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나 정세와 관련한 책은 직접 구입해서 읽는 일이 드물지만(내가 선호하는 책은 '일독'할 책이 아니라 여러 번 읽을 책이다), 그 반대급부로 리뷰들은 꼬박꼬박 챙기게 된다. 이번주에 읽어볼 만한 '리뷰'는 미국의 세기 '이후'에 대한 전망을 다루고 있는 책 두 권이다. <제국은 무너졌다>(책으로보는세상, 2009)의 저자는 프랑스의 경제학자이고, '세계 권력의 대이동은 시작되었다'란 부제를 앞세운 <제2세계>(에코리브르, 2009)의 저자는 미국의 국제관계 전문가이다. 특히 <제2세계>는 660여 쪽의 두툼한 분량이 독서욕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끌어내린다. '일독'의 여부는 몇 편의 리뷰를 읽고서 판단해보는 게 좋겠다.    

한겨레(09. 01. 17) '팍스아메리카나’ 왜 10여년밖에 못갔나 

1991년 소련 붕괴와 걸프전쟁은 미국이라는 일극 초대국의 시대, 곧 미국의 세기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팍스 아메리카나의 도래를 자축하는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이 환호성과 함께 미국의 세기는 종말을 고했다. 아메리카 제국의 존속기간은 1991년부터 2003년 이라크 침공까지 불과 10여년. 미국의 세기는 배아 상태에서 사라져버렸다. 21세기는 제국 미국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제국의 소멸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이는 마치 20세기가 영국 제국의 몰락을 확정짓고 소련의 등장과 독일·이탈리아 파시즘의 대두를 초래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된 것과 닮았다.

미국 제국의 소멸은 한국 외환위기(아이엠에프 사태)도 한 축을 담당했던 1997~8년 금융위기와 미국 대응의 실패가 그 출발점이었으며, 2008년에 시작된 금융공황은 관에 마지막 못질을 한 것과 같다. 왜 미국의 세기는 배아 상태에서 사라져버린 걸까? 파리10대학과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를 거쳐 파리 산업화양식 비교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자크 사피르(55)는 5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1997~8년 금융위기 때 미국은 위기를 예측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세계경제를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으로 퍼져나간 위기를 미국은 예측도 못했고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했다. 둘째, 이로 인해 1980년대 이래 정립된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질서의 정당성에 대한 도전이 본격화했다. 시애틀과 제네바 반WTO(세계무역기구) 시위, 도하어젠다 협상 실패는 그 구체적 표출이었다. 셋째, 실패가 계속되자 미국은 군사력을 동원해 자국 헤게모니를 관철하려 했고(1999년 코소보 사태 개입과 2003년 이라크 침공), 이는 더 큰 실패를 불렀다. 넷째, 1998년 러시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러시아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자국의 세계전략에 편입시키려는 이중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오히려 러시아는 탈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위기를 벗어나면서 강대국으로 부활해 국제관계의 맥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다섯째, 약체화된 러시아를 자국에 종속시킴으로써 중국의 급부상에 대처하려던 미국의 계획은 빗나갔으며, 그 초조감 때문은 미국은 재군사화로 방향을 선회하고 이라크와 아프간 침공을 강행했다. 이는 막대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지역을 통제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압박수단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부시 정권과 네오콘 사단만의 책임은 아니다. 클린턴 정권도 다를 바 없었으며, 따라서 “부시의 백악관 입성은 이 동학(動學)의 원인이라기보다 징후에 가까웠으며, 기폭제라기보다 동학의 현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오바마의 민주당 정권이 등장하면 세계정치의 흐름이 1991년 이전의 동학을 되찾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향후 세계는 주권국가의 부활과 다극질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 이명박 정권은 사피르가 파악한 이런 세계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러는 역주행을 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뒤죽박죽 모순된 정책들을 내세우는 것은 신자유주의로 경제를 살리겠다고 공약했으나 그것과 정면 충돌하는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하자 땜질식 임기응변에 골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이 보기에 미국의 세기와 신자유주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명박 정권의 이런 정책은 노무현 정권의 ‘좌파 신자유주의’만큼이나 말 안 되는, 그 이상의 실패를 부를 패착이다.(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09. 01. 17) 미·중·유럽 3극 ‘자원전쟁’…한국은 어디로

뉴 그레이트 게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1백여년 간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영·일동맹과 러-일전쟁은 그 그레이트 게임이 동북아시아에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게임은 결국 한반도 분단으로 귀착했고 우리의 운명까지 뒤틀었다.  

지금 다시 자원 풍부한 전략 요충지 중앙아시아의 거대한 이권을 놓고 새로운 도박, 뉴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이번엔 미국·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중국이 이끄는 상하이협력기구(SCO)가 맞붙었다. 옛 당사자였던 러시아는 이번엔 ‘스윙 스테이트’(미국 대선에서 승패를 좌우할 경합주에 비유)다. 미국의 일극 패권은 역설적이게도 2003년 이라크침공으로 패권 강화에 나서는 순간 급속히 저물기 시작했다. 나토가 중앙아시아를 확보하는 길은 옛 주인 러시아를 제 편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게 안 된다면 승자는 상하이협력기구, 곧 중국이 된다.

