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퇴근길에 서점에 들렀다가 손에 든 책의 하나는 강유원 번역으로 새로 나온 <공산당 선언>(이론과실천, 2008)이다.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뿌리와이파리, 2006)도 읽은 터라 '내친 김'이란 생각도 들었고 이미 몇 종의 <공산당 선언>을 갖춰놓고 있는 만큼 '컬렉션'을 마저 채운다는 뜻도 있었다(이 <선언>과 함께, 여러 신간들을 들었다 놓고 고른 책은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인간사랑, 1998)이었다. 오바마 탓일까?).
집에 돌아와 맛보기로 내가 읽은 것은 부록 중의 하나인 '1882년 러시아어판 서문'이다. 이진우 번역의 <공산당 선언>(책세상, 2002)에도 포함돼 있는지라 비교해보기 위해 옥스포드판 영어본과 함께 한참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누구를 위한 책들인가?). 그나마 150주년 기념판으로 나온 김태호 번역의 <공산주의 선언>(박종철출판사, 1998)이 눈에 띄기에 나란히 펼쳐놓았다(알다시피 <공산주의 선언>은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의 대본이기도 하다). 그 정도 준비한 상태에서 '러시아어판 서문'(69-71쪽)을 읽어보도록 한다. 이렇게 시작한다.
<공산당 선언>의 러시아어 초판은 바쿠닌이 번역하여 1860년대 초에 <종>의 인쇄소에서 나왔다. 서양은 당시 <선언>의 러시아어판에서 문헌적으로 진기한 사건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한 파악은 오늘날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먼저 '초판' 얘기가 나오는 것은 1882년판이 2판이기 때문이다. 바쿠닌(1814-1876) 번역의 초판이1860년대 초에 나왔다고 했지만 후주(102쪽)에 밝혀진 대로 러시아어 초판은 1869년에 출간됐다(엥겔스는 1888년 영어판 서문에서도 출간연도를 1863년이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그때쯤으로 착각했던 듯하다. '1860년대 초'라는 말은 '1863년'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번역자도 바쿠닌이 아니라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 플레하노프(1856-1918, 사진)였다. 초판에 결함이 많아서 1882년에 개정판이 나온 것으로 돼 있다(<공산주의 선언>, 129쪽). 그리고 초판을 낸 잡지 '<종(Kolokol)>의 인쇄소'에는 주석이 붙어 있는데,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나는 살아있음을 외친다"를 구호로 내세운 혁명잡지. 헤르젠(Herzen)과 오가르요프(Ogarjow)가 발행. 1857년부터 1865년에는 런던에서 1865년부터 1867년에는 주네브에서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러시아에서 혁명운동 보급에 의미있는 역할을 하였다."(102-3쪽)
인용문에서 두 러시아 망명 인텔리겐치야의 표기는 부정확하다. '게르첸'과 '오가료프'라고 해야 맞다(박종철출판사판은 '알렉산드르 게르쩬과 니꼴라이 오가르요프'라고 표기했다. '게르쩬'은 맞지만 '오가르요프'는 오기다). 사진은 알렉산드르 게르첸(1812-1870, 오른쪽)과 니콜라이 오가료프(1813-1877)의 모습(1861년). 이들 인텔리겐치아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 사상가>(생각의나무, 2008)를 참조할 수 있다(게르첸의 유명한 자서전 <과거와 사색>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아무려나 러시아에서 나온 초판에 대해서 서양에서는 '문헌적으로 진기한 사건'으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것('서양'보다는 '서구'가 더 적합하겠다. '서유럽'을 가리키니까). '문헌적으로 진기한 사건'은 영어본의 표현으론 'literary curiosity'이다.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라는 얘기다("어, 러시아판도 있네!"). 그러던 것이 1880년대에 들어서는 사정이 많이 달라져서 이젠 그런 관점에서 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 이어지는 건 그 이유다.
