄밀히 말해 그것은 학문제도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현재 횡행하는 담론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오래 전에 들어와 제도로 완전히 정착된 것에 대해서는 둔감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수용주체 즉 ‘국문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자생적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제 담론이 아닐까? 식민성이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한다면, 이처럼 사실상 외래담론으로 외래담론을 비판하면서 ‘자생담론’이라는 가정을 실체화(자연화)시키는 행위에 부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의 입장에서 서서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왜 오늘날의 한국문학계는 자생담론이 아닌 외래담론과 씨름하고 있을까?” 이는 다른 말로 “우리의 자생담론은 왜 현재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 하정일은 그것은 ‘자생담론의 빈곤’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유산을 무시하는 연구자나 비평가들의 식민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릇된 길을 가는 비평가들을 비판하고, 적어도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은 민족문학론자의 한사람으로서 외래담론이나 탐하는(식민성의 올가미에 걸린) 수입상(중개상)들을 올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계몽하는지도 모른다.
외래담론이냐 자생담론이냐의 단순도식에서 파생된 이런 계몽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한편으로 그것은 한국문학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충정어린 염려일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문제의 복잡성을 회피하기 위한 탈출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은폐된 것을 드러냄으로써(어두운 곳에 빛을 비춤으로써/왜곡된 것을 바로 잡음으로써) 해결된다면, 사실 그것은 문제라고도 할 수 없다. 진짜 문제는 어떤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지식이나 논리로 해결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특히 그것이 제도와 시스템의 근원과 맞물려 있을 때는, 신념이 논리를 대신하는 것도 모자라 그 스스로 논리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따라서 비평은 설사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신념을 논리로 착각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
하정일은 필자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너무 쉽게 긍정하고 있다는 점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이 테제를 선택의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여러 번 이야기한 것이지만, 가라타니가 제시한 ‘근대문학의 종언’은 문학이 끝났으니 소설을 그만 쓰고 문학평론을 그만 두라는 ‘외침’이라기보다는, 근대에 들어서서 커다란 의미를 부여받은 근대문학의 자명성에 던지는 ‘물음’이다. 따라서 그것은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가 가라타니의 테제를 수입/중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그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뿐이다. 하정일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외국의 일개 문학비평가의 한마디에 호들갑을 떤다’는 이유로 한국문학계를 한심하게 여기는 것 같다. 더구나 정작 일본에서는 잠깐 화제가 되다가 사그라진 오래됐으니 더욱 그럴만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논자들끼리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문제점은 분명 존재하지만(이 소통장애는 한국문학시스템 전체와 연관돼 있기에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지 간에 이 테제와 꾸준히 씨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문학이 가진 ‘최소한의 건강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목에 걸린 가시를 괴로워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한국문학은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오히려 자기동일성의 자명성 위에서 이루어지는 민족문학론으로의 손쉬운 회귀를 경계한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이미 낡은 테제가 한국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네이션에 의한 구분(일본인/한국인, 일본문학/한국문학)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입장에서 나오는 견해에 지나지 않다.
나는 ‘근대문학의 종언’이 일개의 외국비평가가 던진 테제(담론)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한국문학계가 그것이 나온 배경(일본문학계)보다도 열심히 그 테제가 가진 문제의식을 공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그것은 이미 한국문학담론이 됐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고 일본의 문학연구가가 혹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된다면, 아마 그는 우리의 논의를 참조하지 않고서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날 어느 누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독일제 담론이라고 생각하는가? 문학적 유산은 국경과 네이션을 뛰어넘으며, 그것은 자생담론을 보호 하에서 이루어지는 수입/수출보다는 문제의식의 공유에 의해 무한히 배분될 뿐이다.(조영일 문학평론가)
09. 03.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