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독서평설 12월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세계문학과 국민문학(민족문학)의 관계를 화제로 삼아서 쓴 것으로 '세계화'와 관련한 네 차례 연재의 마지막에 해당한다. 예전에 쓴 '상자 속의 문학과 세계문학'의 일부 내용이 포함돼 있으며, 몇몇 대목은 편집자가 가독성을 고려하여 풀어썼다. 그럼에도 고등학생들이 읽기 어렵다면 아직은 나의 능력이 모자란 탓이다...

고교 독서평설(08년 12월호) 세계문학과 국민문학은 공존할 수 있을까?

세계 문학의 출현 - 세상의 빛을 보다
“오늘날에는 국민 문학이란 것이 큰 의미가 없어. 이제 세계 문학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지.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이런 시대의 도래 촉진을 위해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네.”

독일의 문호(文豪) 괴테(J. W. von Goethe, 1749~1832)는 1827년 에커만(J. P. Eckermann, 1792~1854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 문학’에 대한 최초의 구상이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세계 문학이란 말의 원조는 독일어 ‘벨트리테라투르(Weltliteratur)’이고, 영어의 ‘월드 리터러쳐(World Literature)’는 이 말의 번역어다.

세계 문학이란 전 세계 각국의 문학을 뜻하기에 오랜 역사를 가졌을 법하지만, 실제로 그 개념 자체가 출현한 지는 불과 2세기도 되지 않는다. 이는 본격적인 의미에서 ‘세계’가 출현한 것이 근대의 지리상 발견과 산업 자본주의의 도래 이후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다. ‘세계’가 먼저 출현해야 ‘세계 문학’이란 것도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문학의 의미 - 세계 문학과 국민 문학의 관계
사실 한국어에서 ‘세계 문학’은 조금 더 폭넓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네 가지 정도로 간추릴 수 있다. 먼저 국내 문학과 대비해서 국외 문학·해외 문학을 통칭해 세계 문학이라고도 부른다. 곧 외국 문학(Foreign Literature)이란 뜻의 세계 문학이다. 두 번째는 세계 명작(World Classic), 또는 세계 문학의 고전들을 가리키는 세계 문학이 있다. 흔히 세계 문학 전집 등의 출판 기획물에서 세계 문학이라는 말이 이를 뜻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해리 포터> 시리즈처럼 오늘날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가리키는 ‘세계 문학’도 가능하다. 이 경우는 ‘지구 문학(Global Literature)’이나 ‘세계적인 문학(Worldwide Literature)’이라는 뜻으로 풀어 볼 수도 있다.

동시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나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류의 작품처럼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읽히는 문학이다. 이러한 문학은 머지않은 장래에 ‘세계 명작’에 편입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곧바로 세계 명작이 되는 것은 아니며, 또 반대로 모든 세계 문학이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아니므로, 이 두 개념은 서로 구별해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끝으로 괴테가 처음 제시한 문제적 개념으로서의 세계 문학이 있다. 괴테 시대에 막 시작되었고, 그 도래를 촉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던 일종의 ‘운동’으로서의 세계 문학이다. 이것은 국민 문학(National Literature), 또는 민족 문학을 대응 개념으로 갖는 세계 문학이다. 따라서 세계 명작류를 가리키는 세계 문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국 문학계에서 일찍부터 ‘민족 문학과 세계 문학’을 화두로 제시했던 문학 비평가 백낙청은 세계 문학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중요한 것은 “괴테가 ‘세계 문학’이란 용어로 뜻한 바가 세계의 위대한 문학 고전들을 한데 모아 놓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나라(그 당시로서는 당연히 주로 유럽에 국한되었지만)의 지성인들이 개인적인 접촉뿐 아니라 서로의 작품을 읽고 중요한 정기 간행물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는 가운데 유대의 그물망을 만드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즉 이 용어는 우리 시대의 어법으로는 차라리 세계 문학을 위한 초국적인 운동이라고 부름직한 것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 명작’들을 ‘세계 문학 전집’이라고 한데 모아 놓는 것은 괴테가 말한 세계 문학과 무관하다. 오히려 이 괴테적 세계 문학에 대한 반향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에서 읽을 수 있다. 그들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도래하게 되면 “일국적 편향성과 편협성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며, 수많은 국민 문학·지역 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 문학이 형성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문제는 이 세계 문학의 형성이 국민 문학(민족 문학)의 연장선상에서 가능한가, 아니면 그 극복을 통해서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과연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일까, 아니면 민족적인 것을 넘어설 때 비로소 세계적인 것에 값할 수 있게 될까? 다시 말하면, 올바른 민족 문학이 곧 올바른 세계 문학일까, 아니면 민족 문학의 틀을 넘어설 때 비로소 세계 문학이 될까?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 <상자 속의 사나이>를 읽으면서 이 문제를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국민 문학 - ‘상자 속의 사나이’가 살아가는 법
소설의 주인공은 시골 학교의 그리스 어 교사 ‘벨리코프’다. 그가 ‘상자 속의 사나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날씨가 매우 좋을 때도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드는데다가, 반드시 솜이 든 방한 외투를 입고 외출하기 때문이다. 벨리코프가 자신을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격리시켜 방어하려는 ‘상자들’로 자기를 감쌀수록 그에게서 사회적 동물로서의 자질, 곧 사회성은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 벨리코프가 찬양한 것은 과거의 세계, 그리스어의 세계뿐이며, 심지어 그는 인간을 ‘안트로포스’라는 그리스어로 부른다.

