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락의 전이 (개역판)
슬라보예 지젝 지음 / 인간사랑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지젝은 한나 아렌트와 함께 올 한해 내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졌던 저자이다. 따라서 지젝의 책이 좀더 많이 번역 소개되기를 누구보다도 바라는 편이다. 물론 전제는 있다. '제대로 된' 번역들을 통해서 소개되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상당히 유감스럽다.

작년에 두 종이 번역돼 나오고, 이 개역판까지 포함하면 올해는 세 종이 번역돼 나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정도를 제외하면(물론 여기에도 오타와 오역이 없지는 않다) 나머지 두 종은 제값을 못하는 번역서들이다. 특히 이 <향락의 전이>의 경우는 차라리 나오지 말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불성실하고 무책임하다.

역자 자신이 개역판의 서문에서 시인하고 있듯이 초판은 '몇 군데 오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역자가 말하는 '몇 군데'라는 건 주로 대중문화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영화감독과 제목명의 오역인데(거의 맞는 게 없었다), 개역판에서는 이를 상당 부분 바로 잡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비록 기본이라 하더라도) 역자의 노고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거의 전부이다. 내 생각에 이 번역은 몇 군데 정도가 읽을 만할 따름이다.

영화명과 주인공에 대해서도 '시라노'를 여전히 '키라노'로, 그의 여인 '록산느'는 '로잔느'라고 옮기고 있다. 그래도 이건 영어가 병기돼 있어서 눈치껏 읽으면 된다. 하지만, 멀쩡한 유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차'는 왜 '쿤스투리카'로 개명해놓고, 거기에 'Kunsturica'(406쪽)라고 병기까지 해놓는가?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아니다. 역자는 본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의미있는 교정을 하지 않았다(내가 읽은 1장 등에서 내용이 제대로 고쳐진 대목은 딱 한군데였다).

예컨대, 1장 시작부터 '부모의 성적 착취'(parental sexual abuse)를 역자는 '아버지의 성적 남용'(28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욕동이론과... 해석의 이중성'을 '욕동이론의 이중성'(29쪽)으로 옮기고, 정신분석에서의 '수정주의'를 줄곧 '개량주의'(30쪽 이하)로 옮겼다. '제2의 본성'(second nature)은 '이차적 자연'(33쪽)으로 옮기고, '억압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려는 요구'는 계속 '억압의 모든 장벽을 벗기려는 요구'로 옮겼다. '한순간이라도 멈춰서 생각해본다면'을 '한순간이라도 생각하기를 멈춘다면'(44쪽)으로 옮기고, '반계몽주의'는 '계몽주의'(170쪽)으로 옮겼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부분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러한 부분들이 역자에게는 '몇 군데 오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 독자가 이 '교양서'를 읽어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때문에 '이 역서가 이미 지젝의 작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사람들이 그의 글쓰기를 즐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확인해 주기를 바라고,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독자들에게는 지젝과의 꾸준하고 의미있는 지적 의사소통이 시작되기를 기대한다.'(11쪽)는 역자의 바람은 정치코미디에 가깝다. 지젝의 작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 역서는 짜증만을 불러일으키며,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독자들에겐 애꿎은 고역만을 선사한다. 한국의 출판계와 지식사회에선 어째서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벌어지는지 정말 궁금하다(물론 이전에 더 심한 오역서들도 수두룩했다. 문제는 21세기 대낮에도 이런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몇 군데 오역'을 손본 대가로 출판사는 책값을 10,000원이나 올렸다. 물론 하드커버로 장정이 바뀌긴 했지만(정말 종이가 아깝다), 역시나 무책임한 처사이다. 초판에 문제가 있다면, 전량 회수하여 환불하거나 구입한 독자들이 개역판과 교환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그런 이후에라면 '독자들의 '너그러운' 다시 읽기를 권하는 바이다.'라는 역자의 부탁이 덜 민망했을 것이다. 물론 지젝의 열성적인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책에 대해서 결코 너그러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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