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마이리스트(http://blog.aladin.co.kr/mramor/2334537)로 뽑아놓은 책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책과함께, 2008)에 대한 인터뷰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공저자들을 우리말 연구의 '드림팀'이라고 내가 불렀지만, 보통은 '수수께끼팀'이라고 불리는 모양이다. 저자들이 이번에 낸 것이 다섯번째 책인데, 이후에도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 한글 교양서가 꾸준히 이어지면 좋겠다...

공동작업을 통해 지금까지 다섯 권의 국어 관련 책을 펴낸 정주리 교수, 시정곤 교수, 최경봉 교수, 고(故) 박영준 교수(사진 왼쪽부터).

경향신문(08. 10. 08) "대중과 단절된 국어 존립의미 없다”

박영준 전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2007년 작고), 시정곤 KAIST 인문사회과학부·문화기술대학원 교수(44), 정주리 동서울대 교양과 교수(44),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43). 사람들은 이들을 ‘팀’이라고 불렀다. ‘수수께끼팀’이라고도 했다. 2002년 이들이 함께 펴낸 첫 책 <우리말의 수수께끼>(김영사) 덕분이다. 이후 <한국어가 사라진다면>(한겨레신문사), <영어공용화 국가의 말과 삶>(한국문화사), <역사가 새겨진 우리말 이야기>(고즈윈)를 잇따라 내놓았다. 우리말·글의 의미와 가치를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쓴 책들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책과함께)도 마찬가지다. 한글 창제 및 보급의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면서 한글의 원리와 기능을 쉽게 풀었다. 이 책은 정 교수가 개인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했지만 이들 ‘팀’의 다섯번째 ‘공동작업’ 결과물이다.

한글이 우리 것이니까 무조건 좋다가 아니라 제대로 된 평가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학자들끼리 아무리 얘기해봤자 소용없어요. 대중이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관심을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제대로 된 정보와 지식들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시 교수)

“학자들의 논문을 읽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됩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다른 사람들과 의미있게 나누는 게 필요합니다. 학자들이 세상과 단절하고 산다면 학문 자체가 존립할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최 교수)

고려대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함께 수학했던 이들이 ‘국어학의 대중화 작업’에 의기투합한 것은 2000년. 나이도, 근무지도, 관심 분야도 조금씩 달랐지만 국어를 대중화시키자는 생각만은 일치했다. 주제에 대해 함께 연구하고 각자 관심 있는 부분을 맡아 집필한 뒤 토론하고 수정하는 작업이 매번 1년씩 이어졌다. 성남·부산·대전·익산 등 근무지가 서로 다른 터라 모임을 갖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많이 애용했던 모임 장소가 서울역이었다.

주위의 시선이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대중서 쓸 시간에 논문 한 편 더 쓰라는 식이었다. 최 교수는 “지금도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교수라는 사람이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모여서 할 만한 일이냐’고 문제 제기하는 분들도 있다”고 전하면서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우리들이라도 물꼬를 트자고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 교수도 “사실 논문 한 편 쓰는 것보다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책을 쓰는 게 더 힘들다”면서 “네 사람이 모두 같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해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에 펴낸 ‘한글에…’는 한글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어떻게 쓰였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한글을 민족주의적 측면에서만 강조하면서 단편적인 지식으로만 전달하는 대신 한글이 왜 필요한지 그 가치를 다시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시 교수는 “역사적으로 고유문자가 없는 민족의 말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면서 “고유문자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번쯤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일반 국민들이 모국어와 고유문자가 있는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기본 방향이 흔들리면 언어의 양극화가 심화된다”고 덧붙였다.

이들의 ‘공동작업’는 지난해 11월 팀의 리더였던 박영준 교수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잠시 주춤했다. 박 교수는 임종 직전까지 동료들에게 자신의 병세를 알리지 않았다. 이번 책이 1년이나 늦게 나온 이유다. 책의 마무리는 시 교수와 최 교수가 했다. “새 책을 가지고 박 교수님 산소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오겠죠. 하지만 초심만 변치 않는다면 공동작업은 계속되지 않을까요.”(시 교수) (김진우기자)

08. 10. 08.

P.S. 이 '수수께끼팀'에 영어학 전공자인 장영준 교수가 객원으로 가세해서 낸 책 두 권이 <한국어가 사라진다면>(한겨레출판, 2003)과 <영어 공용화 국가의 말과 삶>(한국문화사, 2004)이다. 후자는 문화관광부의 용역을 받아 수행한 연구보고서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두 책 모두 영어 공용화 문제에 관한 유용한 참고문헌이다. <한국어가 사라진다면>은 '2023년, 영어 식민지 대한민국을 가다'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2023년부터 영어 공용화가 시행되는 것으로 가정하여 쓴 흥미로운 책이다. 출간 당시의 리뷰를 참고로 옮겨놓는다.

한겨레(03. 09. 05) 영어 공용화 가상 암울한 미래 역설

이 책은 미래로 떠나는 여행이다. 영화 <백 투더 퓨처>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갖가지 모험을 즐기는 여행은 아니다. 머리로 떠나는 암울한 묵시록적 여행이다. 2003년 한국사회 현실에 기반해 합리적 추론과 개연성을 얽어가는 테마 여행이다. 독자는 영어 공용화가 전격 실시된 2023년부터 500년 뒤까지를 여행하게 된다.

2023년 새해 벽두 매스컴으로부터 영어 공용화를 실시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한국의 영어 공용화는 거의 유례가 없는 경우에 속한다. 식민지 경험이 영어 사용으로 이어진 인도·필리핀 등과 같은 유형에 속하지 않고, 다민족·다종교를 아우르기 위한 필요 차원에서 영어를 사용한 측면이 강했던 싱가포르도 아니고, 지역별로 사용 언어가 달랐던 캐나다·벨기에도 아니었다.

영어 공용화 이후 30년이 흐르자, 정부가 한국어 보존이라는 특수목적을 위해 각 지역마다 설립했던 마지막 한국어학교가 폐교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학비는 영어학교의 절반밖에 안 됐는데도, 입학생이 너무 적어서다. 한국어와 영어를 일선 학교에서 동시에 교육한다는 애매한 원칙은 결국 “학교마다 재량에 맞게 영어와 한국어 중에서 선택하며 수행한다”는 자율원칙으로 선회했고, 학부모와 아이들은 영어학교로 쏠렸던 것이다. 좋은 영어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4~5살 때부터 입시과외를 시키는 사태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확산됐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풍조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투리 영어에 물들기 전 정통 영어를 숙달시켜야 한다는 또 다른 강박관념”이 자리잡기 시작해서다.

영어 공용화 60년 뒤, 정부는 전라도에서 영어를 말하는 ‘정글리시’나, 경상도에서 영어를 말하는 ‘갱글리시’가 만연하자, ‘표준 영어’를 제정한다. ‘아야’나 ‘어머’처럼 어떤 상황에서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오는 말들이 ‘웁스’(oups) 등으로 대체된다. 한국어는 가난한 지역이나 산간벽지에서 겨우 들을 수 있게 된다. 100년 뒤엔 중국어 공용화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마침내 2523년엔 400년 전 매설된 타임캡슐에서 ‘우리말’(코리언)’이라는 제목의 문법책이 발견되면서, 낯선 그 언어를 영어에 섞어 쓰는 게 유식함의 표지처럼 되는 현상이 생긴다.

시정곤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등 5명의 학자가 1년이 넘게 작업한 이 가상의 시나리오는 언어가 우리 일상과 얼마나 질기게 연결돼 있는지, 그래서 결국 영어 공용화는 우리 문화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떤 학술적 접근보다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다.(조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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