이 단편 소설의 주된 이야기는 나이가 마흔이 넘은 노총각 벨리코프를 타지에서 온 동료 교사의 누이 서른 살의 바렌카와 결혼시키려던 일이 어떻게 실패로 돌아갔는가에 대한 것이다. “아무 일도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이 사나이에게, 인생의 큰 '일'인 결혼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도 드물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의 모의 덕분에 거의 결혼할 뻔했다. 하지만 결혼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 확신할 수 없었던 벨리코프는 바렌카에게 청혼하기를 주저했고,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고 만다.

대단한 사건은 아니다. 사건이라고 해 봐야, 언제나 활달하며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바렌카가 어느 일요일에 동생 코발렌코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을 벨리코프가 목격하게 된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너무도 날씨가 좋아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활기차게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바렌카와는 대조적으로 벨리코프는 안색이 창백해진다. 그로서는 부인네나 처녀가 자전거를 탄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벨리코프가 보기에 그건 공고로써 ‘허가’된 일도 아니었다!

충격을 받은 벨리코프는 다음 날 학교도 결근한 채 저녁 무렵 여름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역시나 두꺼운 옷을 껴입고 주의를 당부하러 코발렌코를 찾아간다. 그러나 오히려 봉변만을 당하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그리고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바렌카는 또 ‘하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끝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앓아누운 벨리코프는 한 달 뒤에 죽고 만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이렇다. “관 속에 든 그의 표정은 조용하고 편안해 보였으며 명랑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흡사 드디어 상자 속에 들어가게 해 주어서 이제 두 번 다시 그곳에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기뻐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렇죠, 그는 글자 그대로 자기의 이상에 도달한 셈입니다.”

결국 ‘상자 속의 사나이’의 삶은 상자(관) 속에 들어감으로써 완성되었다. 이는 그의 ‘상자 속의 삶’이란 것 자체가 이미 절반은 죽은 삶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곧 그는 죽음(=상자)이라는 외피를 두름으로써만 연명할 수 있었던 삶,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그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바로 ‘살아 있는 삶’이자 진정한 의미의 ‘세계’였다. 그렇다면 세계란 무엇인가?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한 세계 종교론을 조금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세계 문학 - ‘상자 속의 문학’에서 벗어나기
가라타니는 ‘세계 종교’라는 말을 단순히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계’라는 관념을 제시한 종교라는 의미로 쓴다. 이때 ‘세계’는 ‘공동체’의 상대어다. ‘공동체의 종교’란 인간이 집단이나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 강제되는 다양한 구조 또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 공동체 종교는 안(내부)과 바깥(외부)의 구분을 대전제로 삼는다. 반면에 이러한 공동체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출현한 세계 종교는 더 이상 ‘외부가 없는 세계’, 곧 ‘무한한 세계’를 제시하는 종교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유대교에서의 야훼는 다윗이나 솔로몬이 믿는 공동체 신으로서의 야훼와, 공동체를 부정하는 모세의 신 야훼라는 두 가지 성격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 모세의 신은 사람들에게 공동체의안녕과 보존을 제공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공동체에서 나가라’고, 이른바 ‘사막에 머물라’고 말한다. 이때의 ‘사막’은 꼭 물리적인 사막을 뜻하지는 않으며,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세계 종교는 ‘사막의 종교’라는 의미에서 세계 문학 또한 ‘사막의 문학’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를 거부하는 공동체 ‘바깥의 문학’이며,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문학’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공동체의 존속과 안녕을 위한 문학은 어떠한 경우에도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에 값할 수 없다. 올바른 민족문학(국민문학)이 곧 세계 문학이라는 믿음은 우리의 공동체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따르면, 국민문학은 세계문학이 아니며 세계문학은 국민문학이 아니다. 세계문학이란 유대교의 야훼가 아닌 모세의 신을 섬기는 문학이기에 그러하다. 물론 세계문학의 대척점에서 보면 공동체의 문학 또한 얼마든지 가능하다. 공동체 신이 번창하듯이 공동체의 문학 또한 번성해 왔고 번성해 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상자 속의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상자 속의 문학’은 공동체 문학과 민족 문학의 다른 이름이자, 상업주의 문학의 다른 이름이다. 이 ‘상자 속의 문학’은 모든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종족과 재산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덧신을 신고 우산을 든다. “항상 색안경을 끼고 털 스웨터를 입은데다가 귀를 솜을 싸고, 합승 마차를 타면 반드시 포장을 치게 한다.”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 벨리코프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상자 속의 문학’이 가장 편하게 들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상자(관) 속이다.