당시(1847년 12월)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직도 얼마나 제한된 지역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지는 각각의 나라들의 각각의 반정부 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이라는 <선언>의 마지막 장이 극히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요컨대 빠져 있는 것이 있다 -러시아와 미합중국. 당시는 러시아가 유럽의 전체 반동의 최후의 거대한 예비군을 이루고 있던 때였으며, 미합중국이 유럽 프롤레타리아의 여력을 이민을 통해 흡수하던 때였다. 두 나라는 유럽에 원료품을 공급하고 있었고, 동시에 유럽 공업제품들의 판매시장이었다. 따라서 두 나라는 당시에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기존 유럽질서의 기둥들이었다.
요는 <공산당 선언>이 씌어지던 시기만 하더라도 러시아와 미국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열외 지역이었으며(그러니 이 두 나라에서 <공산당 선언>은 남의 나라 얘기였을 테다) 원료 공급처이자 판매시장으로서 유럽의 질서(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 달라졌다는 것. 먼저 미국의 경우.
오늘날에는 얼마나 다른가! 바로 유럽의 이민 때문에 북아메리카는 거대한 농업생산이 가능해졌으며, 그것의 경쟁은 유럽의 토지 소유 - 대토지 소유든 소토지 소유든 - 그 근저에서 뒤흔들고 있다. 게다가 그 이민 때문에 미합중국은 서유럽, 특히 잉글랜드의 이제까지의 공업 독점을 머지않아 부술 수밖에 없을 힘과 규모로 방대한 공업자원들을 빼앗을 수 있게 되었다. 두 가지 사정이 아메리카 자체에 혁명적으로 반작용하고 있다. 정치체제 전체의 토대인 농업인들의 중소 규모 토지소유는 차츰 거대 농장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있으며, 공업지대들에서는 이와 동시에 처음으로 대량의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자본들의 거짓말 같은 집중이 전개되고 있다.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 덕분에 미국에서 (1)대규모 농업생산과 (2)산업 자본주의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인데, "그 이민 때문에 미합중국은 서유럽, 특히 잉글랜드의 이제까지의 공업 독점을 머지않아 부술 수밖에 없을 힘과 규모로 방대한 공업자원들을 빼앗을 수 있게 되었다."란 대목은 약간의 수정을 요한다. '빼앗다'란 동사는 보통 '누구에게서'란 간접목적어를 필요로 하는데, '공업자원들'을 누구에게서 빼앗는다는 말일까?
영어본에서는 "it enabled the United States to exploit its tremendous industrial resources with an energy and on a scale that must shortly break the industrial monopoly of Western Europe, and especially of England, existing up to now."로 번역되는 부분이고, 여기서 'exploit'는 '개발하다'는 뜻이다('노동력'을 목적어로 할 경우에는 '착취하다'로 번역하지만). 풍부한 노동력(이민자)을 갖게 되면서 방대한 규모의 자원 개발과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읽는 게 자연스럽겠다(<공산주의 선언>에서는 "방대한 공업자원들을 우려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라고 옮겼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하에서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되고 있으며 이제 프롤레타리아 운동 또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러시아! 1848-1849년의 혁명 동안에는 유럽의 왕후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부르주아들도 이제 막 깨어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구원을 러시아의 간섭에서 찾았다. 차르는 유럽 반동의 우두머리로 선포되었다. 오늘날 차르는 가치나(Gatschina)에 혁명의 포로로 있으며, 러시아는 유럽의 혁명적 행동의 전위를 이루고 있다.
처음 <공산당 선언>이 나오던 184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러시아는 유럽 반동의 우두머리였고, 그때의 러시아 황제(차르)는 니콜라이 2세였다. 그의 뒤를 이은 황제가 1861년 농노해방을 단행한 알렉산드르 2세(사진)인데, 이 1882년 러시아어판 <공산당 선언>이 나오기 직전인 1881년에 '인민의 의지' 당원들에게 암살당한다. 그리고 그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3세는 암살의 위협 때문에 한동안 페테르부르크 주변의 가치나에 칩거한다. "오늘날 차르는 가치나(Gatschina)에 혁명의 포로로 있으며"라는 대목은 그런 사정을 가리킨다. 러시아는 이제 유럽 혁명 대오의 전위다!
