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방한하기도 했던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가 내년 6월경 한국어로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역자인 박미애 박사가 '글로벌 위험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을 미리 정리해주고 있는 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아주 오랜만에 '세계의 책' 카테고리에 넣어둔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2. 11) 글로벌 리스크는 세계시민사회를 도래시키나

울리히 벡의 신간 <글로벌 위험사회>(Weltrisikogesellschaft)가 지난해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전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불안을 ‘글로벌 리스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벡의 논의를 통해, 오늘날 세계적 위기를 타파할 해결책을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미국의 비우량담보대출 사태로 촉발된 경제위기의 한파가 전세계를 뒤덮고 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결정적인 해결책이 마땅히 없다는 사실이 사태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몇 개국에 국한되었던 90년대 아시아 금융위기와 달리, 현재의 경제위기는 유럽의 최북단 조그만 섬나라 아이슬란드에 이르기까지 예외를 두지 않고 무차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기의 파괴력을 피해갈 수 있는 곳, 그 영향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가 글로벌 위험지대에 앉아 있다”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진단이 어느 때보다 현실감과 설득력을 얻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1986년 11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7개월 후 벡은 <위험사회>를 출간했다. 당시 서구사회를 사로잡고 있던 불안과 불편함을 ‘리스크’라는 개념으로 적확하게 포착한 그의 분석은 30여 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이제 사회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사회는 스스로 생산한 위험에 직면해 있지만, 이 위험을 이슈화하고 논의함으로써 성찰적이게 된다는 근본 명제로 벡은 산업적 현대와 구분되는 제2의 현대를 기록하는 한편, 현대 안에 내재된 자기혁신의 힘을 강조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7년 벡은 과거의 진단을 한층 강화하고 확대하여 ‘글로벌 위험사회’를 논한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그동안 재앙과 리스크 역시 세계화되었고, 이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리스크와 ‘위험’, 리스크와 ‘재앙’을 구분하는 개념의 세분화와 국민국가적 관점에서 초국가적 관점으로의 시각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9.11사태로 서구 민주주의의 자기신뢰를 파괴한 국제적 테러리즘, 쓰나미와 카트리나로 현실화된 기후재앙, 지금까지 위력을 떨치고 있는 국제적 금융위기와 같은 ‘큰 리스크’가 현대사회의 근본 토대와 인간 실존의 자명성을 파괴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했다고 말한다.

재앙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지구온난화로 인해 도쿄와 런던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 가능성, 유전공학의 획기적 발전이 가져올 인간형질의 변화,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테러공격 등 벡이 책 서두에 극적으로 묘사하는 재앙의 시나리오는 묵시론적 종말의 무시무시한 예언을 연상시킨다. 19세기 말 선배들을 쫓아 벡 역시 세계몰락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계몽된 성찰적 현대성 속에 더 이상 자기극복의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역시 인간의 감수성을 연마하고 행위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한스 요나스가 말한 의미에서) ‘공포의 발견술’을 사용하는 것인가?

지난해 독일에서 <글로벌 위험사회>의 출판 이후 나온 비판 중 하나는 이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 같은 태도, 벡이 ‘연출하는’ 재앙 시나리오의 과장된 측면을 겨냥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현재 전세계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현실 속에서 무색해진다. 글로벌 차원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큰 리스크’는 우리가 이제까지 사용했던 합리적 위기대처 수단만으로, 즉 지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성찰만으로 극복할 수 없으며, 그것이 오히려 또 다른 리스크와 재앙을 불러올지 모른다는 그의 주장이 현실에서 검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성찰적 습득은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글로벌 성찰이 총체적 경제파국으로의 추락을 불러오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벡의 말은 리스크를 줄이려는 시도가 또 다른 리스크를 불러온 작금의 금융위기에 그대로 적용된다.   

