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기사를 보고 저녁에 서점에 들러 손에 든 책은 사르트르의 자서전 <말>(민음사, 2008)이다(알라딘에는 아직 입고가 안된 듯하다). 예전에 정명환 선생의 다른 번역본으로 읽었지만, 이번에 역자가 새롭게 개정판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말>은 좋아하는 책이고 또 내가 불어 원서까지 갖고 있는, 많지 않은 책 중의 하나여서 이번 번역본의 재출간이 반갑다. 오직 '읽기'와 '쓰기'만으로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이 독특한 자서전은 오래전 기억을 다시금 잠시 떠올리게 해주는 '기억 재생기'이기도 하다. 계기가 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10. 28) '나는 왜 문학병을 앓았나' 사르트르의 고백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자서전으로 꼽히는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자서전 <말>이 44년 만에 새로 번역돼 나왔다. 최근 민음사에서 발간된 <말>은 고 김붕구(1922~1991) 서울대 교수와 함께 1964년 이 책을 번역했던 정명환(79) 서울대 명예교수가 본문을 수정하고 새로 주석을 단 판본이다.
정 교수는 이 책의 해설에서 "1964년 <말>의 출간이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그 해 가을 사르트르가 노벨상 수상을 거절하자 한 출판사의 요청으로 김 교수와 함께 거의 한 달 만에 번역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내가 맡은 1부의 번역에는 지금 누가 들추어볼까 겁이 날 정도로 잘못된 곳이 많았다"며 박맹호 민음사 회장의 권유로 개역을 시작해 1년 반에 걸쳐 작업을 마쳤다고 밝혔다.
자서전은 한살 때 아버지를 여읜 사르트르가 외조부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낸 유년시절로부터 시작된다. 그 시절은 사르트르의 정신적 토양이 됐다. 이 책의 1부와 2부인 '읽기'와 '쓰기'가 그 토양이다. 키 작고 병약했으며, 약한 사시(斜視) 증세를 보였던 소년 사르트르는 양서로 가득찬 외조부의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스스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 일곱살 무렵부터 외조부와 운문으로 편지를 교환한 일화 등을 들려준다.
정 교수는 '읽기'와 '쓰기'를 통해 자존감을 획득했던 사르트르지만 그는 자서전에서 이를 일종의 '문학병'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할아버지가 나를 구해 주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속임수로 나를 끌어넣었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말>을 쓸 무렵 '문학 결별' 선언을 하며 문학과 현실참여의 분기점에서 양자의 관계성에 대해 고민하던 사르트르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그러나 자서전 말미에서는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앞으로도 쓸 것이다"라도 적고 있다. 정 교수는 이는 단순히 정치적 참여를 촉구하기 위한 문학이 아니라, 정치는 정치대로 중시하되 기존질서를 비판하고 절대미의 경지를 추구하는, '정치적 참여를 넘어서는 문학'을 추구하겠다는 사르트르의 문학적 지향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말>을 어떤 각도에서 읽느냐의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각도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 야릇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여러 철학적 저서와 문학작품의 씨앗을 어김없이 찾아볼 수 있고, 또 당시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귀중한 시사를 얻을 만하다"고 <말>이 가지는 의미를 밝혔다.(이왕구기자)
08. 10. 28.
P.S. 잠시 찾아보니 기사에서 언급된 최초의 번역본은 <말>(지문각, 1965)이다. 1964년 사르트르가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고 나서 김붕구 교수와 함께 한달만에 옮겼다고 하니까 책은 1965년초에 나왔겠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다시 나온 <말>(민예사, 1992)이다. 역자는 동일한데, 부분적으로 수정이 가해졌는지는 모르겠다. 김붕구 교수를 역자로 한 책으로 <책읽기와 글쓰기>(삼문, 1994)도 출간됐었다. 이 역시 <말>을 옮긴 것이다. 완역이었는지는 긴가민가한데, 만약 그렇다면 김붕구본의 독자적인 <말>이겠다. 이 두 불문학자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도 각각 번역하는 바람에 나는 두 종의 번역본을 읽었다...
사르트르 얘기가 나온 김에 한권만 더 적어놓자면, 계약결혼한 아내 보부아르가 그의 죽음에 부친 책 <작별의 예식>(두레, 1982)도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평론집 <책읽기의 괴로움>(민음사, 1984)에서 이 책에 관한 아름다운 평문을 읽고 시립도서관에서 찾아 읽은 기억이 난다. 아, 손에 닿을 듯이 기억이 나는데, 너무도 오래전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