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성의 구조
이마무라 히토시 지음, 이수정 옮김 / 민음사 / 1999년 1월
평점 :
절판


아사다 아키라나 가라타니 고진을 읽기 전만 해도 일본학자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그들은 요약정리는 잘하지만(그래서 참고서로는 제격이지만) 깊이는 없다는 것. 하지만, 이마무라의 책까지 좀 뒤늦게 읽어 보니까 깊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니 깊이라기보다는 독특한 맛을 느낄 수가 있다. 요컨대, 이들은 일급의 요리가들이다. 이마무라가 근대성(modernity)이란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낸 요리 또한 생각보다 정갈하고 먹음직스럽다.

맨앞에 놓인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의 책이 근대(그리고 근대에 있어서 인간의 경험)에 대한 역사철학적 해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하나의 가설적 해석인데, 그는 그러한 해석을 통해서 근대의 전체상을 그려보고자 '시도'(essai)해 본다. 시도라는 건 한번 해본다는 말인데(따라서 남들은 전혀 다르게 해볼 수도 있다), 저자의 경우는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게다가 이 '시도'라는 것을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근대의 '기도'(projet) 정신과 대비시키기까지 한다.

'근대의 기도 정신은 선취 의식과 구축주의의 일원론으로 일관하여 다른 가능성을 배제해 왔다. 기도 정신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가능성을 살릴 수 있는 <시도의 정신>에 설 수밖에 없다.'(220쪽)

이 시도의 문학적 장르명은 에세이다. 즉 이 책은 근대성에 관한 A급의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A급인 것은 우리의 상식을 돌파해나가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근대=기계론적 세계상'이란 등식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지만, 저자는 거기에서 만드는 의식과 제작으로서의 세계를 끄집어 내고, 또한 진보의 시간관, 개체주의와의 연관성을 밝혀낸다. 개체적 개인주의적 세계관의 바탕이 기계론적 세계상이란 걸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지만, 근대사회를 떠받치는 의식이자 도덕의 원리로서 미래에 대한 기도(projet)를 제시하고, 그 점에서 (자본주의)기업가와 (사회주의)혁명가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제값을 하고도 남을 만하다.

저자가 참신한 시각과 개념들을 구사하며 그려내고 있는, 1968년 이후 회의되기 시작한 근대의 초상은 한번쯤 읽어볼 만한다(이 또한 시도이다). 아키라나 고진과 마찬가지로 군더더기없는(사무라이 필법인가?) 간결한 문체에 실린 사고의 힘을 느낄 수가 있다. 짐작에 그 힘은 일본의 번역문화에서 나오는 듯한데, 고전의 태반이 미번역된 우리의 경우 서구 문명의 고전들을 원어로 읽어가자면, 한두 작품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에는 도달할 수 있겠지만, 이렇듯 폭넓은 시야의 박람은 얻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요리를 하려고 해도 우선은 재료가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끝으로, 저자가 근대의 이해/회의를 위한 필독서로 제시하고 있는 책들을 적어둔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 벤야민의 <독일 비극의 기원>(1928),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1929)이 그것들이다. 벤야민의 책이 우리말로 빨리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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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1-0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 책 재밌을 것 같아요. 서평에 대한 감상은, 저 책을 읽어본 뒤에 하도록 할께요.

(과연 언제가 되려나 -_-)



.. 이런 식으로, 로쟈님 서재에 들락거리게 됐다고 '신고'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