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의 '로쟈의 인문학서재'를 옮겨놓는다.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서울대학교에서 개최되는 '세계철학대회'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인데, 당초엔 그리스철학 연구자인 F. M. 콘퍼드의 <쓰여지지 않은 철학>(라티오, 2008)을 고려했다가 <서기 천년의 영웅들>(아테네, 2008)에서 우연히 읽게 된 중세철학자 이븐시나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한겨레21(08. 07. 30) 이븐시나만으로도 얼마나 광활한가
‘철학자들의 올림픽’이라는 세계철학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된다. 1900년 제1회 파리 대회 이후 5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인문학 행사라고 한다. 이번 대회의 가장 큰 특징은 ‘비유럽 철학’과의 교류에 있으며, 그런 취지에 맞게 영미나 유럽 이외 지역의 철학자들이 다수 참여한다고. 이 ‘비유럽 철학’에 대한 관심이 대회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을까? 장피에르 랑젤리에의 <서기 천년의 영웅들>(아테네 펴냄)에서 중세 페르시아의 철학자 이븐시나(980~1037)에 관한 장을 읽으며 그런 의문이 들었다.
책은 지난 2000년 여름 <르몽드>에 3개월간 연재됐다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인데, 서기 천년을 전후한 시기를 산 12명의 인물들에 대한 초상을 그리고 있다. 정치가에서 수도사, 여류문인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인물들이 고르게 배정된 가운데, 서구에는 ‘아비센나’란 이름으로 알려진 이븐시나가 서기 천년의 대표 학자로 소개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등장한 최고의 철학자’라고 일컬어짐에도 ‘철학자’라고 한정되지 않은 것은 그가 남긴 업적이 방대하면서도 넓은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주저인 <의학정전> 때문에 사전류에는 ‘의사’나 ‘의학자’로 기재되어 있을 정도다.
랑젤리에가 그려낸 이븐시나의 초상을 잠시 따라가보면, 일단 그는 조숙한 천재였다. 990년, 그의 나이 10살에 코란 전체를 다 암송할 줄 알았다. 게다가 이 특별한 아이는 당시의 문학·수학 지식에도 이미 통달해 있었고 그를 가르치려던 많은 스승들을 곧 앞지르게 됐다. 이후에 그는 스스로 학문을 터득해나가는데,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라고 판단한 의학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오히려 숙련된 임상의들을 가르치기까지 한 것이 16살 때다. 밤낮이 따로 없이 독서하고 이해하는 일에만 매달린 그는 곧 지식의 대가가 됐다. 그런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도전해 마흔 번이나 읽은 것은 전설적인 일화다. 아마도 유일하게 애를 먹은 책 같은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가였던 알 파라비의 책을 읽고서 비로소 <형이상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한다.
996년, 이븐시나는 그의 명성을 들은 사만 왕자의 병을 치유해준 덕분에 왕궁의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게 된다. 이 도서관의 장서가 4만5천 권이었다고 하니까 ‘지식의 탐구자’ 이븐시나에게는 경이로움 자체였을 법하다. 나중에 그는 왕궁으로 들어와서 살라는 제안을 받지만 거절하는데, 이유인즉 자신의 장서를 옮기려면 400마리의 낙타가 필요해서였다고 한다. 이븐시나는 18살에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독서를 통해서 지식을 완성한다. 그리고 이후 40년 동안은 지식을 확장시키는 대신에 글쓰기를 통해서 심화시켜나간다.
그가 21살 때 쓴 첫 저서 <편집>은 운율법에 관한 것이고, 법학자를 위해서는 <합과 실질> <양서들과 악> 두 권의 책을 쓴다. 그의 걸작인 <의학정전>(전 5권)은 7년에 걸쳐 쓴 것으로 무려 100만 단어가 들어가는 기념비적인 분량이다. 당대의 의학 지식을 집대성하고 있는 이 책은 12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된 뒤에 16세기까지 유럽의 의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븐시나는 평생 242권의 책을 남겼는데, <학문의 서> <치유의 서> <공정의 서> 등이 대표작이다. 특히 <치유의 서>는 5천 쪽이 넘는 분량으로 부피나 완성도에서 전대미문의 책으로 평가된다. 이성과 신앙, 그리스 철학과 코란을 조화시키려 했던 그의 철학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중세 후기 스콜라철학의 기원이 됐다. 비록 너무도 방대하고 정교한 그의 철학을 요약하는 일은 아직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븐시나의 생애와 저작을 잠시 들여다본 것은 우리에게 덜 알려진 ‘비유럽 철학’의 지평 또한 얼마나 광활한가를 확인해두기 위해서다. 어쩌면 매혹적일 수도 있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느끼자 이븐시나는 자신의 철학에 따라 자기 몸을 돌보는 것을 중단했다. <치유의 서>에 그는 이렇게 써놓았다. “육체는 여행의 목적이 달성됐을 때 떠나보내야 하는 짐승이다.” 아직 한 권도 소개되지 않았지만 그의 철학에 대해서 조금은 더 알고 싶어지지 않는지?
08. 07. 31.
P.S. 코르방의 <이슬람철학사>(서광사, 1997)와 몇몇 중세철학사/사상사 책에서 이븐시나에 관한 장을 읽어볼 수 있다. 정수일 선생의 <실크로드 문명기행>(한겨레출판, 2006)에도 이븐시나의 학문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븐시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40번' 읽었다는 에피소드는 일부 책에 '4번' 읽은 걸로도 나오는데, '40번'이 맞는 듯싶다(적어도 그게 다수설이다).
오랜만에 학교에 나와 구내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더니, 여러 인종의 철학자들 다수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더 비싼 식당도 있지만 내가 들른 곳은 3000원짜리 메뉴를 판매하는 곳이었다.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러 온 '철학자'들의 식단으로는 너무 '착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란에서 온 철학자도 있었을까?..