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한겨레에서 조순 전 경제부총리의 릴레이 기고를 스크랩해놓는다.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 사태를 신자유주의의 '거픔'이 터진 것으로 규정하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얻어야 하는 교훈에 대해서 짚어주고 있는 칼럼이다. 경제전문가들조차도 이번 사태의 끝을 가늠할 수 없다고 하니(당연히 임기응변식 처방 외에 마땅한 대책도 제시되지 않을 터이다) 두고볼 밖에.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예언대로 본격적인 '이행기' 모드로 진입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겨레(08. 10. 01) [특별 릴레이 기고] 신자유주의 ‘거품’이 터졌다

미국 금융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7000억달러의 공적자금 투입 법안이 하원에서 부결됐다. 최악의 금융 위기가 크나큰 경제위기로 확대됐다. 경제는 이제 막 길고 캄캄한 터널로 진입했다. 언제 어떻게 그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 확실한 것은 터널 속의 세월은 길고 추울 것이며, 그 출구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금융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거품에 있었다. 오랫동안 주식과 부동산에 조성된 거품이 지난 8월부터 계속 터지고 있다. 거품이 터짐으로써, 개인과 금융기관이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개인소비가 줄고 기업의 수익이 격감했다. 약 일주일 동안 미국전역에서 회사채 발행이 한 건도 없는 상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어떤 미국 국회의원의 말을 빌린다면, 미국경제는 곧 심장의 고동이 멈춰질 지경이었다. 우선 심장마비는 막아야 하기 때문에, 7000억달러 구제금융 법안이 나온 것이다.


미국은 원래, 금융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나라였다. 미국 사람들은 원래 흥청망청하는 국민이 아니다. 그런 미국에 왜 이런 거품이 생겼는가. 그 이유는 1980년대 말부터 경제정책의 중점이 ‘메인스트리트’로부터 ‘월스트리트’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월가출신 인물이 계속 중앙은행 총재 자리를 지켰다. 재무장관도 월가 출신이 많았다. 경제정책의 기조는 월가의 이익이 되도록, 가급적 유동성을 많이 공급하여 자산시장을 부추겼다. 종래 경제정책의 중점이었던 산업구조, 국제수지, 사회보장, 서민생활 등은 사각지대로 물러났다.

월가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금융에 대한 기본을 망각했다. 원래 금융업이란 남의 돈을 가지고 차질없이 운영해야 하는 기업이다. 때문에 좋은 금융가는 보수적이어야 하고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월가 사람들은 너무 자유롭게 자기 이익만 챙겼다. 그러다가 이번의 덜컥수에 걸렸다. 그린스펀 전 연준의장은 최근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금융에 작동해야 경제가 잘 된다는 말을 했다. 19년이나 중앙은행 총재직을 지킨 사람이 이런 글을 쓰다니,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였다. 아연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소련이 망한 후로 1990년대 미국에는 장밋빛 도취감이 감돌았다. 이제, 전쟁과 혼란의 역사는 끝났다, 자유방임을 하면 다 잘 된다, 정부는 작을수록 좋다, 경상수지 적자 따위는 문제 없다, 기업은 주가를 올리면 된다, 이런 식이었다. 자유화, 개방화, 민영화, 작은 정부면 그만이라는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에 확산됐다. 남미, 아시아, 러시아 등의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월가의 금융꾼들은 많은 이익을 챙겼다.

아! 그러나, 인간의 시야는 짧은데 비해 세상은 빨리 변한다. 환락이 지나치면, 비애가 온다. 미국경제가 부메랑 효과를 맞았다. 개도국이나 맞아야 할 ‘국제통화기금(IMF) 폭탄’을 미국이 맞은 셈이다.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했다. 5대 투자은행이 거의 다 몰락했다.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 에이아이지(AIG)가 ‘구제’를 받았다.

문제는 장래이다.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다. ‘구’자유주의의 난맥을 처리한 1930년대 ‘뉴딜’식 정책이 나올 것인가. 그 가능성은 원래는 없었다고 나는 보았지만, 이제는 모종의 ‘뉴’ 뉴딜이 불가피해진 것도 같다. ‘신’자유주의는, 많은 자유주의자들의 뜻과는 달리 숨통이 막혀버렸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가지고는 경제의 실물부문의 문제들, 이를테면, 국내총생산(GDP)의 6%에 달하는 경상수지 적자, 0%의 개인 저축, 70년대 이후로 실질적인 증가 없는 근로자 소득, 의료혜택 없는 4700만 미국인, 깊어가는 양극화 등의 현실을 바로잡을 수 없다.

7000억달러는 미국 당국이 가지는 마지막 카드였다. 그것은 사실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미봉책으로 붕괴된 시스템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사실 7000억 달러를 가지고 충분할지조차 확실치 않았다.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의회도 모르고 있었다. 매케인도 오바마도 이 카드에 찬성했다. 앞으로의 경제에 대한 아무런 의견도 그들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영·미의 금융모델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세계를 위해 우선 미국이 바른 길을 찾기 바란다. 심리적인 공황을 벗어나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심기일전, 상상력을 발휘하기 바란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각론은 아직 논할 단계가 아니다. 총론은 명백하다. 첫째, 신자유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못 쓴다. 미국도 이 과정을 졸업했다. 둘째, 나라가 잘되자면, 정부와 민간의 역할 분담이 잘돼 있어야 한다. 민간이 정부를 대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셋째, 금융부문과 실물부문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넷째, 금융가는 용감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이노베이션을 해서도 안 된다.(조순/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 부총리)

08. 0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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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8-10-01 10:00   좋아요 0 | URL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이 사람은 천상 학자인데 왜 정치판에 뛰어들어 그 험한 꼴들을 봤나 싶은 거예요. '원로'만이 쓸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분석이 참 좋네요. 고맙습니다.

로쟈 2008-10-01 20:27   좋아요 0 | URL
인간 자체가 정치적 동물이라면 '정치판'이 따로 있는 건 아닐 테지요. 한국어의 '정치'란 그냥 권모술수의 동의어가 돼버렸지만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1 22:26   좋아요 0 | URL
그린스펀도 아담 스미스를 중학교 사회교과서로만 배웠나 보군요.

로쟈 2008-10-01 22:34   좋아요 0 | URL
저금리 기조 때문에 부실 대출이 급증했다고 하니까 그린스펀도 면책 대상은 아니죠...

노이에자이트 2008-10-01 23:13   좋아요 0 | URL
미국 플로리다 어느 동네는 완전히 유령마을이 되었더군요.빈 집에 차압딱지 붙은 집 투성이...그나마 사람사는 집도 이사갈 준비를 하는데...이러려고 소련을 무너뜨렸나요?

로쟈 2008-10-02 22:22   좋아요 0 | URL
미국도 무너지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