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대통령 당선자 버락 오바마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는 소식이다. 오바마의 승리에는 부시의 실정도 큰 몫을 한 것으로 분석되지만, 그렇다고 그의 '선임자'인 부시와 맞승부를 펼친 건 아니었다(오바마의 상대는 맥케인이었다). 부시와 맞장을 뜬 건 이라크의 한 기자였다. 며칠 전 바그다드의 기자회견장에서 부시에게 신발을 던져 '국민적 영웅'이 된 알자이디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부시에게 신발 던지기' 개인적으로 꼽은 올해의 외신 사진이다.  

더불어, 지난주에 출간된 나오미 울프의 <미국의 종말>(프레시안북, 2008)이 이주의 책이다(사실은 이번주 서평도서로 고려하고 있었는데, 추이를 더 지켜봐야겠다). '혼돈의 시대, 민주주의의 복원은 가능한가'란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저자가 말하는 '미국의 종말'은 '미국 민주주의의 종말'이다. 그 종말과 함계 오는 것이 파시즘이며, 따라서 <미국의 종말>은 민주주의 종말에 대한 진단이면서 파시즘에 대한 경고로 읽어야 한다. 이쯤이면 바로 떠오르는 책이 있지 않나? 역시나 우리가 파시즘으로 가는 전환기에 있다고 진단/경고하는 우석훈의 <괴물의 탄생>(개마고원, 2008) 말이다. 내년 이맘때쯤엔 <한국의 종말(The End of Korea)>이란 책이 화제가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고 우려스럽다. <미국의 종말>을 반면교사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아, 이 '미국제' 종말!).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아울러 아룬다티 로이의 사례를 들어 문학인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장정일의 칼럼도 같이 옮겨놓는다. '잘난 소설가들'에게 책임을 묻고 있지만 사실 반성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이명박 정권의 탄생이 우리의 책임인 것처럼).

한겨레(08. 12. 20) '부시 파시즘’은 어떻게 미국을 망가뜨렸나

‘미국은 끝장났다(The End of America)’고 선언한 나오미 울프의 책이 나온 것은 2007년. 진보적 사회비평가 나오미가 보기에 미국은 이미 그 시점에서 더는 미국이 아니었다. 금융공황이라는 경제파탄 이전에 정치·사회·도덕적으로 이미 파산상태였다. 나오미는 부시 집권기간을 파시즘 체제로의 이행기라고 진단했다. 놀랍게도, 버락 오바마의 등장으로 주춤거리고 있는 미국 파시즘의 불길한 전조들이 한국에선 지금에야 그대로 복제돼 한층 더 강도 높게 활개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미국의 종말>이라는 거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06년 6월 환경운동가 스티븐 하워드가 아들을 피아노 레슨에 데려가다가 부통령 딕 체니 일행이 근처 쇼핑몰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다가가 말했다. “내가 보기엔, 당신의 이라크 정책은 비난받을 소지가 있소.” 10분 뒤 비밀 경호원이 그에게 수갑을 채웠고, 지역경찰은 ‘부통령을 공격한 혐의’로 하워드가 징역 1년을 살 만한 내용의 조서를 꾸며 기소했다. 그해 7월 중앙정보국(CIA) 컴퓨터 보안전문기술자 크리스틴 액스미스는 물고문을 비난하는 메시지를 블로그에 올렸다가 13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잃고 기밀문서 취급자격도 박탈당했다. 같은 시기 부시 정부는 누구든 ‘적대적 전투요원’으로 낙인찍히기만 하면 재판절차도 없이 수감해서 무기한 감금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만들었다.(관타나모와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자행된 끔찍한 범죄행위를 상기해보라.) 8월엔 시위장면을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검찰에 넘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블로거가 수감당했고, 연방검찰 당국이 <뉴욕타임스> 취재기자들 전화통화 내역을 조사해도 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해 3월엔 부시 정권에 ‘비협조적인(민주당 지지 유권자등록운동 시민단체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다는 이유)’ 연방검사 9명이 해고당했다.

