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부터 새로 완역되기 시작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민음사, 2008)의 번역관련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780). '번역을 말한다'라고 분류돼 있는데, 연재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직접 이 완역본 시리즈에 참여한 번역자 송은주 씨의 번역체험담이어서 눈길을 끈다. '번역과 번역가'로 분류해놓는다. 

교수신문(08. 09. 08) 사료의 도서관, 유려한 문체의 정원에서 넋을 잃다

1776년부터 1788년까지 12년에 걸쳐 전 여섯 권으로 간행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깊이 있는 통찰력, 방대한 분량에 담긴 상세한 기술, 해박한 역사적 고증 등으로 무수히 많은 로마사 책들 중에서도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유려한 명문으로 영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국내에 번역 소개된 『로마제국 쇠망사』는 일부를 간추린 발췌 번역본이나, 완역이라 해도 일어판의 중역본 정도가 고작이었다.

발췌 번역본은 여섯 권이나 되는 전체 분량을 한 권으로 줄인 것이어서 원작의 방대한 세계를 접하기에는 부족하고, 중역본은 일어판을 바탕으로 옮기다 보니 생소한 일본식 한자어가 여과없이 들어가고 지나치게 고어투로 서술됐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고전을 수용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원전의 충실한 번역이 우선돼야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와 같이 이미 오래 전에 고전의 반열에 오른 주요 저작이 제대로 번역된 적이 없다는 것은 전공자들에게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나 크게 아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로마제국 쇠망사』의 번역 작업은 힘들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번역판은 가장 뛰어난 편집판으로 인정받고 있는 J. B. 버리 판을 토대로 했으며, 전체 8300개 각주 가운데 버리가 편집한 각주 4700여개 중 본문 내용과 관계없는 350개만 삭제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살린 국내 최초의 완역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서기 2세기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부터 동로마 제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약 1400년 간의 역사를 다루었다. 기번은 이 장대한 역사를 다루면서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철저히 조사하고 연구한다는 자세를 취했다. 그가 수집하고 연구한 엄청난 양의 역사적 사료는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는 유려한 문체로 한데 어우러져 방대한 大河劇을 이루었다. 기번의 최고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실증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면서도 엄청난 분량의 로마사를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빚어내는 흥망성쇠의 장으로 박진감 있게 그려냈다는 점일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역사 속에서 행하는 행동과 결단, 운명의 변전은 웬만한 문학작품을 능가하는 재미를 준다.



유려한 문장에 실린 생동감 넘치는 인물과 사건 묘사는 역사서는 딱딱하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털어내며 이 작품이 어떻게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생명력을 지니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기번은 성실한 역사가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엄청난 사료에 눌리지 않고 이를 자유자재로 요리해내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덕분에 역사 전공이 아니라 영문학을 전공한 역자로서도 번역 작업을 하면서 로마사의 일부가 됐던 수많은 인물들의 삶 속으로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이에 더해 『로마제국 쇠망사』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대하는 그의 역사가로서의 공평무사한 안목이다. 간혹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편견이나 그릇된 정보에서 나온 대목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그가 18세기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놀랄 만한 중립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이 또한 『로마제국 쇠망사』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덕목일 것이다.

로마의 멸망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많지만, 기번은 기독교의 성장으로 인한 사회심리학적 요인을 가장 큰 요인으로 들고 있다. 무려 14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속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제국이니, 아마도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로서는 로마제국이 언젠가 멸망하리라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기나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천년이 넘는 긴 세월도 지나간 과거의 일부일 뿐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시대 안에서는 그 시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읽는 것은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보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기번의 로마사를 자세히 읽어나가며 몰입하는 즐거움과는 별개로, 번역 작업에는 상당한 노력이 요구됐다. 기번의 작품은 수많은 역사적 자료를 치밀하게 엮어서 쌓은 거대한 산맥과도 같아서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기번의 역사 서술은 읽는 이가 이미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역사와 서양 문화에 관한 소양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 위에 자신이 섭렵한 방대한 자료를 거침없이 풀어나가는 식이다. 따라서 기번이 요구하는 만큼의 기본 지식이 부족한 역자로서는 이를 따라가기 위해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또한 기번은 해박한 역사적 지식뿐 아니라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 각종 언어에도 능통하여 원사료를 읽어낼 수 있었으며, 이를 본문과 각주에도 무수히 인용했다. 툭하면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이러한 특수 언어들의 인용문 또한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장애로 작용했다. 특히 역자들을 괴롭혔던 것이 본문에 육박하는 방대한 양의 각주였다.

기번의 ‘잡담’이라고도 불리는 총 8300여 개(버리 판 4700개)의 각주는 본문 내용과 관련돼 본문의 이해를 돕는 것도 있지만, 본문과 별 관계없이 엉뚱하게 자신의 지인들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든가 말 그대로 잡담도 상당수였다. 따라서 편집 과정에서 일부 각주는 생략됐다. 또한 영문학사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기번의 명문장도 번역하는 데 많은 애로가 따랐다. 한 문장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만연체로 서술된 부분이 많아서, 어떻게 하면 기번 특유의 유려한 문체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되도록 읽기 편하고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옮길 것인가의 문제를 번역하는 내내 고민해야 했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방대한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문학작품이므로, 가장 이상적인 경우를 말한다면 역사를 전공해 풍부한 전문 지식을 갖추었으면서 동시에 기번의 까다로운 문체를 정확하면서도 매끄럽게 옮길 수 있는 영어 실력과 문학적 소양을 구비한 역자가 번역을 맡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번의 작품을 완벽히 소화할 수 있는 모든 자질을 두루 갖춘 역자가 번역을 맡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 보니 역사 전공자도 아닌 영문학 전공의 역자들이 번역을 맡게 됐다. 기번의 저작을 국내 최초로 완역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몇 년간에 걸친 고된 작업에 매진했으나, 끝나고 보니 새삼 부족함을 아쉽게 느낄 수밖에 없다.

비전공자로서 번역을 하면서 무엇보다도 아쉬운 점은 로마의 여러 관직명이나 제도명 등의 명기에 완벽을 기하기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고전은 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언어로 새롭게 번역되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국내 최초 완역으로 이제 이 책을 국내 소개하는 데 본격적인 첫발을 떼었다고 생각한다.

송은주 번역가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성과 감성』, 『순수의 시대』 등을 번역했다.

08.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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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1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친 김에 기번 자서전 번역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명저라고 하더군요.쇠망사는 로마사 전공자보단 영문학하는 사람이 번역하는 게 더 나을까요? 번역하면서 공부를 엄청나게 했을 것 같군요.

로쟈 2008-09-17 17:39   좋아요 0 | URL
짐작엔 협업이 최선이었을 것 같습니다...

shimy 2011-02-11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다가 너무 화가 나서 웹서핑 중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 4권을 읽고 있는데 해도해도 너무하군요. 발번역이라는 말이 있던데 4권에 딱 어울립니다. 그래도1~3권까지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번역의 질이 확 떨어지더군요. 로마제국 법체계 설명하는 부분에선 번역기 돌려 번역한 수준이고 p469에선 '성 세례 요하네스 교회'라는 단어를 보곤 열이 확 올라오네요. 세례 요하네스라니요. 이게 어느나라 말입니까. 영어도 아니고 독일어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니네요. 아마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성 세례 요한교회'를 말한 것이겠죠. 역사 전공자인지는 제쳐두고 기본적인 역사 소양도 없는 것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동정녀도 아닌 성처녀라고 해놓질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