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가 '물리학에 나타난 공간론의 역사'인 책이 있다. 막스 야머의 <공간개념>(나남출판, 2008)인데, 학술명저번역총서의 하나로 출간된 만큼 학술적 가치는 인정받는 책이겠으나 손에 들기는 어려워 보이는 책이다. 교수신문의 서평에서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다면, 인내력·상상력·이해력 모두 A+"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다(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08317x). 하지만 대략의 윤곽을 따라가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중에 관심있는 장만 선별해서 읽어볼 수도 있겠고. 일단은 서평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08. 10. 20)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다면, 인내력·상상력·이해력 모두 A+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발표되면서, 지난 수천 년 동안 다분히 이질적인 개념으로 간주돼왔던 시간과 공간은 수학적으로 동등한 특성을 지닌 하나의 가족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시간과 공간은 “통일이 돼도 크게 해될 것 없는” 유사한 개념이 아니라,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통일돼야만 하는” 하나의 좌표세트였던 것이다. 그 후로 이론물리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굳이 구별하려고 애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간의 추상적인 특성을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으로부터 유추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학문을 떠난 현실세계에서 시간과 공간을 동일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인간에게 시간을 인지하는 기관은 딱히 존재하지 않지만, 공간을 지각하는 기관은 다양하게 발달돼 있다. 또한 시간의 이동은 인간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고 거시적 관점에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지만, 공간의 이동은 개인의 필요와 능력에 따라 (물론 지구 근방에 한해)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으며, 한 개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는 동선은 경험과 의식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제아무리 상대성이론이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좌표계로 간주한다 해도, 우리의 뇌리 속에는 시간보다 공간을 우선시하는 ‘공간 편향적 비대칭’이 존재한다.



막스 야머의 『공간개념(Concepts of Space)』은 인류가 공간을 인지하고 분석해온 역사를 포괄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 철학사조와 유대 기독교의 입장에서 바라본 공간개념을 설명하는데 거의 1/3 이상을 할애하고 있어서 ‘물리학에 나타난 공간이론의 역사’라는 부제가 다소 무색한 감이 있지만, 절대공간이 물리학의 주 무대로 등장하게 된 과정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이다.

공간은 모든 만물을 담고 있는 상자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사물의 ‘위치적 성질’에 불과한 것인가. 전자가 맞다면 물체가 없어도 공간은 존재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물체가 하나도 없는 공간은 더 이상 공간이 아니다. 라이프니츠와 호이겐스는 후자를 주장했으나 경쟁자였던 뉴턴은 물체의 운동을 서술하기 위해 ‘모든 운동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 필요했고, 거기에 신의 속성을 닮은 ‘절대성’까지 부여했다. 물론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한 개인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소박한 사고방식에서 출발해 머나먼 추상화의 과정을 거친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을 일종의 ‘장소’개념으로 간주해 등방성과 균질성을 부정했고, 그의 사상은 근 2천년 동안 서양의 공간개념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의 철학자 텔리시오가 “공간은 물질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공간의 균질성을 옹호했고, 파트리티우스는 이것을 더욱 구체화시켜 “공간은 실체나 물질성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오랜 세월동안 추상적 세계에 머물러있던 공간은 수학적 대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 후 피에르 가상디와 토마소 캄파넬라 등에 의해 균질적이고 무한한 공간의 개념이 정립됐으며, 이것이 뉴턴에게 전수돼 고전물리학의 근간인 절대공간의 개념이 탄생한다.

뉴턴의 첫 번째 운동법칙, 즉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려면 절대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지상태와 등속운동상태가 구별되려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기준계가 있어야 하고,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절대공간뿐이기 때문이다. 뉴턴은 절대공간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다가 그 유명한 ‘회전하는 물통실험’을 제안했다. 물을 가득 채운 물통을 천장에 밧줄로 매달아놓고, 밧줄이 충분히 꼬일 때까지 물통을 서서히 돌린다. 그 후 물통을 쥐고 있던 손을 가만히 놓으면 꼬인 밧줄이 풀리면서 물통이 회전하게 되고 평평했던 수면은 원심력에 의해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곡면이되는데, 이 현상은 물통과 물 사이의 상대운동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즉, 가속운동이야말로 절대공간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절대운동’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논리에도 허점은 있다. 물질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우주공간에서 물통을 돌려도 수면이 오목해질 것인가. 수면이 오목하게 들어가는 것은 절대공간에 대한 운동 때문이 아니라 우주에 분포돼 있는 질량의 분포 때문일 수도 있다. 만일 천체들이 지금과 다르게 배열돼 있다면 오목해지는 정도가 달라질 수도 있으며,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텅 빈 우주에서는 회전하는 물의 수면이 아예 평평하게 유지될 수도 있다(이것이 바로 마흐의 원리이다). 버클리와 마흐, 그리고 라이프니츠와 호이겐스 등은 절대공간이라는 불완전한 개념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뉴턴의 역학은 현실세계를 너무나 정확하게 서술할 뿐만 아니라 과학을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수단’으로 바라보던 당시의 풍조에 잘 부합됐으므로 한동안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수용돼 왔다.