상자 속의 사나이’ 벨리코프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사막’이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이 ‘사막의 발견’은 근대적 주체의 발견자 데카르트의 의심하는 주체, 곧 ‘코기토의 발견’과 맞먹는 의미를 지닌다. 데카르트는 많은 여행을 통해 코기토의 발견을 얻어냈다. 알다시피 개별 민족은 각기 다른 문화적 관습과 전통, 생활방식 등을 갖고 있다. 데카르트는 여행중에 이처럼 서로 다른 공동체 간의 차이를 지각하고, 자기가 사는 공동체의 임의성·우연성을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인류학적’ 코기토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작가 또한 체호프 또한 1890년 사할린 섬을 여행하면서 그런 인류학적 현지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러한 체험과 거기서 얻은 깨달음이 작가의 창작에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비유컨대,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 그러한 ‘사막’에 대응하는 사건은, 가능할 뻔했던 ‘바렌카와의 결혼’이다. 바렌카는 소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온 타자(他者)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러시아 어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큰 소리로 ‘하하하’ 웃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벨리코프 또한 그녀의 그러한 모습에 반하지만, 그에겐 자신의 ‘상자’를 벗어 던지고 타자를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따라서 갑자기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도 결국은 청혼해서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결혼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작중 화자의 예단은 조금 성급해 보인다.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진정한 사건은 결국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학 - 세계-공동체를 지향하는 민족 문학
<상자 속의 사나이>를 ‘진짜 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이 무엇인지는 밝혀 주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면, 진정한 문학은 우리에게 ‘사막’을 보여 주는 문학이며 ‘사막’을 체험하게 하는 문학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곧 그것은 우리에게 인류학적 여정을 가능하게 문학이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임의성·우연성을 자각하게 함과 동시에, 세상은 넓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문학이다. 그것은 과연 민족문학이라는 틀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가라타니의 세계 종교론을 민족이라는 우상에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한쪽에는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섬기는 '공동체 신의 민족문학'이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는 특정한 공동체를 부정하고 세계-공동체를 지향하는 '모세의 신의 민족문학'이 있을 법하다. 동일한 종교에서 공동체종교와 세계종교를 분리해 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같은 문학에서도 공동체문학과 세계문학이라는 서로 다른 개념을 식별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여기서 우리가 촉진하고 앞당겨야 할 세계 문학은 모세의 신을 섬기는 민족 문학이어야 함은 자명하다. 민족 문학 자체에서 두 가지 개념을 분별하려는 시도가 필요한 이유는, ‘민족’으로도 ‘국민’으로도 번역되는 ‘네이션(nation)’이라는 단어 자체가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한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라는 세계문학의 공간은 아직은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이념의 공간이며, 네이션 바깥에 또 다른 네이션이 있는 현실 또한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과연 민족문학이 공동체문학의 한계를 넘어서 보편적 세계문학과 양립할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민족문학을 부정하는 민족문학이 될 것이다. 

08.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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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한알 2008-12-12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로쟈 2008-12-12 21:57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