<미국의 종말>은 부시 정권이 미국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그 ‘열 가지 비법’을 가르쳐 준다. 1. 안팎의 위협을 부각시켜라. 2. 비밀수용소를 건설하라. 3. 준군사조직을 육성하라. 4. 일반시민들을 사찰하라. 5. 시민단체에 파고들어라. 6.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체포와 석방을 꺼리지 마라. 7. 핵심인물들을 겨냥하라. 8. 언론 자유를 봉쇄하라. 9. 비판은 ‘간첩행위’로, 비판하는 자는 ‘국가반역죄’로 몰아라. 10. 법의 지배를 뒤엎어라.

미국 우익 패권주의세력이 영구집권을 위해 고안해낸 이 10가지 수법은 히틀러나 무솔리니, 스탈린 그리고 프랑코, 피노체트, 수하르토, 소모사 등이 써먹던 수법을 그대로 따온 것임을 나오미는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망가졌다. 결국 공화당 정권도 무너졌다.

이 땅의 우익 파시스트들이 유행시킨 이른바 ‘좌빨’이라는 합성어가 미국 파시스트들이 정치적 반대세력 제거용으로 써먹은 ‘적대적 전투요원’이라는 매카시적 용어의 복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책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땅의 우익은 말하자면, 미국 우익의 영구집권계획을 이제야 열심히 복습하면서 일본 우익의 낡은 수법까지 가미해 한술 더 뜨고 있다. 촛불시위자 처벌, 역사교과서 수정과 우익역사 특강, 일제고사 관련 교사징계, 단체장·고위공무원 판쓸이, 사이버 규제, 백골단 부활, 방송장악과 언론관련법 개악, 그리고 대북정책, 에프티에이(FTA) 날치기 처리…. 판박이다.

나오미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쌓아올리기는 어렵지만 무너뜨리는 건 한순간이라며, “황혼의 땅거미처럼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파시즘의 전조에 눈감은 채 그것을 남의 일로 치부하면 머지않아 모두가 그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08. 12. 20) 논픽션 무시하는 ‘잘난’ 소설가들에게

인도의 여성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30대 중반에 발표한 첫 장편 <작은 것들의 신>(문이당, 1997)으로 그해의 부커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독후감이 바쳐진 데는 로이의 출세작이 아니라,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 2004)라는 서정적인 제목을 가진 정치평론집이다. 여기서 로이는 인도 정부가 벌이는 세계화 정책과 무절제한 댐건설이 어떻게 빈곤계층의 생존을 위협하는지, 미국의 패권주의와 거대 자본가들의 탐욕이 중동을 식민화하기 위해 어떻게 전쟁을 일으키는지 고발한다. 무례한 단안이지만, 동년배가 쓴 이 책을 읽다보면, 아직 우리는 유치원생이란 생각이 든다. 인도가 겪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는 바로 우리의 현실이며, 미국의 대외정책이 일방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은 주한 미군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우리 속에 파고든 자본과 미국에 대한 편애는 독처럼 깊다.

“대체 언제부터 작가들이 논픽션을 쓸 권리를 포기했는지요?”라는 로이에게, 소설가이기 때문에 오로지 소설을 써야 한다고 믿는 것은 소설가에 대한 오해다. 실제로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 큰 차이를 보지 못한다”는 로이는 첫 소설 이후, 소설을 작파했다. 갑작스런 비약이지만, 비비케이 의혹에 관한 단 한 권의 논픽션도 없다는 것은, 우리의 글쓰기가 얼마나 편협하고 위계적인지 웅변한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라면 벌써 셀 수 없는 책이 쏟아졌다.

로이처럼 소설을 그만두고 논픽션이나 정치평론을 쓰라는 게 아니다. 단지 아홉 권의 소설을 쓴 뒤, 단 한 권 정도는 악취 풍기는 의혹이나 공공선에 관심을 할애하는 것이 과연 그 잘난 소설가의 품위를 해치고, 예술가의 자존심에 금을 내며, 작가로서의 본분을 방기하는 일이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일례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의 충격으로 <언더그라운드>(열림원, 1998)를 썼다. 그가 그 사건을 소설의 ‘글감’으로 삼지 않고 논픽션을 택한 것이야말로, 문학적 글쓰기의 좁은 정의를 넘어 사회와 직면한 고귀한 행위였다.