벡이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말하는 리스크는 재앙이 아니라 ‘재앙의 예상’이다.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거나 테러공격이 발생하거나 금융위기가 발생함으로써 리스크가 현실이 되는 순간, 리스크는 재앙으로 변한다. 리스크는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미래의 사건이지만, 일어날 경우 경제적으로 보상할 수도, 기술적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재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 대량학살 무기가 테러리스트들의 수중에 떨어지면, 때는 이미 늦다. 기후재앙으로 해수면이 높아진다면, 때는 이미 늦다. 그러므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현재에 선취하여 그것을 근거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토대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역설과 딜레마가 글로벌 리스크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리스크를 함께 관리하는 세계시민사회
그러므로 글로벌 위험사회는 인류를 ‘전부 아니면 무’라는 상황 앞에 세우는 사회이며, ‘우리가 모르는지도 모르는 것’에도 불구하고 예측하고 행동해야 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벡은 바로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으로부터 ‘세계주의’의 계기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원인과 영향을 어느 한 지리적 장소나 공간으로 제한할 수 없고, 그 결과를 원칙적으로 계산할 수 없으며, 그 피해를 보상할 수 없는 글로벌 리스크는 지구촌 주민 모두에게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며, 원하든 원치 않든 문화적 타자를 자신의 지각 속에 포함시킬 것을 강요한다. 종교, 피부색, 국적, 삶의 상황, 과거와 미래가 서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의 실존을 위협하는 글로벌 리스크의 강요로 인해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세계주의는 비록 강요된 세계주의라 하더라도, 규범적 원칙일 뿐 아니라 현실이 된다. 

한편 먼 타자를 가까운 내부 타자로 수용하고, 문화적 타자에 대한 인정을 긍정적 가치로 해석하는 세계주의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내의 불평등에 대한 강한 감수성과 인식을 함축한다. 글로벌 리스크는 모든 사회 계층에, 모든 국가에 똑같은 정도의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무엇보다 뉴올리언스의 흑인 거주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기후재앙이 일어난다면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하는 사하라 사막과 히말라야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또한 글로벌 경제위기는 누구보다 서민계층을 힘들게 한다. 대부분의 경우 리스크를 결정하는 것은 선진국이고 리스크 결정에 따른 위험의 피해를 입는 것은 후진국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리스크 관리를 위한 세계시민사회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벡이 세계주의에 대한 요청으로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계시민사회’와 ‘글로벌 통치’이다. 우리 모두가 비자의적으로 세계위험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이상 ‘지구적 책임윤리’를 발전시켜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는 불가능한 해결책을 함께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벡은 비정부조직들과 사회운동들이 서로 연합한 초국가적 제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금융위기가 국가간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는 점차 (국적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세계시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세계시민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또 글로벌 통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하나의 과제로 남는다. 벡은 언뜻 글로벌 리스크를 연출하는 경고자의 역할에만 충실한 듯 보이지만, 미래 세계시민사회의 구축을 위해서도 글로벌 위험사회에 대한 철저한 현실인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박미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학 사회학 박사)

08. 12. 17.

P.S. 영어본으로는 <세계위험사회>란 책도 지난 1999년에 출간된 바 있다. 작년에 나온 독어본 <글로벌 위험사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업그레이드 버전일까?.. 내친 김에 울리히 벡이 지난 가을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도 옮겨놓는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다.

한겨레(08. 10. 24) 세계 위기 ‘국경없는 대응’ 필요/ 울리히 벡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중국식 체제와도 거리를 두어온 서구의 복음 원리, 즉 자유시장 경제가 하룻밤 사이에 허공으로 사라졌다. 열광적인 개종자라도 되는 듯 설쳐대는 은행가들은 정작 이윤은 자기네들이 챙기면서 손실은 ‘국유화’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때론 조롱거리로, 때론 악마 취급을 당하면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던 중국식 국가계획경제가, 이제 자유방임을 외쳐대던 앵글로색슨 사회의 중심부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일까?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고 온 세계정치의 대변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상 상황이 닥칠 것이란 ‘기대’는 전세계의 국경 없는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비상 상황은 더 이상 일국 단위가 아닌 범지구적인 사건이다. 세계 경제위기, 기후 변화, 테러리즘 등 ‘세계적 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회적, 공간적, 시간적인 의미에서 비상상황의 ‘탈국경화’ 가 진행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세계정치 무대에서 새로운 금융정책의 장이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서 열리고 있다는 점에서, 비상 상황은 ‘사회적’으로 탈국경화되고 있다. 이는 가장 좋은 구제방안을 둘러싼 각국 정부의 경쟁에서 잘 드러나는데,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처럼 경쟁의 승자에게는 국내외적으로 불사조처럼 정치적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고 있다. 그간의 완고한 국제정치 룰을 변화시키려는 권력 게임은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사이에서, 또 글로벌 경제와 정치, 초국가적 기구들 사이 등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게임에서는 누구도 혼자서만 승리를 챙길 수는 없다. 마치 한 나라의 정부가 글로벌한 테러리즘과 맞서 싸울 수 없듯이, 한 나라 정부가 혼자 힘으로 기후변화와 맞서 싸울 수 없고, 한 나라 정부 혼자서 금융시장의 대파국에 대처할 수 없다.

