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예기치않게 병원에서 시간을 죽이게 됐다. 빈손으로 TV만 바라보는 건 불쾌한 일이어서 부랴부랴 편의점에서 신문을 사들고 와 꼼꼼하게(!) 읽었다(그래도 시간이 남아 여성지까지 들췄지만). 그 중 마음에 든 칼럼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원전인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다시 읽으며 미국 금융위기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오늘의 빅뉴스는 미국의 금융구제안이 하원에서 부결됐다는 소식이어서 타결을 전제로 한 아침신문의 기사들이 '어제' 신문의 기사가 돼버렸다).
경향신문(08. 09. 30) 맥베스의 ‘보이지 않는 손’
김정환 시인이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에 나섰다. 그 첫 결실이 지난달 5권짜리로 나왔다. 4대 비극 가운데 나는 ‘맥베스’부터 손을 댔다. 인간의 야망과 탐욕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빠른 템포로 보여주기도 하거니와, 세계 경제를 뒤흔들어 놓고 있는 월스트리트의 금융위기 상황 탓이기도 했다. 월가의 이른바 금융공학의 ‘천재’들과 정부가 끼어들지 말아야 시장의 창의성이 발휘된다고 목청을 높여온 시장 만능주의자들이 ‘탈(脫)규제’의 신주단지로 떠받들다가 막상 위기가 터지니까 보이지 않게 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 그 첫 발설자인 맥베스의 육성을 김 시인의 번역으로 다시 듣고 싶었던 것이다.
'맥베스’는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가 마녀의 예언에 혹해 던컨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지만, 예언대로 제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하고 던컨의 아들에게 복수의 죽임을 당한다는 줄거리다. 그 과정에서 맥베스는 역모에 동참한 친구 뱅쿼의 아들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은 두려워해 이들 부자를 살해하려 자객을 보내는데, 불안해하는 아내에게 “모르는 게 좋아, 내 여보는, 나중에 박수만 치면 돼”라며 이렇게 말한다.
- 이기심에 대한 파멸이 原典 -
“오라, 눈꺼풀 꿰매는 밤, 가려다오, 목도리로, 가여운 날의 부드러운 두 눈을, 그리고 피비리고 보이지 않는 네 손으로 말살하고 갈가리 찢어라, 그 위대한 생명의 임대 계약을, 그것이 나를 계속 창백하게 하노니. …나쁘게 시작된 일은 나쁜 짓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노니.”
이것이 애덤 스미스의 말이라며 경제를 안다는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보이지 않는 손’의 원전이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자본을 국내 산업의 지원에 사용하고 노동생산물이 최대 가치를 갖도록 노동을 이끈다면, 각 개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수입을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가 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된다…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목적을 증진시키게 된다”고 했다. 탈규제론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그것이 누적돼 결국 더 나은 사회가 된다’며 보이지 않는 손을 시장 만능주의의 제단(祭壇)에 모셔왔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를 지낸 경제학자 존 케이는 이게 잘못이라고 꼬집는다. 셰익스피어와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기원을 스미스의 책에서 찾으려 하거나, 현대 경제를 이해하는데 그의 말을 끌어다 쓰는 것은 실수”라고 잘라 말한다. ‘도덕감정론’을 쓴 윤리학자이자 셰익스피어의 팬이었던 스미스는 인간의 마음이 나쁜 것에 물들기 쉽다고 보았던 만큼 자유주의를 찬양하기 위해 이 말을 쓰지도 않았을뿐더러, 맥베스의 이기적 행동이 사회 전체의 후생을 증진시키기는커녕 자신까지 파멸로 이끈다는 교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월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렇다. 시장 만능주의자들의 신주단지는 헛것이었지만, 맥베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섭리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규제를 피해가며 첨단 금융공학을 통해 고위험 고수익의 복합 금융상품을 팔아 재미를 봤던 투자은행들이 몰락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규제 받지 않는 이기심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봉사한 것이 아니라, 탐욕의 종점이 언제나 비극일 수 밖에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 美금융위기도 ‘탐욕의 종말’ -
실물을 뒷받침해 경제를 돌리는 도구이어야 할 금융이 ‘몸통을 흔드는 꼬리’가 된 것이 ‘금융 무정부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는 데 국제사회에 이견은 없다. 금융뿐 아니라 경제시스템에 대한 대대적 수리가 필요하다는 게 금융선진국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그런데 우리 정부만 규제개혁 속도론을 외치며 워싱턴과 월가 사람들이 용도폐기한 신주단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400년 전의 셰익스피어를 다시 불러내고, 맥베스의 피비리고 보이지 않는 손을 지금 읽어야 한다며 슬그머니 번역을 내놓은 김 시인의 혜안이 돋보일 뿐이다.(유병선|논설위원)
08. 0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