<공산당 선언>은 블가피하게 닥쳐오고 있는, 현대 부르주아적 소유의 해체를 선포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러시아에서 급속히 꽃피는 자본주의로 인한 현기증과 이제 막 발전하고 있는 부르주아적 토지소유에 대립하여, 토지의 태반이 농민들의 공동 보유임을 발견한다. 이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태고의 토지 공동 보유가 심하게 붕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적 공동 보유라는 더 높은 형태로 곧바로 이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서양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해체과정을 먼저 겪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해 오늘날 가능한 유일한 대답은 이렇다. 러시아의 혁명이 서양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가 되어, 그리하여 양자가 서로를 보완한다면 지금 러시아의 토지 공동 소유는 공산주의적 발전의 출발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두 문단이다. 이 결론부가 아마도 러시아판만의 특징이 아닐까 한다. 러시아의 향후 운명(혹은 진로)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먼저 유의할 단어는 '오브시치나'(러시아식 농촌공동체, 곧 '농촌 코뮌'을 말한다. 발음은 '옵쉬나'). 강유원본에는 따로 주석이 붙어 있지 않은데, 김태호본에는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오브쉬치나'를 '오브시치나'로 수정해서 옮겨본다.
러시아 촌락 공동체를 흔히 미르라고 부르는데, 이 촌락 공동체를 토지 소유와 분배 형태를 중심으로 파악할 때는 오브시치나라고 부른다. 촌락 공동체는 원칙적으로 자연적 결합이며, 가옥은 사유 재신이지만 경지는 공유되어 몇 년마다 성원 사이에 재분배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각 성원은 분배받은 경지를 사적으로 점유하여 경작했다. 방목지 등은 공동으로 이용하였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은 이 촌락 공동체를 근거로 러시아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07쪽)
지향적 이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해체와 공산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목표로 한다. 한데, 1880년대 러시아 사회는 부르주아적 토지소유와 농민 공동체(오브시치나)의 공동소유가 공존하고 있었다. 거기서 제기되는 문제가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태고의 토지 공동 보유가 심하게 붕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적 공동 보유라는 더 높은 형태로 곧바로 이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서양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해체과정을 먼저 겪어야만 하는가?"였다. 인민주의자들(나로드니키)은 직접적인 이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친 이후에 비로소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고 강변했다.
이 쟁점에 대한 유익한 안내서가 베르쟈예프의 <러시아 지성사>(종로서적, 1980)이다. 러시아 지성사의 전개도 다루고 있지만 원제는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The Origin of Russian Communism)'(영역본)이다. 러시아어본의 제목은 '러시아 혁명의 기원과 의미'이고. 참고로, 예전에 같이 소개됐던 <러시아 사상사>(범조사, 1985재판)는 원제가 '러시아 이념'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태고의 토지 공동 보유가 심하게 붕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적 공동 보유라는 더 높은 형태로 곧바로 이행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서양의 역사발전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해체과정을 먼저 겪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얻었던가? 우리가 아는 바대로 그렇지는 못하다. 마르크스는 이듬해인 1883년에 세상을 떠나며 엥겔스도 1895년에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에 역사는 러시아 혁명의 시작과 끝까지도 목격하였다.1880년대에도 "심하게 붕괴된 형태"라고 했던 러시아의 오브시치나는 지금은 거의 와해되지 않았을까? 그런 상황에서 <공산당 선언>의 메시지는 어떻게 해독되고 실천될 수 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궁극적으로 내세우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는 경제적 차원에서의 계급의 대립을 철폐함으로써 정치가 폐기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공동체이다.(강유원, 역자후기, 159쪽)
'정치가 폐기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공동체'에 대한 기획은 아직도 유효한가? 아직도 가능한가? <공산당 선언> 160주년을 보내며 다시금 생각해본다...
08. 11. 08.
P.S. 이미지는 작년에 러시아에서 출간된 <선언> 160주년 기념판이다. 그리고 아래는 1848년에 나온 독일어판 <공산당 선언>과 1948년에 <선언> 10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러시아어판 <공산당 선언>의 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