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김훈의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생각의나무, 2008)과 함께 손에 든 책은 김헌의 <위대한 연설>(인물과사상사, 2008)이다(내친 김에 그의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살림, 2004)도 얹었다). 소개대로 '고대 아테네 10대 연설가들을 통해 보는 서구의 뿌리'가 책의 취지이며, '인물과사상'에 1년간 연재한 글을 다듬어서 낸 책이다. 나는 경향신문 연재에서 저자의 글을 주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리스 고전 연구자로서 이제 활발한 저술활동이 기대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수사학>, 그리고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관한 책들을 준비중에 있다고 한다. 고대해봄 직하다. 한겨레의 리뷰기사를 챙겨놓는다.

한겨레(08. 11. 22) 아테네 10대 연설가들의 ‘말의 기술’

아돌프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들을 일으킨 힘은 펜의 힘이 아니라 말의 힘이었다”고 단언했다. 이 희대의 연설가는 유례 없이 저열한 방식으로 말의 힘을 남용했지만, 그 주장의 바탕에는 유구한 서구 역사의 한 갈래가 이어져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사학이 그 갈래의 기원이다.

서양고전문헌학자 김헌(서울대 인문학 연구원 HK문명사업단 연구원)씨가 쓴 <위대한 연설-고대 아테네 10대 연설가들을 통해 보는 서구의 뿌리>는 바로 이 수사학의 유래를 살피는 저작이다. 고전문헌학이란 고전기 그리스·로마의 역사·철학·문학 텍스트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지은이는 고전기 문헌 가운데 수사학 텍스트를 전공했다. 그는 수사학이야말로 그리스·로마 시대 삶과 앎의 풍경을 다른 어떤 학문 분야보다 풍성하게 알려준다고 말한다. 이 책은 안티폰에서부터 데이나르코스까지 기원전 5~4세기를 수놓은 아테네 10대 연설가들의 활동을 통해 이 풍경을 들여다 보고 있다.

지은이는 먼저 수사학에 대한 통념 또는 오해를 깨는 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수사학 하면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꾸미는 표현 방식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것은 근래의 관념이다. 수사학이라는 말의 그리스어는 레토리케(rhetorike)인데, 이 말을 분석해보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연설을 하는 사람의 기술’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수사학은 ‘문학적 기교’ 이전에 ‘연설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지은이는 수사학 출현의 배경으로 고전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모든 시민이 평등한 주권자가 된 민주주의 시대에 자기 생각을 공개적으로 설득하거나 자기 주장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에서 태어난 것이 수사학이었던 것이다. 의회·법정·예식의 장이 수사학이 꽃핀 곳이었다.

>>파피루스에 쓴 안티폰의 연설문 필사본 조각.

지은이는 고전 시대를 이해하는 데는 수사학이 철학이나 문학보다 더 유용하다고 말한다. 수사학이란 ‘말의 기술’인데, 이 때의 말은 곧 이성·논리·지식을 함축하는 말이다. 동시에 수사학은 기술로서 일상의 실천 속에서 제 기능을 다해야 했다. 지식과 현실이 맞닿은 곳에서 수사학은 자라났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수사학은 그 세계를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는 데 유리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수사학은 일종의 실용지식이었으므로, 시민으로서 공적 생활을 능숙하게 하려면 누구나 익혀야 했다. 수사학은 소수를 위한 특수학문이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교양과목이었다. 이 교양과목을 가르친 선생들이 바로 민주주의 대로를 활보하던 소피스트들이었다.

소피스트들의 수사학이 대세를 이루고 악용되는 사례가 많아지자 거기에 대항해 진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며 등장한 것이 철학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때의 철학이 말하자면, 플라톤 철학이다. 같은 철학이라 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수사학을 적극 인정했다. 진리·정의가 거짓·불의와 대결할 때 수사학으로 무장하면 이길 수 있지만, 수사학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패배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수사학은 진리의 갑옷이었던 것이다. 그는 <수사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몸을 사용해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인데, 인간 본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말과 이성을 사용해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지은이가 10대 연설가 가운데 특히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 사람으로 꼽는 세 사람이 뤼시아스(기원전 459~380), 이소크라테스(기원전 436~338), 데모스테네스(기원전 384~322)이다. 이 가운데 뤼시아스는 수사학을 비난했던 플라톤도 인정한 이 분야의 진정한 대가였다. 그는 ‘30인 참주정’의 공포정치에 대항하는 데 자신의 연설능력을 활용한 민주투사였다. 민주주의가 회복된 뒤 그는 법정 연설문 작성자로 활동했으며, 그 분야에서 최고의 역량을 발휘했다. 간결하고 담백한 그의 언어는 인물과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그 시대 삶을 실감 나게 이해하게 해준다.

그리스 민주주의 말기에 활동한 데모스테네스는 의회연설의 1인자로 꼽힌다. 그는 정치가로서 마케도니아의 제국주의에 대항해 평생 싸웠다. 기품과 명분과 정의를 강조하는 그의 연설은 마케도니아에 맞서는 말의 무기였다. 그러나 연설의 힘도 마케도니아의 무력을 끝내 막지 못했는데, 패배한 그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그대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죽음이었다.

뤼시아스와 데모스테네스 사이에 살았던 이소크라테스는 수사학을 철학의 지위로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그 자신 소피스트의 한 사람이었던 이소크라테스는 수사학이 마치 모든 것을 다해 줄 것처럼 떠들고 다니는 소피스트들을 사기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수사학 교육은 대중을 설득하는 말솜씨를 가르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수사학은 단순히 혀의 싸움에서 쓸모있는 무기나 도구가 아니다. 진정한 설득은 그럴 듯한 말에서 나오지 않는다. 말을 통해 전해지는, 그리고 그 생각을 올곧게 만들어주는 품성에서 나온다.” 그런 수사학에 이소크라테스는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명섭 기자)

08.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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