저자는 절대공간의 개념이 상대성이론의 휘어진 시공간으로 대치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하나의 章을 통째로 할애했다. 다른 대부분의 교양과학서적에서는 뉴턴의 물리학이 상대성이론 때문에 하루아침에 갑자기 권좌에서 밀려난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은 ‘가랑비에 속옷 젖듯이’ 뭇매를 맞아가며 서서히 와해됐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뉴턴의 절대공간은 오일러와 칸트 등에 의해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일반상대성이론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마흐의 원리에게 심각한 도전을 받았으며, 19세기말에는 절대공간의 상징인 에테르의 관측실험이 실패로 끝나면서 더욱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결국 이 상황은 아인슈타인의 특수 및 일반상대성이론이 등장하면서 말끔하게 정리됐고, 공간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아닌 리만 기하학의 n-차원 다양체로 대치됐다. 공간개념은 1920년대에 등장한 양자역학에 인식론적 해석에 의해 또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되고, “공간은 왜 3차원인가”라는 근본적질문도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됐지만 아직 이렇다 할 해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저자는 미시물리학과 거시물리학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공간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이 책의 초판은 1954년에 출판됐고, 1992년에 확대개정판이 나오면서 지난 40년 동안 공간문제와 관련해 이루어진 새로운 발전상이 여섯 번째 장으로 추가됐다. 여기에는 그 동안 초판에 가해졌던 비난이 부분적으로 해명돼있으며, 1960년대 이후의 물리학을 비롯해 공간의 차원을 파격적으로 늘인 초중력이론과 초끈이론도 소개돼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책의 전반부에서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야머의 뛰어난 분석력과 박학다식함이 다소 누그러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머는 최신물리학에 철학이 결여돼 있음을 넌지시 비치면서, 물리학이 공간의 철학적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는 희망은 철학이 공간의 물리학적 문제를 풀어주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허황하다는 단언으로 끝을 맺는다.

유대교적 공간개념도 하나의 장(제2장)에 걸쳐 소개돼 있는데, 책의 머리말을 쓴 아인슈타인조차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언급을 회피했다. 유대교의 철학이 공간의 변천사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물리학에 나타난 공간이론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아놓고 특정 종교관을 심각하게 다룬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니었나 싶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물리학이 아닌 역사적 관점에서 공간문제에 접근하려는 독자들에게는 이 부분도 나름대로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박학다식함에 놀라다가 중간쯤 가면 아예 혀를 내두를 정도가 되고, 끝 부분에 가면 백과사전 한 권을 독파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역자는 막스 야머의 방대한 지식을 독자들에게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각 장마다 역주를 정성껏 달아놓았다. 본문의 가독성이 다소 떨어지는 것이 일말의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것도 가능한 한 원문을 훼손시키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역자의 배려일 것으로 짐작된다. 공간을 한 가지 관점에서 서술하기도 어려운데, 야머는 이것을 역사, 철학, 종교, 물리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막강한 지식을 자랑하며 단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독자의 생각까지 첨가됐을 때 콘텐츠가 얼마나 크게 부풀어 오를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 -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다면 인내력과 집중력, 상상력,이해력에서 모두 A+를 받기에 충분하다.

08. 10. 25.

P.S. 서평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이 책의 머리말은 아인슈타인이 썼다. 소개 페이지를 보니 이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야머 박사의 책은 공간개념이 고대와 중세에 차지했던 지위를 연구하는 데 크게 중요하다. 그는 연구들에 근거해서, 근대적인 (1) 유형의 공간개념이 르네상스 이후에야 비로소 발전되었다는 견해로 기울어진다. 그 개념은 공간을 모든 물질적 대상을 담는 상자로 여긴다. 내가 보기에 고대인들의 원자론은 원자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2) 유형의 공간을 전제해야 했던 반면에, 세력이 더 컸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학파는 독립적(절대적) 공간이라는 개념 없이 잘 해나가려고 했다. 신학이 공간개념의 발전에 끼친 영향들에 관한 야머 박사의 견해들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공간문제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의 관심을 분명히 불러일으킬 것이다."

흥미로운 건 아인슈타인의 그러한 평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막스 야머가 <아인슈타인과 종교>(1999)라는 책까지 썼다는 점이다. 부제는 '물리학과 신학'.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과 신학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야머는 이를 막바로 다룬다. 살아있었다면 아인슈타인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한편, 현대 물리학이 함축하는 시공간의 의미에 대해서는 한스 라이헨바하의 <시간과 공간의 철학>(서광사, 1986)이 유명한 저작이(었)다(하지만 수학에 어두운 내가 읽기엔 어려운 책이었다). 요즘은 어떻게 평가되는지 모르겠지만. 번역은 현재 철학아카데미 원장인 이정우씨의 작품이다. 아마도 대학원시절에 번역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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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링 2008-10-25 19:50   좋아요 0 | URL
이런 책 완전 제 취향이에요~

로쟈 2008-10-25 20:26   좋아요 0 | URL
관심분야신가 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