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가와 황홀 - 우리시대의 지성 5-014 ㅣ (구) 문지 스펙트럼 14
송상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3월
평점 :
작고한 평론가 김현의 글 어디에선가 송상일이란 이름을 본 적이 있다. 퍽 상찬했던 거 같고, 종교적이라는 얘기도 붙어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는 한 세기가 지났다! 김현이 작고한 지도 10년이 넘었고! 아주 드물게 보는 송상일의 이번 에세이집은 그런 기억들을 떠올려 주었다. 아주 황홀하게!...
<책머리에서> 저자는 '시간의 틈새들을 훔치듯 낚아채며 썼다. 그래서 천식 앓는 문장이 되었다.'고 미리 겸양조(혹은 변명조)의 문장을 쓰고 있지만, 가끔 천식을 앓는 나는 아직 그와 같은 문장, 천식 앓는 문장(!)을 쓰지 못한다. '천식 앓는 문장'이란 표현에서도 짐작되는 바이지만, 책은 산문(어떤 논변)이라기보다는 시이다. 그리고 저자가 줄곧 국가와 대응시키면서 옹호(?)하고 있는 것도 역시 시이다. 그는 시로써 시를 옹호한다. 일종의 동어반복인데, 그의 말을 빌면, 시는 동어반복의 운명으로써 모든 '있는 것들'에 저항한다. 아니 본때를 보여준다. 마치 논개의 낙법처럼...
<국가와 황홀> <존재와 무> <제유> 세 개의 장과 보탬말, 그리고 부록(<똥 이야기>)으로 돼 있는 이 책을 지난 한주 아주 아껴서 읽으며 나는 한 가지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간혹 왜 시도 때도 없이 (허)무에 직면하는가, 혹은 그에 포박당하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저자에 의하면 나에겐 아무래도 '시인'될 기질이 있는 모양이다!
그에 의하면, 시는, 그리고 시인은 존재가 아닌 (허)무에 들려 있는 존재(또 존재?)이다. 시인은 미래를 가늠하지 않으며(계산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떠한 생산적 활동과도 무관하다. 에로스(생식적 섹스)와 무관한 에로틱(생식 없는 섹스)이 그러하듯이. 그리하여 생식 없는 섹스에 몰두할 때, 즉 에로틱에 몰입할 때, 그리고 시를 쓸 때, 우리는 얼빠진 존재들이다. 저자는 이 얼빠진 존재의 위엄에 대해서 아주 우아하면서도 튼튼한 문장들로 말한다. 그 점이 맘에 든다...
황홀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것이니, 이 책에서 국가/황홀이란 이분법이 결국 무얼 생산했느냐고 묻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리라. 다만, 읽고 기뻐하며 가까이 둘 일이다. 이런 문단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제값을 다하고 있으니까...
'정액을 소비하는 동물은 시를 쓰는 동물밖에 없다. 정액의 낭비는 유별나게 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금욕주의는 동물적인 데가 있다.'(34쪽) 우리 주변엔 부자 동물과 가난한 동물 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