러시아가 상하이협력기구 주요 멤버인 만큼 중국의 승리는 보장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게다가 미국은 러시아를 나토에서 배제한 채 러시아 문지방까지 나토를 확장하고 미사일방어(MD)체제를 거기에 배치하는가 하면 옛 소련 구성국들의 반러·친서방 정변을 부추기는 등 러시아를 극도로 자극했다. 푸틴 집권 이후 러시아는 그런 서방에 노골적으로 반발하면서 대응체제를 정비하고 있다. 상하이협력기구 성립 자체가 러시아의 그런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사태가 간단치 않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전략적 파트너인 중국의 손을 들어준다는 보장이 없다. 연해주 등 러시아 극동지방에는 700만의 러시아인들이 살고 있는데, 소련 해체 뒤 그들 중 다수가 유럽 쪽 러시아로 이주하거나 서방으로 탈출하고 있다. 바로 인근 헤이룽장성 등엔 중국인이 1억 넘게 살고 있고 해마다 약 60만 중국인들이 러시아 영토로 불법이주한다. 러시아 극동의 거점도시 블라디보스톡은 ‘동방의 지배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오늘날 동방의 지배자는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다. 인구통계상으로, 경제적으로 중국의 우위가 급속히 확립돼가고 있고 마침내 정치적으로도 러시아 극동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한때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던 몽골도 소리없이 재복속해가고 있다. 몽골의 광산과 농업, 삼림의 태반이 이미 중국인 차지다. 러시아 군부는 중국이 동시베리아와 사할린 자원지대를 점령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하는 시나리오를 작성해 놓고 있다. 해마다 50여만씩 인구가 줄고 있는 인구감소국 러시아의 광대한 시베리아 전체가 이미 체제 유지가 어려울 만큼 인구희소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서쪽에서 유럽이 옛 소련 속방들을 차례차례 흡수하고 동쪽에선 중국이 야금야금 러시아 영토를 잠식해 들어가면 수십년 안에 세계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지 모른다.   

버락 오바마 선거캠프 대외정책팀에도 관여했다는 파라그 카나의 <제2세계>에 이런 얘기들이 들어 있다. 인도 태생으로 조지타운대 국제관계대학원을 나와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카나는 뉴 그레이트 게임에서 중국이 승리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 단독으로 세계질서를 좌우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미국 일극체제 전망이 단기간에 무너진 뒤 세계는 유럽연합(EU), 미국, 중국 3대 제국의 협치(거버넌스)체제로 정립되고 있다는 게 카나의 생각이다. 3극체제다. 최근 2년 동안 그가 50여개 나라를 돌며 이런 세계질서 재편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내린 결론이다.

원래 ‘제2세계’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지칭했다. 서방 부국들을 제1세계라 했고 가난하고 불안정한 나머지 국가들을 제3세계라 불렀다. 카나는 사회주의권 몰락 뒤 현질서 수혜자인 1세계와 불이익을 당하는 3세계 사이에 낀 나라들을 포괄적으로 2세계라 지칭한다. 1세계에서 탈락한 나라와 3세계에서 올라온 나라들이 뒤섞여 있는, 1세계적 특징과 3세계적 특징을 동시에 지닌 ‘고정되지 않고 이행중인’ 나라들이며, 그들이 3극 중 어느 쪽과 제휴하느냐에 따라 21세기 세력균형을 결정할 티핑포인트 국가들이다. 그들의 계산과 움직임에 따라 3극, 나아가 세계의 향배가 결정된다. 카나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남미, 중동, 그리고 동아시아 등 5개 전략지역의 제2세계 주요국가들을 찾아가 정세파악이 될 때까지 머물며 관찰하고 기록했다. 지미 카터 정부 때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쓴 미국의 세계전략 지침서 <거대한 체스판>의 최신 버전이라고나 할까.  

중국은 최근에야 제3세계에서 제2세계로 올라왔지만 종합국력에서 미국, 유럽연합과 함께 세계질서를 좌우할 3대 슈퍼파워의 하나로 분류했다. 일본은 제1세계지만 특이한 문화적·역사적 배경 등으로 아시아에서 광범위한 충성을 확보하기 어려워 중국에 이어 제2바이올린 역할밖에 맡을 수 없다고 봤다. 카나는 한국도 제1세계로 분류하면서 제3세계 북한이 무너질 경우 중국과 한국에 의해 아시아의 핀란드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로버트 캐플런의 얘기를 인용했다.

 

카나의 예측대로 푸틴 이후 경제강국으로의 재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결국 쇠퇴한다면 피할 길 없는 동북아시아 정세 급변에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서방적 시각의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카나의 예측이 틀릴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19세기까지 조공체제를 이끌었던 슈퍼파워 중국이 급속도로 재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중앙아시아·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남미·중동 등 모든 지역에서 미국·유럽과 힘을 겨루고 있다. “미국 일변도의 정책은 이제 재고하고 중국·유럽과의 유대 강화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하며 미국·중국과의 등거리 외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한 옮긴이의 얘기는 설득력이 있다.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실제로 그렇게 움직여가고 있는 현실을 카나는 보여준다. 하지만 한국은 지금 다른 길을 가고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09.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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