유치원생들에겐 ‘장르계급’이라는 게 있어서, 소설과 시만이 글쓰기의 왕도며, 이외는 모두 잡문이다. 이렇듯 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논픽션에 맞춤한 주제와 소재들로 논픽션을 써야 할 사람들이 ‘팩션’으로 월경한다. 소위 진지한 문학계(?)가 ‘팩션’에 당하는 수난은 인과응보겠지만, 정작 안타까운 것은, 고증과 논리로 무장해야 할 논픽션 정신이 ‘팩션’이란 허위의식에 찬 형식에 썩어나는 거다.

독자들도 문제다. 설혹 비비케이에 관한 논픽션이 있더라도, 소문과 잡담으로 진실을 대신하며, 그저 ‘누군가가 우리를 잘 살게 해주기’만 바란다면 만사휴의다. 선진국의 연간 베스트셀러가 대부분 논픽션인 것을 보면, 민주주의의 발전이나 유지와 그것과의 관계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 소설 나부랭이는 집어 던지고 <9월이여, 오라>를 읽자!(장정일/ 소설가)

08. 12. 20.

P.S. 이미 알려진 대로 '부시 신발 투척' 사건은 플래시 게임으로도 번져가고 있다(하긴 이명박 게임도 생기지 않았나). 이런 현상은 이제 '젼형적인' 루트가 되었다. 21세기 '정치' 혹은 '운동'은 이런 조건(토대)과 어떻게 만나야 할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룬다티 로이의 책으론 소설 <작은 것들의 신>(문이당, 2006) 외에 논픽션으로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사, 2004),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이후, 2005), <생존의 비용>(문학과지성사, 2003) 등이 번역돼 있다.

한편, 나오미 울프의 경우는 <미국의 종말>이 유일하게 소개된 책인데, 그녀의 출세작은 스물 여덟 살에 펴냈다는 <아름다움의 신화(The Beauty Myth)>(1990)이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책 70권의 하나로 지칭하면서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와 나란히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도발적인 새로운 페미니스트 책자"라고 평했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이 이상한데, <여성의 삶을 바꾼 책 50권>(부글, 2007)에서 대략적인 소개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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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8-12-20 11:36   좋아요 0 | URL
위계의 문제와 전혀 무관하진 않겠지만, 논픽션의 기피가 단순히 '품위'와 '자존심'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하기에는 요즘 한국소설이 너무 안 읽힙니다. 주변에 책 꽤나 읽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한국소설을 화제로 삼는 일이 드물던걸요. 문학권력 논쟁과 잇따른 표절 시비로 신뢰도 크게 꺾였고요.

단지 논픽션이 쓰기 어렵기 때문에, 사실의 진위 여부나 고증을 둘러싼 논란 같은 것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못 쓰거나 안 쓰는 게 아닐까 싶어요. "'팩션'으로 월경"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논픽션이 매력은 있는데 제대로 된 논픽션을 쓰기에는 이래저래 신경써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언제든 '픽션'으로 둘러댈 수 있는 안전하고 간편한 길로 가는 거죠. 장정일 씨가 확실히 문단에 거리를 두다 보니, 필요하지만 내부에서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들을 과감하게 종종 던져주네요. 지난 번 녹색평론 이야기도 그렇고요.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12-20 23:1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공감합니다. 어렵거나 능력이 모자라서이지 '품위' 때문은 아닌 듯해요. 장정일은 원래부터도 문학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던 편입니다...

Mephistopheles 2008-12-20 13:20   좋아요 0 | URL
미국을 망가트린 열가지 비법..
이거 미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느낌도 제법 나는데요??

로쟈 2008-12-20 23:13   좋아요 0 | URL
네, 그게 핵심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20 15:35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특징 중의 하나가 논픽션이나 전기류가 잘 안팔린다는 겁니다.그건 우리나라 특유의 문제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명예훼손이라면서 작가를 고발해버리잖아요.그런 걸 보면 정말 별나기는 해요.일본 문고판만 해도 50년 이상 된 논픽션이 지금도 꾸준히 팔리는 게 많더라구요.

로쟈 2008-12-20 23:14   좋아요 0 | URL
저는 논픽션이 작가들보다는 기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몫이면서 의무죠. 기자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