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최근 <환재 박규수 연구>(창비, 2008)을 출간한 김명호 교수와의 인터뷰기사다. '박규수'란 이름은 오래전 국사(그리고 한국사) 시간에나 들어보았다. 관심분야가 아니어서 따로 찾아 읽을 일은 없었는데, 예전에 나온 책으론 손형부의 <박규수의 개화사상 연구>(일조각, 1997)과 이완재의 <박규수 연구>(집문당, 1999) 정도가 검색된다. 모두 200쪽 남짓이다. 하지만 <환재 박규수 연구>는 800쪽에 육박하니 일단 분량으로 압도한다. 그런 만큼 당장에 손에 들 일은 없을 듯싶지만 출간 소식만큼은 반갑다...
경향신문(08. 11. 24) "박규수는 19세기 ‘자주적 근대화’의 선각자”
환재 박규수(1807~1877)는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조선 말기 개화파의 사상적 아버지이자 1866년 대동강에 침투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킨 주인공으로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라는 후광에 고종 시절 우의정을 역임하며 긴박했던 조선 말기 국정의 최일선에 섰던 배경도 있다.
지난해 <연암집>을 완역·출간해냈던 성균관대 한문학과 김명호 교수(55·사진)가 이번에 박지원 실학사상의 계승자 환재 박규수의 정치·사상·문학적 업적을 집대성한 <환재 박규수 연구>(창비)를 펴냈다. 그는 삶의 화려한 시기를 박규수 연구에 바쳤다. “처음엔 환재를 연구주제로 잡길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역사의 밑바닥에서 기다리던 환재가 저를 잡고 놔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박규수 연구에 40대를 다 보내고 이제는 정년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어요.” 그가 박규수를 연구하고 있다는 얘기가 알려지면서 서울 인사동 고서화점에 나오는 박규수의 글이나 서간문의 양이 늘었고 값도 올랐다고 한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19세기 인물인 박규수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김 교수는 “18세기 실학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지만 19세기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저조합니다. 식민지 시대의 전단계였기 때문인지 어둡고 부정적으로만 묘사됐을 뿐 문학사·사상사적으로 19세기는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잘 몰랐기 때문이죠”라고 운을 뗐다. 망국으로 결론나긴 했지만 시대적 격변기에 조선 안에서도 자주적 근대화의 고뇌와 고투가 있었고,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박규수가 있다고 했다. “박규수의 생애와 사상, 문학에 대한 종합적 연구는 19세기의 총체적 진실로 접근하는 지름길이자 식민지 근대화론의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틀”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박규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완성기’라 불리는 19세기의 시대사적 변화의 흐름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대책을 궁리했던 인물”이다. 그는 중국 청나라 위원(魏源)이 세계 각국의 지리와 산업·인구·정치·종교 등에 대해 서술한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조선에서 가장 먼저 구해 읽었다. 두차례에 걸친 연행(燕行·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오는 일)에도 적극 참여해 국제감각을 익히려고 애썼다.
김 교수는 특히 박규수가 동양의 문화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서양과의 교섭에 진취적으로 대처하려 했던 점을 들어 그에게서 조선판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맹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박규수의 시대는 조부인 박지원의 실학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해 낼 수 없는 상황이었고, 현실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동도서기론의 맹아 단계까지 조심스럽게 나아갔습니다. 조부의 사상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킨 겁니다.”
박규수는 뛰어난 문학가·문장가였고, 동시대 최대 천문과학자로 일컬어지는 남병철·남병길 형제에 버금가는 천문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오늘날의 지구본격인 ‘지세의(地勢儀)’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천문도 ‘평혼의(平渾儀)’와 태양관측기구 ‘간평의(簡平儀)’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서양식으로 표현하자면 ‘르네상스맨’이었던 셈이죠.”
그러나 역사책에 등장하는 박규수는 주연보다 조연에 머물러 왔다. 학계에서도 박규수 전공자는 드물다. 지난해가 박규수 탄생 200주년이었지만 이를 기념하기 위한 변변한 학술행사조차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김 교수는 “일반인들이 ‘단원’ 하면 김홍도를 떠올리듯 환재가 박규수의 호라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요즘은 흔히 탄생 몇주년이니 해서 학술대회를 하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새로 발행될 예정인 고액권 화폐에 들어갈 인물로 박규수만한 인물이 없다고도 했다.
김 교수는 이번 책에서 박규수의 탄생에서부터 철종시대까지만 다뤘다. 당연히 고종시대 박규수의 활동에 대한 연구서가 다음 목표다. “박규수의 암중모색이 당시 상황에서 유효한 대응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근대화를 거쳐 좀 자신감을 가진 만큼 박규수가 추구했던 동도서기적인 근대화의 심화를 이제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김재중기자)
08. 1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