비상 상황은 ‘공간적’으로도 기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극도로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금융 리스크란 계산될 수도, 만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국민국가가 중심이 된 ‘첫번째 근대’의 공간에서도 가끔씩 나타나는 대규모 피해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피해는 적어도 만회할 수 있는 것이었고, 실제로 각국은 그 피해를 (예를 들어 금전적인 수단을 통해) 어느 정도 되돌려왔다. 그러나 만일 세계 금융 시스템이 붕괴된다면, 지구상의 기후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변화한다면, 테러조직이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쥐게 된다면, 때는 이미 늦다. 이처럼 인류가 맞닥뜨린 질적으로 새로운 위협 앞에서 더 이상 ‘만회’의 논리는 설 자리가 잃게 되고, 대신 ‘예방’의 원리가 그 자리를 꿰찬다.

마지막으로 비상 상황의 ‘시간적’ 탈국경화는 앞서 말한 위험의 계산 불가능성에서도 잘 나타난다. 모든 이들은 바로 눈앞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며 으레 파국의 악순환이 이제는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이라 믿고 싶어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더 나쁜 상황이 비로소 자신들 눈앞에 닥쳐 그 희망이 산산조각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계 금융 시스템에서 ‘악성’ 신용이란, 마치 끝없는 폭설 속에서 일어나는 눈사태와 비슷하다. 즉 사람들은 리스크의 존재는 알지만, 언제 어디서 눈덩이가 무너져내릴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이처럼, 모든 이들을 나락으로 몰고가려 위협하는 각종 위험에 대한 인식은 그 위험에 맞선 대항 행동을 촉발시키는 동력이 된다. 일국 차원의 정치공간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 세계정치 차원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볼 때, 글로벌한 위험에 대한 인식은 만만찮은 대가를 치러야했다. 보통은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그 인식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위험의 ‘지각’(수용)이 절대적 힘을 발휘하다보니, 세계무대 차원에서 글로벌 위험에 맞서려는 시도의 유효기간도 미디어의 관심에만 크게 휘둘려왔다.

오늘날 동시대인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물질적 상호의존성의 망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그래서 세계 위험사회의 민감한 작동기제가 아예 붕괴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베버와 푸코 같은 이들에게는 공포의 시나리오였던 ‘다스려지는 세계’, 곧 통제 합리성이 지금 이 순간 금융위기의 잠재적 희생자들에게 하나의 동아줄이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역설적 상황에서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은 어찌됐든 국민국가의 이기주의가 제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범세계주의자(코스모폴리탄)로 탈바꿈해야한다는 점일 게다. 물론, 이는 파국에 대한 ‘기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또 다른 가능성이란 이런 움직임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일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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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로벌 위험사회와 세계시민주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29 21:39 
    몇 권의 신간과 함께 오늘 주문한 책은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길, 2010)다. <위험사회>(새물결)의 문제의식을 더 확장한 걸로 보이는데, 소개기사를 보니 글로벌 리스크를 통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벡은 세계시민주의에 주목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기도 해서 챙겨놓는다.  한겨레(10. 09. 30) "글로벌화된 리스크 세계시민주의가 통제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