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의 일정을 소화하고 집에 돌아오니 이 시간이다. 아니 '소화'에는 시간이 좀더 필요하겠다. 책과 복사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상에는 신문지도 몇 장 얹어져 있는데, 스크랩을 해둔다고 미뤄놓은 것들이다. 일단 하나만 옮겨놓는다. 이달초 방한했던 홀거 하이데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이다(굳이 분류하자면 전공은 경영학인 모양이다). 한국의 '집단 트라우마'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와 노동자 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학자라는 점이 이채롭다. 덧붙여,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의 자유를 목줄에 이끌려 산책 나온 강아지에 '적확하게' 비유한 것이 눈길을 끈다(언제 써먹어야겠다!).

경향신문(08. 09. 09) “지구화는 트라우마의 심화과정”

‘지구화’는 자유로운 삶의 확대 과정인가, 트라우마(상처)의 심화 과정인가. 이 물음에 홀거 하이데 독일 브레멘대 명예교수(69·사진)는 ‘지구화’는 자유라는 허상 속에서 심화되는 트라우마라고 답한다. 이화여대 탈경계 인문학연구단의 ‘지구화와 문화적 경계들: 탈경계 문화변동 현상의 비판적 재검토’ 국제학술대회(9월 4~5일)를 위해 방한한 하이데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자본과 시장이라는 외부 힘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통해 트라우마를 내면화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에 회사 대표가 걱정하던 것들을 이제는 종업원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 우리 나라의 경제가 망하면 내가 끝장난다는 그런 위기감을 개인이 걱정하고 있어요. 그 위기란 그저 돈벌이의 위기일 뿐, 진정 사람 사는 것의 위기와 다를 수 있는데도, 사회는 끊임없이 협력을 요구합니다.”

한국사회의 중장년층에 만연한 일중독 현상이나 과로사는 ‘지구화의 경쟁논리가 하나의 집단적 트라우마로 각각의 개인에 내장되며 벌어지는 병리현상’이라는 것이다. 하이데 교수는 공원에 산책 나온 강아지를 예로 들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자유는 길이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 목줄에 이끌려 산책 나온 강아지의 자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강아지의 모습이 자유로워 보이죠. 그런데 결국 그것은 주인(자본)의 손아귀 아래에서의 자유일 뿐입니다.” 이 자유는 “폭력적 과정을 겪은 이후 상처 받은 이들의 자유”이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처벌하고, 정신병동에 가두거나 사형으로 완전히 격리시키는 등 근대 자본주의 정착 과정에서 이뤄졌던 폭력적 과정 후에 만들어진 자유”다.

하이데 교수는 상대적으로 한국사회의 집단적 트라우마가 심하다고 했다. “일제식민지와 미군정, 한국전쟁, 군부독재 등을 압축적으로 겪으면서 매우 폭력적인 과정으로 형성됐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민주화됐다고 하는 현 시점에도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법에 의해 일부 사람들을 가두는 것이 집단 트라우마가 강한 사회임을 증명합니다.”

그는 또 한국사회의 집단 트라우마가 대물림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고 했다. “어른들이 직장과 사회 생활에서 받은 압력과 트라우마가 집집마다 아이들에게 전가됩니다. 부모 자격으로 자식에게 성적 올리기만 강요하고, 아이들의 진정한 내면적 욕구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가 되는 식으로 트라우마의 악순환이 이뤄집니다.”

이러한 악순환에 대한 돌파구는 근원 모를 두려움, 공포를 인정하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는 “주위 사람들과 아픔을 나눌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효도, 예의 때문에 아무 말도 못꺼내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맞을 각오로 아이가 자신의 욕구를 말하는 순간 해결 가능성이 생깁니다.”

하이데 교수는 촛불집회가 단적인 예라고 했다. 무엇보다 비폭력성에 주목했다. “내 스스로 진정 강하다고 생각하면 주먹을 보이지 않고 얌전하게 말로 합니다. 대중은 내면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비폭력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또 촛불집회의 자발성도 꼽았다. “힘은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중앙 통제가 아닌 각자 자기를 조직화하고 분권화하는 개별 행동에서 나옵니다. 각자 스스로 움직이니 정권 차원에서도 어떻게 대응할지 당황할 수밖에 없었죠. 일이 벌어질 땐 있지도 않은 ‘배후’ 얘기를 하다가 뒤늦게 검거 선풍을 일으킵니다. 오세철 교수 체포건처럼 뒤늦게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고, 자다가 뒷북치는 행태를 보입니다. 대중의 자기조직화, 자발성이 갖는 강한 힘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하이데 교수는 강한 집단 트라우마 후에 민중이 자기 삶에 대한 책임성을 갖는 자세가 생겼는데, 그것이 촛불집회를 통해 잘 드러났다고 진단했다. 그렇기에 “한국사회에서 아직 희망을 얘기할 수 있다”고 했다.

하이데 교수는
1987년 7월 노동자 대투쟁 때 한국에 처음 온 뒤 한국 자본주의와 노동자 운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해왔다. 저서 ‘노동사회에서 벗어나기’가 국내에 소개돼 있으며, 강수돌 고려대 교수가 그의 제자다. 이날 인터뷰도 강 교수의 독일어 통역으로 이뤄졌다.(손제민기자)

08. 09. 14.

 

 

 

 

P.S. 기사 덕분에 강수돌 교수의 책들을 검색해봤다. <경영과 노동>(한울, 1997/2002), <노동의 희망>(이후, 2001), <일중독에서 벗어나기>(메이데이, 2007),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생각의나무, 2008) 등의 리스트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찾아보니 <신자유주의 IMF 그리고 국제연대>(문화과학사, 1998)에도 '세계시장, 신자유주의 , 그리고 살아있는 연대' 란 제목으로 하이데 교수가 쓴 글이 포함돼 있다. <당대비평>(2003년 여름호)에는 '노동중독에서 탈출하기: 노동조합은 노동중독 사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란 글이 실려 있다. 몇 차례 방한하기도 하여 한국과는 인연이 깊은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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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4 2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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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4 2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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